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에드도 멍하니 따라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공의 얼굴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생긴 건 맞았으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넋을 놓고 웃다니…… 에드는 시선을 돌려 열린 마차 문을 내다보았다.
마침 짐을 정리하고 밖에서 이르텔과 대화를 나누던 제이논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에드는 다리를 안쪽으로 붙여 제이논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공간을 넓혔다. 제이논이 대공의 맞은편에 앉으라는 무언의 의미였다.
“…….”
“…….”
하지만 제이논은 에드가 앉은 자리의 틈을 놓치지 않고 엉덩이를 쭉 들이밀었다. 꼼틀꼼틀 몸을 들이대더니 에드를 옆으로 툭, 툭 밀어냈다.
에드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자꾸만 자신을 창가 쪽으로 밀어내려는 제이논에게 대항했다. 엉덩이에 힘을 딱 주고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정식 기사는 아니더라도 북부 기사단원들의 훈련을 눈으로 보고 배운 제이논의 밀고 버티기 기술은 수준급이었다.
제이논이 엉덩이를 툭, 툭 밀어낼 때마다 에드도 엉덩이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근력도, 체력도 제이논에게 달려 몸이 점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있는 힘껏 힘을 쥐어짰다. 그러나 결국 아악, 하고 밀리며 대공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아무래도 짬이 제일 덜 되는 나를 대공의 제물로 삼는 것 같지?’
빙의하기 전에 라디오 사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출장을 가는 차 안에 사장님과 단둘이 타게 되었다는 신입 사원의 이야기를.
취준생이었던 그 당시에는 그리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 되니 그 사연에 공감이 갔다.
대공과 이렇게 다리와 다리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앉아 있자니 에드는 목이 다 타는 것 같았다. 옅은 한숨조차도 살포시 내쉬기가 어려웠다. 좁은 마차의 내부에 발과 발이 부딪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래도 식당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식탁이 거리를 떨어뜨리고 시선을 분산시켜 줬는데…… 에드는 차라리 짐수레에 올라타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헤린스 백작 부부가 나와서 배웅했다.
“로넨, 잘 가렴.”
“로넨, 건강하고 너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행복했단다. 너는 항상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헤린스 백작가의 자랑스러운 일원이었단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으며 눈물을 훔치는 헤린스 백작 부인을 보며 에드는 속으로 조소했다.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면서 거짓말을 할 것이지.’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정말로 네가 하늘이 내려 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백작저를 떠나야 하는 날이 오니 내가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단다. 오늘이 오지 않길 얼마나 바랐는지…… 난 언제나 로넨의 편이란다.”
백작 부인이 로넨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려워하지 말고 좋은 일이 있을 때나 힘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하렴. 알았지?”
로넨에게 확답받기 위해 몸을 마차 안으로 들이민 헤린스 백작 부인이 부담스러웠다. 로넨이 대답하기 전에 대공이 적당히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럼 헤린스 백작, 헤린스 백작 부인. 덕분에 잘 쉬었다 갑니다.”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저희야말로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헤린스 백작가에 많은 신경을 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그리 말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니 이제 그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대공이 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헤린스 백작 부부가 뒤로 물러났다.
“네, 그럼 대공 전하. 살펴 가십시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공 전하.”
“그래요, 그럼.”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 아인드의 수도 체트라는 황도에서 가장 높고 중심이 되는 황성을 중심으로 독수리 날개처럼 뻗은 모양의 도시였다.
남부 중심부에 있는 헤린스 백작가에서 황도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5일 정도가 걸렸다. 대공은 7일에 걸쳐서 황도로 나아가는 일정을 잡았다.
여러 대의 마차와 말이 헤린스 백작가를 나서자 에드는 마차 쪽창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빙의한 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오고 갔던 헤린스 백작가의 저택이, 정원이, 길목이 점점 멀어져 갔다. 배웅하는 헤린스 백작 부부도 점점 작아졌다.
