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50화 (50/198)
  • Chapter 50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황궁으로 향하는 게 썩 즐거운 건 아니겠지만, 여정 첫날부터 저렇게 사색에 잠긴 대공이라니…… 에드는 주전자에 손을 대 보았다. 보온 마법이 걸린 주전자인지 아직 따뜻했다. 주전자를 기울여 새 컵에 차를 따르자 따스한 김이 피어올랐다.

    에드는 컵을 트레이에 받쳐 문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나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문을 열었다.

    1층과 달리 2층 복도에는 남부의 파란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 카펫이 깔려 있었다.

    “…….”

    왼쪽 복도의 끝자락의 창가 아래에는 대공이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에드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대공의 곁으로 다가가 트레이를 내밀었다.

    “음, 에드.”

    대공이 컵을 손에 쥐며 웃었다.

    “고마워, 에드.”

    “아닙니다, 대공 전하.”

    대답을 마친 에드는 차를 마시는 대공을 곁눈질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런데 저 혹시 제 방에 준비된 식사는 대공 전하께서 준비해 주신 건지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 있기에 깨우지 않았어.”

    ‘아, 역시 대공께서 마음을 써 주신 거구나.’

    “식사를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제가 전하를 보필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여행을 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도 시원하니까.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식사는 했어?”

    “네, 대공 전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식사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몸이 많이 피곤하더라도 식사는 제때제때 챙기는 게 좋겠더군. 안을 때마다 뼈가 몸에 부딪히는 게 많이 아파서 말이야.”

    트레이를 옆구리에 끼어 정리하던 에드는 삐끗, 했다.

    ‘……아, 대공께서 마음만 쓰신 게 아니라 직접 손도 움직이신 건가. 이불에 나를 넣어 준 것도, 따스한 음식과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 둔 것도.’

    그런데 단어 선택이 조금……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흘러내리려는 트레이를 갈무리하며 에드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앞으로 다시는 전하께서 신경을 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건 너무 극단적이고. 식사를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챙기면 좋겠다는 말을 한 거야. 말하는 걸 보니 앞으로도 잘 안 챙길 것 같은데 어때 에드, 앞으로 나와 식사를 함께하도록 할까?”

    차를 마시며 하는 대공의 말에 에드의 옆구리에 잘 안착했던 트레이가 다시 힘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

    “앞으로 다시는 내게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그런데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거든. 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미리 내가 에드를 살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끄응, 그 말이 왜 그쪽으로 튀는 거지?

    에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싶어 고민에 빠졌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이마를 긁적이는 것이 꽤 깊은 고민에 잠겼음을 알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며 에드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던 대공이 어느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에드, 나와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그렇게 싫은 건가?”

    “네?”

    하며 고개를 번쩍 드는 에드의 푸른 눈동자가 둥글게 뜬 보름달 아래에서 촉촉하게 빛났다.

    “응?”

    하며 대공이 눈을 가늘게 휘어 웃으니 에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다가 몸을 바로 했다. 수그러진 등을 곧게 펴고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저는 하인이고, 저보다 훨씬 지위가 높으신 대공 전하께서 이런 저와 자주 자리를 함께 가지시면 아무래도 썩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랬다. 헤린스 백작저에서 에드는 로넨을 잘 돌봤다는 이유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그곳을 벗어났으니 이제는 그런 보여 주기 식의 관심은 필요치 않았다. 규칙과 평범함에서 벗어났던 일들에 제자리도 돌아올 때였다.

    게다가 하인이라고 저를 칭했지만 북부성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자리가 잡힌 것도 아니었고…… 북부로 가고 싶다는 말을 대공이 들어줬지만, 자신이 북부성에 필요한 인력인지 확신을 준 것도 아니었다.

    많은 생각이 담긴 푸른 눈동자를 대공이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 그게 문제인 건가.’

    주인과 사용인의 관계에만 무게 중심이 쏠린 것이란 말이지?

