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7화 (47/198)

Chapter 47

대공이 손보고 있는 곳은 작은 놀이터였다. 나무 그네가 세 개, 나무 조각들이 땅에 박혀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 대여섯 개, 철봉처럼 매달려 놀 수 있는 나무 놀이기구 두 개가 전부인 놀이터였지만 이곳에서 로아 보육원의 아이들은 뛰놀며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갔다.

“음…… 파란색은 어떨까요?”

색의 조화에 그리 자신이 없었으니 이럴 땐 보색 대비가 제일 깔끔하지 않을까 싶었다. 에드의 작은 대답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색이라.”

노란색 도료가 묻은 솔을 한쪽으로 치운 대공이 곁에 서서 허리를 숙인 에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진지하고 산뜻했다.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들어있지 않은 직시였다.

하지만 졸지에 아스넬의 시선에 갇힌 에드는 참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3초가 뭘까?’

1초도 너무 길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루비보다 영롱하고 깊은 호수처럼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그 색이 진해지는 오묘한 눈동자는 바라볼수록 신비하고 묘한 느낌을 주었다.

분명 제 눈동자 색을 낱낱이 파헤치기라도 할 듯이 탐색하는 시선은 잔잔하고 고요했건만 왜 이렇게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 견디다 못한 에드는 무릎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몸을 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대공의 시선의 그물에 걸려 파닥이던 것을 밀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부산스럽게 도료를 칠할 솔을 찾으며 딴청을 피웠다. 대공이 두 번째 그네를 맡았으니 나머지는 자신이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노랑과 파랑을 썼으니 마지막은 빨간색으로 가자.’

“어?”

하지만 아스넬이 몸을 벌떡 일으킨 에드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니 에드는 어, 하면서 그에게 끌려갔다. 아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채 아스넬의 옆자리에 앉았다. 강하게 당겨진 것도 아니었건만 어쩐지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에드.”

“……네, 대공 전하.”

아니, 목은 또 왜 이렇게 메는 건데?

흠흠, 소리 없이 목을 가다듬으며 에드는 대공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지금 영감이 떠올랐는데.”

영감이라면 어떤 영감을 말씀하시는지요?

설마 저를 여기에 꼬라박아 꼬부랑 영감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러니 조금만 더 그렇게 있어 봐.”

그렇게 말하며 웃는 대공을 바라보자니 등 뒤로 땀이 다 날 것 같았다.

이미 수없이 대공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마주쳤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그의 시선에 빨려 들어갈 것 같으면서도 위축이 되는 게…… 이럴 줄 알았으면 집을 나설 때 세수라도 할 걸 그랬지. 산길을 오르고 내리느라 땀과 먼지로 후줄근할 텐데.

그 모습이 대공에게 직격으로 노출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에드는 점점 작아지는 느낌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봐도 봐도 새롭고 보고 또 봐도 잘생긴 얼굴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본 대공이 흰색과 파란색 물감을 조금씩 섞어 나갔다. 빈 통에 파란색과 흰색 도료를 신중하게 덜며 색을 만들었다.

‘무얼 하시나.’

드디어 대공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싶은 에드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목덜미를 살살 주물렀다.

“와, 에드!”

그 순간, 제 등을 향해 후다닥 달려드는 사나운 짐승이 한 마리…… 아니, 로넨이 있었다.

신나게 놀다가 이제야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대공의 곁에 앉아 있는 제게로 왁 달려든 로넨이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웃었다.

“언제 왔어?”

“방금 왔습니다.”

앞으로 확 쏠린 몸을 추스르며 답하자 로넨이 씨익 웃었다.

“아스넬 형이 가 보자고 해서 로아 보육원에 왔을 때 에드가 안 보여서 걱정했어.”

“그렇습니까?”

“응, 그리고 에드를 기다리는 동안 여기를 이렇게 꾸며 봤어. 어, 내가 다 한 건 아니지만 이거랑 이건 내가 도료로 칠했거든? 어때? 괜찮아?”

손가락을 내밀어 나무 발판을 가리키던 로넨이 얼굴을 앞으로 더 뺐다. 이번에는 대공이 통에 섞은 도료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어? 아스넬 형! 이 도료 색깔 에드의 눈동자 색이랑 완전히 똑같아요!”

* * *

짹짹.

