Chapter 56
에드를 자연스럽게 이끌며 대공이 계단을 올랐다. 안에서 문을 열어 준 점원이 반기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자를 보고 싶은데.”
“모자는 5층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라며 손을 내밀어 안내하는 점원을 따르자 위층으로 올라가는 마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창살처럼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직원을 따라 대공과 에드는 움직였다.
“마도구가 움직이면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현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직원이 5층 버튼을 누르며 설명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웅, 하는 느낌과 함께 마도구가 올라갔다.
에드는 천천히 움직이는 마도구를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운행 장치였다. 그리고 2층에서 서자 사람들이 탔고 3층도 마찬가지였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크지 않은 마도구로 사람들이 자꾸 타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던 대공과 에드는 점점 더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대공은 사람들에게 점점 밀리는 에드의 손목을 잡았다가 보았다. 에드의 검은 상의에 묻은 손자국을.
‘이런 자국이 왜 여기에 묻어 있지?’
에드의 등을 털어 주려던 대공은 아, 하며 깨달았다.
‘오솔길에서 에드를 둘러쌌던 놈들이 남긴 흔적이구나.’
아까 자세히 살펴봤는데 이걸 왜 놓쳤지?
대공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런 놈들의 흔적이 남은 옷을 에드가 이대로 계속 입게 놔둘 수는 없었다.
“4층은 남성복 매장입니다. 4층에서 내리실 분들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들리는 직원의 말에 대공은 에드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의 사나움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때려눕힌 놈들을 더 손보지 못해 아쉬운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 남의 손을 탄 에드의 옷을 벗기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것인지.
“…….”
그러다 손안에 가득 잡힌 에드의 손을 느끼곤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이 손에 절대로 위해를 가할 수 없겠구나.’
손바닥을 따사롭게 감싸는 온기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이 절로 풀렸다.
* * *
남성복 매장인 4층에서 내렸을 때 에드는 어리둥절했다.
모자를 사러 가는 길이었는데 대공에게 손이 잡힌 채 사람들에게 떠밀리듯이 마도구에서 내리자 에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 전하, 1층 더 올라가야 하는데요.”
“응, 잠깐만 여기 좀 둘러보고.”
4층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직원에게 몇 가지 질문한 대공은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맞춤 의상실과 달리 옷이 진열되어 입어 보고 구매할 수 있는 매장이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옷을 고르는 앞쪽보다 개인적인 공간으로 대공을 안내한 직원이 말했다.
“밝은색의 옷을 찾으신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원하시는 색감이 있으실까요? 고객님?”
전문적이고 유연하게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대공에게 물었다.
음, 하며 대공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항상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검은색 상의를 입는 에드였다.
‘옅은 금발에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 이니까 어떤 색이든 잘 어울리고 잘 받을 것 같은데.’
대공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기자 그를 알아챈 직원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노란색 옷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 * *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몇 번째 옷을 갈아입는지 몰랐다.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이번엔 연보라색 옷이었다.
‘이게 어울리는 건가?’
무슨 옷을 입고 나가던 직원과 대공이 어울린다고 맞장구를 치니 에드는 그게 다 사람의 혼을 쏘옥 빼놓는 상술 같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야, 정말 너무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연보라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나갔을 뿐인데 직원은 손뼉을 치며 방금 전 했던 칭찬을 또 입에 올렸다.
‘칭찬도 돌려막기인 건가.’
어째 점점 더 영혼이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잘 어울릴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군.”
“…….”
……사람을 앞에 세워 놓고 그런 말을 그런 표정으로 하면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대공이야말로 평범한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는데 너무 멋있어서 눈길이 절로 쏠렸다.
“그러니 이번에 이걸 입어 보자, 에드. 너무 눈에 띄니까 좀…….”
진짜 이게 잘 어울리는 게 맞나? 고개를 갸웃하던 에드는 대공이 건네는 시커먼 옷들을 손에 들었다.
‘눈에 띄니까 좀……이라니? 너무 눈에 띄니 이상하다는 걸까?’
대공이 주위를 경계하듯이 훑는 걸 보며 에드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이번엔 검고 도톰한 옷들이었다.
