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55화 (55/198)

Chapter 55

다시 쓰러진 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던 대공은 오른손을 감싼 에드의 온기를 느꼈다.

대공이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끝에는 아침 햇살에 산뜻하게 빛나는 에드가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대공이 허리를 숙였다. 에드의 무릎에 묻은 모래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에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제는 얌전해져 길가 한쪽에 서 있는 조이의 등에 에드를 올려 태우며 말했다.

“제이드 공작이 다 좋은데 사고만 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웃는 대공의 심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까는 무슨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노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였는데.

“그러니 수습은 저들에게 맡기고 가자, 에드.”

등자를 밟고 조이의 등에 오른 대공이 에드의 배를 한 팔로 감쌌다. 다른 한 팔로 고삐를 쥔 채 조이를 배를 툭, 차자 조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오솔길을 내달리는 대공의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에드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너무 빨라? 에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대공의 목소리에 에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러나 한참을 내달릴 것 같았던 조이가 오솔길 한적한 곳에서 멈췄다. 대공이 고삐를 당긴 탓이었다.

조이에서 내린 대공은 나무에 말을 매고 에드 앞으로 다가왔다.

대공은 에드의 몸이 불편하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조이를 세웠다. 에드가 작게 아, 하고 신음을 흘렸을 때였다.

“에드.”

조이를 타느라 벌어진 에드의 오른쪽 무릎을 내려다보던 대공이 말하자 에드가 다리를 뒤로 물리며 답했다.

“아, 괜찮습니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니었다. 달리는 조이의 거죽에 살짝 쓸린 무릎이 따끔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을 뿐이었다. 너무 작게 톡, 튀어 나간 음성이라 오히려 그걸 알아들은 대공이 놀라웠다.

“음, 잠깐만.”

실례, 하면서 대공이 에드의 다리를 잡더니 바지를 걷어 올렸다. 스르륵, 옷감이 피부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노출된 다리에 대공의 손이 닿았다. 슬쩍슬쩍 스쳤다 떨어지는 대공의 온기에 에드의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건조하지만 따스한 손길이었다.

대공이 바지를 걷어 올린 에드의 무릎에 살짝 쓸린 상처가 있었다. 아까 나쁜 손들에 바닥에 꿇어앉혀졌을 때 까끌까끌한 바닥에 쓸려 난 상처인 듯했다.

‘아…… 몰랐는데.’

고개를 숙여 상처를 확인한 에드는 손으로 툭, 툭 털었다. 워낙 미미한 상처라 다시 조이가 신나게 달린다 해도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대공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그놈들을 더 밟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대공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 안에 있는 붉은 눈동자에 예리한 빛이 서렸다.

에드는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망부석이 된 대공을 내려다보다 손을 움직였다. 대공의 손을 피해 바짓단을 쥐고 살살 내리며 상처를 감췄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대공 전하. 워낙 작은 상처라 전혀 아프지도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기는.”

“정말입니다. 바닥에 내려가 콩콩 뛰어 볼까요? 지금 몸 상태라면 오솔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에드가 씩씩하게 말하며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끝에는 작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으나 말을 타고 달려왔던 오솔길을 돌아보는 대공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두 번 다시는 에드를 건드릴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릴까?’

잠시 고민했던 대공은 에드의 바지를 그러쥔 손을 놓았다. 에드의 바지를 살살 털어 낸 뒤 나무에 묶은 조이의 고삐를 풀었다.

그리고 말에 올라탄 대공은 에드를 한층 더 안정감 있게 감쌌다.

“가자, 에드.”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걸음이 느려진 조이가 오솔길을 나아갔다.

* * *

결국 대공은 극구 사양하는 에드를 데리고 일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의료원을 찾았다.

에드의 상처를 들여다본 의원은 다친 부위에 초록색 약을 발라 주었다.

의원은 에드에게 연고가 피부에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약초 향이 은은하게 나는 치료실이었다.

처음에 의원은 심드렁했다. 아니 뭐 이런 상처 가지고 진료를 보지? 하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도록 해. 덧나지 않게.〉

대공이 걱정스럽게 상처를 들여다보며 말하자 결국 의원은 돋보기까지 챙겨 와 상처를 살폈다. 옅은 상처였지만 연고도 두툼하게 발랐다.

