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어서 오렴, 에드. 오는 길이 만만치 않으니 일부러 직접 오지 않아도 괜찮다 해도 넌 매번 말을 안 듣지 않는구나.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니?”
에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팡이를 짚고 운동장으로 나오는 여성에게 달려가 팔을 부축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원장 선생님.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여성이었다. 손에는 가는 주름이 많았고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단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물에게 다친 왼쪽 발이 좋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그녀는 걸을 때마다 몸이 기우뚱거렸지만 단 한 번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그녀의 손으로 손수 쓴 ‘로아 보육원’이라는 간판을 20년 이상 지켜낸 보육원장 로지였다.
원작에서의 에드는 그녀를 부모님처럼 따랐고 기댔다. 원작의 에드는 본바탕이 그리 선량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보육원장 앞에서만큼은 상냥하고 순했다.
그녀가 큰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정보상의 일도 했으니까.
그가 수첩에 남긴 그림과 낙서로 몇 가지 사정을 알 수 있었던 에드는 보육원장에게 신경을 쓰고 월급 일부분을 떼서 보육원에 조금씩 후원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북부로 가면 이젠 얼굴을 내비치기 힘들어질 테니 황도로 올라가기 전에 선물을 준비해 보육원에 방문했는데…… 에드는 동그래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층이었던 보육원 건물이 2층으로 높아져 있었다. 허술했던 지붕은 사라지고 2층으로 바뀐 건물 꼭대기는 옥상으로 단장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무너져 내린 벽은 단단한 철목으로 보강이 된 데다, 그 위엔 질 좋은 석회석이 발려 빗방울 하나 샐 틈 없이 꼼꼼하게 고쳐져 있었다.
거친 비바람에 시달렸던 나무 문짝은 단단한 철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칠이 벗겨졌던 나무 간판도 근사한 황금빛이 나는 재질로 교체되어 반짝였다.
“……이건.”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이야기 나누자꾸나, 에드.”
로지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돌리자 에드가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하곤 함께 보육원 안으로 들어섰다.
“…….”
보육원 내부도 확 달라져 있었다.
어둡고 낡았던 방들이 하얗고 밝은 색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바람에 덜컹거리고 찬바람과 폭설에 대비해 천으로 막혀 있던 창들도 단단한 창틀에 강화유리로 바뀌어 달려 있었다. 어둡던 내부로 따스한 햇살이 환히 비쳐 들었다.
각기 다른 목재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던 책장은 단단한 호두나무 재질로 달라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큰 책장에는 동화책이 가득 차 있었고 비싼 색연필과 물감, 깃털이 달린 펜 등이 손에 쥐기 쉽게 그 앞에 놓여 있었다.
원장실로 들어가자 따뜻한 색감의 내부가 에드를 맞았다.
고칠 여력이 없어 삭막하고 허름했던 원장실 또한 확 달라져 있었다. 에드가 신기하게 주위를 살펴보자 로지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차라도 한 잔 마시겠니?”
“아,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잠깐만 기다리렴.”
달그락, 달그락. 작게 들리는 찻잔 소리를 들으며 에드는 원장실을 마저 살펴보았다.
“자. 여기, 에드. 좋은 차가 선물로 들어와서 에드 너와 꼭 함께 마시고 싶었단다.”
차 주전자와 찻잔 세트도 새것이었다. 금테가 둘러쳐진 찻잔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로지가 품에서 빛바랜 초상화를 꺼내 에드에게 내밀었다.
“……아, 이건.”
그건 아직 어렸던 에드가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초상화였다.
에드는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남성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초상화였다. 그리고 초상화 밑에는 두 장의 그림이 더 있었다.
그 아이가 자라 남성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그리고 조금 더 자란 아이가 목검을 들고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에드는 그 그림 속 인물들이 어린 에드와 그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원작의 에드’가 남긴 수첩과 그림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헤린스 백작가의 별채에 있던 작은 가방에는 에드가 어릴 때 안고 잤던 작은 인형에서부터 최근에 썼던 수첩까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비싸고 귀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그려진 그림이 많지 않은 에드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어린 에드를 안고 있는 남성은 일반 성인 남성보다 몸집도 있고 몸도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눈매가 매우 성마르고 날카로워 보였다.
