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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53화 (53/198)

Chapter 53

하지만 말은 거북이와 달랐다.

속도감을 즐길 수 있었고, 대공이 말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경마는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에드는 졸린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저택을 나섰다. 대공도 축제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해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표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특등급 관람석은 이미 동이 났지만 1등급 이하는 줄을 서서 살 수 있었기에 하품을 하며 경마장 앞에서 자리를 지켰다.

에드가 대공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별다른 뜻은 없었다.

‘지난밤 대공이 맛있는 맥주와 음식을 사 줬으니까 나는 이걸로 갚는 셈이지.’

특등석 표를 구하고 싶었지만 금액도 금액이었지만 표 자체를 구할 수도 없어 아쉬웠다.

‘그래도 어렵게 2등급 관람석이라도 구한 거니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품에 표를 넣은 에드는 빠르게 저택으로 향했다. 오솔길까지 걸어가 마차를 타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광장을 지나 대로를 빠져나와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에드.”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구지?’

에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윽.”

동시에 무릎 뒤편을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이 있었다. 누군가 딱딱한 구둣발로 제 하체를 퍽, 걷어찼다.

그 힘에 다리가 꺾이며 에드의 몸이 휘청거렸다.

에드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든 몸의 중심을 잡고 바로 서려고 했다.

그러자 다리를 걷어찬 남자가 팔을 잡아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가 뒤로 확 밀었다.

그 바람에 가차 없이 몸이 흔들린 에드는 깨달았다.

‘내 몸의 어딘가를 가격하려고 거리를 벌리는 거야.’

전문가의 솜씨였다.

그 틈을 내주지 않으려고 에드는 몸에 힘을 주며 버텼다. 그러자 다시 팔을 잡고 확 잡아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사람을 어떻게 쥐고 흔들고 쥐어박아야 하는지 잘 아는 자들이었다.

“아윽.”

안 끌려가려고 발끝에 힘을 주며 맞서자 남자가 발목을 노려 툭, 후려갈기더니 무릎을 꿇렸다.

에드는 그제야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총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올백 머리의 후덕한 몸집을 가진 남자였고, 또 한 명은 키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그들은 주저앉은 에드의 앞과 뒤를 막고 있었다.

퇴로와 시야를 딱, 딱 차단하는 게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에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봤더라.’

뇌리에 남은 인상이었지만,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후덕한 몸집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꺼내더니 돌돌 말아 에드의 머리통을 통, 통 쳤다.

“돈을 빌렸으면 갚고 튀어야 할 거 아니야? 응? 에드?”

“…….”

“필요할 땐 바짓가랑이 사이라도 길 것처럼 굴더니 살 만해지니까 입을 싹 씻는 걸 보면 참, 세상 사는 게 쉽다. 그치, 에드? 나는 차암 살기 힘든 세상이고?”

빈정거리는 남자의 말에 에드는 그들이 누군지 알았다.

‘……아, 진짜 에드가 돈을 빌렸던 사람들이구나.’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도 에드의 수첩을 봤기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에 에드가 원장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악질 상단으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것을.

악질 상단에서 내민 계약서에는 말도 안 되는 이자율에,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할 시에 붙는 조건들이 에드에게 하나같이 불리하게 쓰여 있었다.

하지만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로지를 의원에 데리고 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온몸을 탈탈 털어도 금화는 고사하고 동화 한 닢 나오지 않는 에드의 사정으로는 불리해도 그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금리였지만 에드는 악질 상단에서 돈을 빌렸다.

정보를 사고파는 뒷골목에 에드가 발을 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빚을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은 초짜가 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급 정보상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에드는 상단의 빚을 다 갚을 때쯤 헤린스 백작가에 취업했다.

의식주가 해결되고 많지 않았지만 일정한 급료가 나오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빙의를 한 이선유는 계약서를 확인하자마자 빚이 남아 있는 상단의 돈부터 갚으려고 했다.

에드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때 빚을 갚지 못하면 에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단 상단주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에 불길함을 느낀 에드는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모아 봤지만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원작의 내용을 더듬던 에드는 남부 중앙 경마장에서 ‘썬더’라는 말이 가장 빠르단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에드는 쥐꼬리만 한 급료를 받을 때마다 썬더에게 족족 투자했다.