〈의논할 게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나?〉

그리고 대공의 요청에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에드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바람을 일으키며 연고가 얼른 마르길 기다렸다.

‘의원을 찾아올 일도 아닌데.’

멀쩡한 다리에 아까운 약만 들이부은 것 같아 민망했다.

“아.”

그때 살짝 숙인 상의에서 하얀색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몸을 수그려 종이를 집어 든 에드는 피식 웃었다.

‘오늘 이것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일라 경마장 표였다.

이걸 구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저택을 나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대공에게 귀족이 앉는 자리도 아니고, 이런 2등급 표를 내밀자니 너무 멋쩍었다. 그리고 오늘 대공의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지도 않았고.

에드는 표를 손가락으로 퉁, 튕겼다.

‘그러니 이건 없었던 걸로 하자.’

그 순간, 치료실 문이 열렸다. 대공과 의원이 안으로 들어서며 대화를 나눴다.

“그래, 하루에 세 번 식사 후에 물약 한 잔과 환약 한 알을 함께 먹으면 된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온 비약으로 체력 증진에 큰 효과를 주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래, 그럼 기대하지.”

하며 안으로 들어선 대공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에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에드의 손에 들린 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라 경마장 표?”

“……아, 네.”

“오늘 경기인 것 같은데.”

짧은 순간에 몇 가지 정보를 읽어 낸 대공은 에드가 새벽에 움직였던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경마장 표를 구하기 위해서 새벽에 움직인 모양인데.’

그럼 가야지.

“두 장이었는데 내 자리도 있는 거지?”

장난스레 말하며 회중시계를 꺼낸 대공이 시간을 확인했다. 경마는 1시부터 시작이니까 아침 식사를 하고 움직이면 되겠는데…… 가늘어진 눈으로 대공은 일정을 가늠했다.

대공이 계획적으로 무언가를 짚어 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에드는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이게 그러니까요. 관람하려고 한 게 아니라요.”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구한 경마장 표였지만 가봤자 사람만 많을 것 같았다. 좋은 좌석도 아니었고.

하지만 대공의 곁에 서 있던 의원이 한 발 더 빨랐다.

“일라 경마장에 방문하시는 거라면 동문으로 입장하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쪽으로 입장하면 운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오늘 경기에는 실력이 막상막하인 백마 슈와 흑마 펄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가?”

대공의 대답에 의원이 신이 나 말했다.

“네, 두 마리의 말이 번갈아 가며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니 녀석들이 경마장에 나오는 날에는 일라의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하는지 모릅니다! 녀석들이 함께 달리는 날에는 일라의 모든 일손이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 열기가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의원이 에드를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표를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하얀색 표라면 2등급 좌석 표이죠? 그 좌석은 차양이 설치되지 않았으니 모자를 꼭 챙겨 가십시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하니 모자를 사러 갈까? 에드?”

* * *

식사를 마치고 대공은 옷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넉살 좋은 의원이 대공에게 한 조언 때문이었다.

“모자를 사시려면 중앙 광장에 있는 밀 옷 가게를 이용하면 좋으실 겁니다! 5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모자 외에도 물건이 많아 쇼핑하시는데 쾌적하실 겁니다!”

대공을 따라 옷 가게로 향하던 에드는 계단을 내려오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곤 계단 손잡이 쪽으로 바짝 붙었다.

너른 계단이었지만 쇼핑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신이나 붕붕 흔드는 손에는 즐거움이 가득했으나 주위를 살피는 신중함은 없었다. 이미 큰 가방에 한 차례 팔꿈치를 얻어맞았던 에드는 그들이 계단을 다 내려가길 기다리려고 했다.

그때 한 계단 앞서 올라가던 대공이 도로 내려왔다. 손을 뻗어 에드의 팔을 감쌌다. 등으로 팔을 돌려 에드를 안정감 있게 둘러 안으며 말했다.

“가자, 에드.”

대공이 사람들과 마주치는 쪽에 서고 에드를 계단 손잡이 쪽으로 둔 자리 배치였다.

“아, 괜찮습니다.”

‘……내가 대공을 모셔야 하는데.’

그런 에드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대공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모자를 얼른 사고 가야지. 늦장을 부리다 경마장에 늦게 도착하면 곤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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