에린과 세나는 가족과 함께 대공을 따라 헤린스 백작저를 떠나기로 했고, 지오는 이곳에 남아 정원을 관리하기로 했다. 떠나는 자들과 남은 자들의 갈림길이었다.
* * *
타닥타닥
마차를 이끄는 말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에드는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했다. 대공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고 껄끄러워 그런 것도 있었지만, 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하늘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박혀 있었다. 탁 트인 지평선 너머로 밝은 태양이 높게 떠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길 위로 푸른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살짝 열린 마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바람은 머리카락 사이를 살랑살랑 부유하며 상쾌함을 남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해 에드는 눈을 번쩍 떴다.
“…….”
“…….”
그리고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취해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흠흠, 작게 목을 가다듬은 에드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대공과 자신의 허벅지가 얽혀 있었다. 대공의 오른쪽 허벅지에 제 왼쪽 허벅지가, 대공의 왼쪽 허벅지에 제 오른쪽 허벅지가 기대진 묘한 자세였다.
옷감 너머로 닿은 탄탄한 감촉에 에드가 몸을 최대한 뒤로 물리자 대공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제이논.”
“네, 대공 전하.”
“로넨의 귀 좀 막아 봐.”
“네?”
의아해하던 제이논이 아, 하며 손을 뻗었다. 로넨의 양쪽 귀를 손을 막았다. 로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착한 성격답게 형의 말에 따라 제이논의 손을 떼어 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드, 침대도 함께 쓴 우리 사이에 왜 이렇게 내외하려고 그래?”
대공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우리 사이라고 해 봐야 대공과 말단 하인 사이였다.
하지만 그 앞에 붙은 단어 때문에 제이논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해서 에드는 대꾸했다.
“……대공 전하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엄밀히 말하면 침대를 함께 쓴 사이가 아니었다. 크고 너른 침대의 왼쪽, 오른쪽을 반으로 뚝 갈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잠자리였다.
‘게다가 나는 일어날 때까지 대공이 곁에서 자는 줄도 몰랐단 말이지.’
에드가 제이논과 와인을 폭음하다가 곯아떨어진 날이었다.
“네, 그날 술에 취한 저를 침대로 옮겨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날은 대공 전하께도 많은 일이 있었기에 아마 몹시 피로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던가?”
“네, 그래서 아마 저를 부축하다가 대공 전하께서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신 것 같습니다. 제가 부주의했던 탓에 대공 전하께 큰 결례를 끼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음, 그 말인즉슨 내 체력이 영 미덥지 못하다고 말하는 거지?”
“아뇨, 아뇨.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원래 술에 취한 사람은 바위보다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대공 전하께서 힘도 많이 쓰신 날인데, 그런 전하께서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시고 저를 번거롭게 챙겨야 하셨으니 정말로 죄송합니다.”
“힘도 많이 썼다라, 그래서 걱정이 되었나 보지?”
대공이 턱을 매만지며 에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날의 기억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아 에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몸을 가누지 못해 대공 전하께서 신경 쓰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날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에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대공이 갑자기 로넨을 불렀다.
“로넨.”
“…….”
그러나 제이논에게 귀가 막힌 로넨이 대답하지 않고 멀뚱멀뚱 바라보자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말은 제이논에게 했다.
“제이논, 체력에 좋은 음식들 좀 추려 봐. 요즘에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부실해진 것 같으니.”
아니, 대공의 단어 선택에 제이논이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 건데 왜 이야기가 그렇게 튀나?
제이논에게 일거리만 더 안겨 준 것 같아 에드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제이논이 콧대를 높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런데 체력에 좋은 음식만 챙기면 되겠습니까? 지속성과 연속성도 생각하여 약초를 달여 장복하는 방법 있는데 그쪽도 알아볼까요?”
그리고 제이논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성큼 나아가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마침 이번에 가는 도시가 약초업이 발달했으니 제이논이 온 약방을 들쑤시고 다닐 게 눈에 선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