당시 경매장의 말 중에서 가장 빨랐지만 제일 문제마이기도 했던 썬더는 자기가 달리고 싶을 때만 달렸다. 하지만 한 번 제대로 달리기 시작하면 적수가 없었다.

그래서 잃을 때도 있었지만, 얻을 때는 잃은 돈의 배가 넘는 돈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에드는 빚을 충분히 갚고도 남는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에드는 그 후 상단에 자기 발로 찾아가 돈을 내려놓고 빚을 다 갚았다. 돈을 다 갚았다는 내용의 대출 상환 확인증도 받았다.

그런데 남은 돈이라니?

무슨 돈?

저 후덕한 남자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빚을 갚으러 갔을 때 소파에 앉아 있던 상단주였다. 연초를 질겅질겅 씹으며 직접 돈도 받고 대출 상환 확인증도 내줬으면서 이제 와 이러다니?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에드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드는 빛에 눈을 찡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빚은 다 갚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신지?”

그러자 상단주가 비죽이 웃으며 에드의 눈앞에 하얀 종이를 흔들어 댔다. 쨍한 햇살 아래에서 하얀 종이가 팔랑거리자 눈이 다 부셨다.

“갚긴 뭘 다 갚아? 이렇게 돈을 빌렸다는 증거가 버젓이 남아 있는데?”

“돈을 빌렸다니 언제, 어떻게 빌렸다는 말이신지?”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은 말투가 이 모양이야? 어? 전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이러네? 말을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볼일 보러 화장실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는 것처럼 중간을 뚝뚝 끊어 먹고?”

‘그거야 당신과는 말 한마디 나누는 것도 싫어서 그런 거지.’

존댓말을 꼬박꼬박 쓰는 것도 싫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상단주가 다시 한번 손에 쥔 종이를 팔랑거렸다.

종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르던 에드는 기회가 보이자 탁, 상단주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에드의 기억으로는 더 이상의 빚은 없었다.

빚을 갚으러 간 날 상단주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 확인해야 했다.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에드가 언제 얼마나 빌린 것인지.

“…….”

계약서를 확인하던 에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날짜도, 금액도, 서명도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였다.

어이가 없어 상단주를 올려다보자 팽, 하고 상단주가 이상하게 웃었다. 에드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더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에드, 잘 생각해 봐.”

잘 생각해 보긴 뭘 잘 생각해 봐?

에드는 상단주가 사나운 기세로 꿇린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 어깨에 손을 얹고 힘을 실으며 그대로 다시 주저앉히는 힘에 에드의 눈매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솥뚜껑 같은 손이 어찌나 두툼하고 힘이 센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아주 훌륭한 물주를 물었다며? 그런 물주를 잡았으면 나부터 찾아왔어야지. 그럼 내가 그놈을 싹 벗겨 먹는 법을 잘 알려 줬을 거 아니야?”

에드의 눈초리에 한심함이 서리자 상단주가 쯧, 혀를 찼다.

“에드,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이번에 아주 쪽쪽 빨아 먹어야 한단 말이지. 막말로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어?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내가 말했잖아. 쪼들리면 헤린스 백작가의 그릇이라도 훔쳐 오라고. 그럼 내가 배로 불려 준다니까?”

“…….”

“그런데 이번엔 그보다 훨씬 높으신 분의 눈에 들었다며. 이건 완벽한 기회라고! 에드! 너와 나, 우리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뭐라는 거야?

상단주가 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귀족들이 좋아하는 말 있잖아?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게 별거냐? 높으신 귀족들이 서민인 우리들에게 금화를 던지시면 그게 그거지.”

달래듯이 에드의 어깨를 톡, 톡 두드린 상단주가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에드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채 손을 쫙쫙 펴려고 들었다.

“……이, 이건 또 뭐, 뭐 하는.”

“그런데 우리 에드가 훌륭한 내 생각에 동조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잖아? 노예 계약서라도 써야지.”

손을 쫙쫙 펴려는 이유는 저 하얀 종이에 손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종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계약서를 휘갈기려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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