    때로는 대범하게 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지나치게 조심하는 에드의 면모를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절대 들어오지 않으려는 모습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정했다. 대공은 에드가 굳게 가진 심지를 흔들고 싶었다. 그를 꽁꽁 둘러싼 막을 벗겨 내고 싶었다. 그리고 에드가 자신을 향해 사심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서로에게 닿은 시선을 먼저 벗어난 쪽은 에드였다.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공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밤이 드리워진 정원에는 푸른 잎이, 붉은 꽃이 보름 달빛과 은은한 조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대공은 에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라 살짝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달빛이 어렸다. 하얗고 말갰다.

    “축제를 보러 함께 나갈까? 에드?”

    다시 고개를 드는 에드의 푸른 눈동자에 의아함이 실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그런데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뭐지? 에드?”

    “그게 저…… 그건 명이십니까? 권유이십니까?”

    대공을 보좌하는 인력이 그의 뒤따르는 것이야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의 지위라면 이르텔이나 제이논 같은 고급 인력이 그를 호위하고 보필하는 것이 합당했다. 저 같은 말단 하인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나눈 대화도 그런 의미였고…… 대공이 그걸 모를 리 없어 에드는 의아했다.

    대공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즐거운 축제에 혼자 나가기 싫은 어른의 투정이야.”

    * * *

    에드는 말없이 대공을 뒤따랐다. 널찍한 어깨, 탄탄한 등, 단단한 팔뚝…… 그 어디에도 외롭고 쓸쓸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혼자 나가기 싫다는 대공의 말에 에드는 대공과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나는 왜 이렇게 홀로 있는 대공이 신경 쓰이는 것인지.’

    매어 놓은 말에 대공이 직접 손을 대려고 하자 에드가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만류했다.

    “잠깐만, 에드. 조이가 다정하긴 한데 심술을 부릴 때가 있거든. 그러니 조심해. 곁에 있으면 엉덩이를 뻥, 걷어차이기도 하니까.”

    말을 직접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온 대공이 말과 함께 가볍게 걷다가 에드에게 다가왔다.

    검은색 꼬리가 눈에 띄는 말이 머리를 살짝 들며 투레질하더니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로 인사라도 시키듯이 고삐를 짧게 잡고 있던 대공이 웃었다.

    “이미 안면이 있지만 등에 올라타는 건 또 달라서. 다행히 에드가 마음에 든 모양이네, 조이.”

    이르텔이 타고 움직였던 말이었다. 조이의 등을 쓰다듬다 가볍게 톡, 톡 친 대공이 안장을 확인했다.

    에드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말은 비쌌고 때로 사나워 헤린스 백작가에서 에드는 마구간을 치우는 건 허락되어도 말에 올라타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말에 올라 움직여야 한다는 건가?’

    대공이 올라탄 말의 고삐를 잡고 길을 나서는 게 아니라?

    “자, 에드. 이리 와서 여길 밟고 올라타 봐.”

    “…….”

    “내가 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방금 전까지 대공과 함께 하는 게 참 민망하고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온 손에 속절없이 이끌리고 있었다. 무시하거나 내칠 수도 없이 불가항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얼마나 따스하고 단단한지 알기에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어둡고 긴 균열의 틈을 빠져나올 때처럼……. 그러니 오늘 하루쯤은 그의 손을 잡고 축제를 즐겨도 되지 않을까?

    어서 잡으라는 듯이 가볍게 손을 까딱이는 대공의 손에 잠시 망설였던 에드는 그 손을 잡았다. 역시나 따스하고 큰 손이었다.

    보름 달빛이 내리쬐는 밤이었다.

    * * *

    말에 올라타자 에드는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보다 시야가 높았다. 자꾸만 안장 밑으로 느껴지는 말의 생생한 움직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등에 닿는 대공의 단단한 몸이었다.

    등자를 밟고 어리바리하게 구는 자신을 대공이 도와줬다. 말에 제대로 올라탈 수 있게 잡아 주는 강한 힘에 에드는 어떻게 다리를 뻗어야 안전하게 말을 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어설프게 말에 오른 자신과 달리 대공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말에 올랐다.

    뒤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대공의 존재감에 고개를 힐끗 돌린 에드는 엉덩이를 앞으로 움직였다.

    대공의 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자 뒤에서 옅게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런 대공의 숨결이 제 목덜미에 가볍게 닿는 것 같아 에드는 어깨가 살짝 흠칫, 하며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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