* * *
경마장은 현재 일라에서 열리는 축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휴양지로 유명한 일라에서 개최되는 경마는 다른 지역에서 나들이 나온 귀족들도 많이 찾았다. 그래서 이 기간의 경마장은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사교 장소로 통했다.
귀족 전용인 특등급 관람석은 안경을 쓴 귀족들과 부채를 팔랑이는 귀부인들로 꽉 찼다. 둥그런 경마장 안에서 말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좌석도 널찍널찍해서 여유롭고 시원한 자리였다.
그보다 낮은 1등급 관람석은 뜨거운 태양을 막기 위해 설치된 차양 아래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멋들어지게 옷을 차려입은 그들은 음식을 먹기도 하며 쌍안경으로 말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등급인 2등급 좌석은 차양이 없어서 모자를 쓰거나 손으로 이마를 가린 사람들이 많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좌석이 마치 대한민국의 영화관 같았다. 조금만 팔을 움직여도 옆 사람과 닿았고 의자에 등을 조금만 깊게 기대도 끼익 소리가 울렸다.
‘대공께서 많이 불편하실 텐데.’
에드는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대공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옆 사람과 붙는 건 아닌지,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정신이 사나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이럴까 봐 안 오고 싶었는데…… 에드 소매가 살짝 긴 새 옷을 걷으며 옆에 앉은 대공을 곁눈질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뭐라고?”
관람객들이 입으로 부는 장난감까지 동원해 부우우 소리를 울리자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대화가 원활하지 못했다.
대공이 에드에게 고개를 가까이 붙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 바람에 챙이 긴 모자와 모자가 부딪혔다.
대공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드와 시선을 맞추며 눈으로 물었다. 뭐라고 했지?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신지요? 대공 전하.”
아, 하며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대공의 시선이 맞닿은 모자와 모자 사이로 들어차는 햇살에 푸르게 빛나는 에드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와아!
그때 백마인 슈와 흑마인 펄이 등장했다. 커다란 함성에 에드는 대공과 맞닿았던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나마 형체가 보이는 말을 바라보았다.
오늘 세 번째 경기에서 뛰는 슈와 펄이 경기장으로 나와 얼굴을 비쳤다. 사회자가 확성기로 소개를 하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띤 응원을 보냈다.
“슈! 오늘도 바람 같이 달리는 거다!”
“펄! 오늘도 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라고!”
그리고 에드의 옆에 앉은 관람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까지 휘두르며 소리 지르자 대공이 손을 뻗었다. 에드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
“…….”
그에 몸이 딱 붙으며 서로를 직시하던 시선이 챙긴 긴 모자와 모자가 맞닿은 느낌이 들고 나서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타앙!
경쾌한 신호음을 시작으로 첫 번째 경마가 시작되었다.
* * *
타앙! 울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경마에 관람객들이 환호를 질렀다. 경마장 안이 흥분으로 일렁였다.
함성의 홍수 속에서 대공이 물었다.
“괜찮아? 에드?”
“아, 네에에. 괜찮습니다!”
에드는 모자를 꾹꾹 눌러쓰며 대답했다.
괜찮지 않았다.
옆 사람이 팔을 휘둘러서가 아니었다. 대공이 너무 가까이 붙어서 그랬다.
대공과 가까이 붙은 몸을 슬쩍 떼며 에드는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일색인 옷을 사고 모자를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온갖 모자를 다 씌워 볼 기세로 직원과 대공이 맞장구를 쳤는데 결국 구매한 것은 챙이 넓은 검은 모자였다.
고개를 돌린 에드는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기수를 태운 여섯 마리의 말들이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말을 향해 응원을 날리는 관람객들의 목소리에는 즐거움과 열망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에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에 쥔 표를 내려다보았다. 경마장에 입장할 때 오늘 있는 총 세 번의 경기에서 어떤 말이 1등을 할지 표에 미리 적어 두고 확인 도장을 쾅쾅 박았다.
‘이걸 다 맞히면 경품을 준다고 했는데.’
그래서 관람객들은 자신이 번호를 찍은 말을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에드는 5번 말을 응원했다. 벌써 반 이상을 내달린 말들의 승부가 어느 정도 보였다.
1위와 2위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관람객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1번과 3번 말이었다.
대공은 그냥 1번 말로 통일했다.
그걸 보며 에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공이라면 뭔가 축적된 정보를 통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실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