오늘따라 아침을 깨우는 새 소리가 유난히 큰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천장을 응시한 에드는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

아직 덜 가신 잠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눈 밑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정신을 차린 에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끝에 닿는 폭신폭신한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은 에드는 창가에 드리운 두꺼운 커튼을 젖혔다.

헤린스 백작가 본관의 둥근 아치형 창문으로 환한 아침 햇살이 내리 떨어졌다.

‘너무 늦잠을 잤는데.’

어제 로아 보육원에 들렀다 생긴 일 때문에 몸이 노곤한 모양이었다.

황도에 올라갔다가 북부로 가면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오르막길 마을에 들른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대공과 로넨을 볼 줄 몰랐다.

그리고 옹기종기 앉아 놀이터를 꾸미는데 에드는 이상하리만치 대공이 파란색과 하얀색을 섞어 만든 푸른색 도료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의 옆에서 로넨과 그네를 칠하면서도 그걸 보느라고 솔이 삐끗했고 헤린스 백작저에 돌아와 짐을 챙기면서도 자꾸 눈에 밟혔다.

‘참나, 이상하네. 진짜로 별것도 아닌데.’

오늘은 바쁜 날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소한 도료 색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정도 확인해야 했고 짐도 빠진 것 없나 잘 살펴봐야 했다.

‘그런데도 어제 뒤척거리며 잠이나 설치고.’

딱히 의미 부여를 할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

탁, 탁 가볍게 손바닥으로 뺨을 때린 에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벌써 정원에는 북부 기사들이 나와 말 상태를 확인하고 짐을 마차에 싣고 있었다.

한가하게 어제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간 에드는 차가운 물에 세수했다. 정신이 번쩍 들게 뺨도 탁, 탁 쳤다.

똑, 똑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을 때 에드는 챙겨 둔 짐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헤린스 백작저에서 지낼 때 썼던 물건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게 신경 쓰며 짐가방에 챙겨 넣었다.

“잠시만요.”

짐가방의 버튼을 채우며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신폭신한 실내화를 구두로 갈아 신고 실내화를 가방 안쪽에 잘 챙겨 넣어 뒀다.

얼마 전, 구둣가게에서 맞춘 신발들을 보내며 감사하다고 함께 준 사은품이었다.

‘아무래도 구둣가게 주인이 대공을 야무지게 뜯어 먹은 것 같지?’

이런 걸 그냥 줄 리가 없어 심란한 표정으로 사은품으로 배달된 신발을 신어 봤을 때 대공이 웃으며 가볍게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발에 잘 맞아? 하면서 묻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그때의 그 감촉이 아직도 생생히 남은 것 같은 앞머리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던 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헤린스 백작가를 나설 준비를 하느라 바빴는데 늦잠까지 자 놓고서 이렇게 늦장을 부리다니? 이러면 안 되었다.

묵직한 가방을 두 손으로 든 에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단단한 나무 바닥을 꾹꾹 밟으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

방문을 열기 전 뒤를 돌아본 건 충동적이었다.

에드는 헤린스 백작저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둥글고 큰 아치형의 창문, 그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나른한 오전의 햇살, 그 볕이 퍼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나무 바닥을 구두로 톡, 톡 두드려 보았다.

단단한 나무 바닥이 구두 밑창과 맞닿으며 발끝을 가볍게 자극했다.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녀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 에드로서의 삶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에드는 뒤로 돌았다. 금속 재질의 손잡이를 손에 쥐고 힘껏 돌렸다.

“빼 먹은 건 없어? 에드?”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제이논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막막함이나 불신이 자신을 갉아먹지 않았다.

“네, 없습니다.”

단단한 음성이었다.

* * *

제이논과 함께 정원에 서 있는 마차에 다가가자 텐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대공과 로넨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다른 마차에 타도 괜찮은데.’

에드의 가방을 챙긴 제이논이 수레에 짐을 정리하는 동안 에드는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마차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모든 마차의 문이 이미 꽉꽉 닫혀 있어 똑, 똑 노크를 한다고 해도 활짝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 안쪽에는 대공이, 입구 쪽에는 로넨이 앉아 있었다. 에드는 로넨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래도 다들 대공과 같은 마차에 타는 건 부담스러운 건지 짬이 제일 덜 되는 자신을 이 마차에 태운 것 같았다.

‘KTX는 자리를 돌릴 수 있는데.’

마차는 그럴 수 없어 심란했다.

창턱에 팔을 기댄 대공이 에드를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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