사나운 짐승과 대적하는 사냥꾼이나 기세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기사의 눈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에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온화함만이 자리해 있었다. 에드가 목검을 들고 씨익 웃고 있는 그림에는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환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에드가 그 그림을 물끄러미 보고는 아무 말이 없자, 로지는 차를 마시며 말을 아꼈다. 잠시 후 에드가 고개를 들자 옅게 웃었다.
“보육원을 수리하기 위해서 원장실 내부를 정리하다가 찾은 그림이란다.”
“…….”
“아마 덴이 네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그린 것이지 싶은데.”
“아.”
로지는 따스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게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라 매년 그림을 남기진 못했지만……. 사실 난 덴이 처음에 오르막길 마을에 자리를 잡았을 때 생각했단다. 그가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라고.”
“…….”
“오르막길 마을은 남부에서 가장 숨기고, 기피하고 싶어 하는 곳이니까. 억울하게 귀족들의 누명을 쓴 농민들이나 과도한 세금을 피한 농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보니 귀족들에게는 죄인들이 모인 마을이라는 오명이 붙었지.”
살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로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살랑였다.
“그리고 처음엔 새로운 인생을 바라며 오르막길에 들어선 이들이라도 삭막하고 척박한 이곳에서 사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 눈빛부터 변하더구나.”
로지가 안경을 손끝으로 받쳐 올리며 말했다.
“가시덤불로 그어진 경계 안에서, 하루라도 벌판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절망 앞에서 썩 좋은 생각이 들 리 없거든. 그러니 다시 아래로 내려가겠다며 금세 짐을 싸기도 하고…….”
에드는 로지의 말을 경청했다.
“같은 비렁뱅이라도 남부 시내의 비렁뱅이와 오르막길의 비렁뱅이는 급 차이가 난다는 말도 있다고 하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로지가 차를 마셨다.
“그래서 덴이 오르막길 마을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지. 금세 오르막길을 내려갈 것 같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니 얼굴만 봐도 감이 왔거든.”
“…….”
“그가 슬픈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선의 끝자락에는 첨예한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지.”
로지가 에드를 눈빛으로 어루만지듯이 바라보았다.
“네가 걷고 숟가락을 쥘 줄 알게 된다면 나에게 너를 맡기고 오르막길 마을을 훌쩍 떠날 줄 알았단다.”
로지의 깊은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그만큼 그에겐 무언갈 갈망하는 일이 있어 보였고…….”
그리고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에드, 네가 말을 트고 숟가락을 쥐고 온 산을 뛰어다녀도 덴은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이곳에 머물렀지. 물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해서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는 너에게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주려고 노력했단다.”
“…….”
“그래, 덴이 너에게 든든한 나무였던 것처럼 덴 역시 네가 튼튼한 뿌리가 되어 그가 두 발로 단단히 땅을 밟고 살 수 있도록 지켜 준 것이었지.”
잠시 말을 멈춘 로지가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덴이 마물에게서 너를, 그리고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을 때 나는 정말 많은 걱정을 했었단다. 서로가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자 뿌리였는데 그를 잃은 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줄 알았거든.”
“…….”
“그런데 네가 이렇게 어엿하게 자라 누군가의 신뢰를 얻었다니.”
말을 멈춘 로지가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자 멋쩍어진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에드는 차를 마시며 딴소리했다.
“차가 정말 맛있습니다, 원장님.”
로지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 이것도 네 덕분에 맛보는 거란다. 네가 보육원에 오면 내주라면서 이름이 뭐였지……. 네가 좋아하는 오렌지 향의 홍차라고 그랬는데…….”
그제야 이 차가 대공과 호수에 갔던 날 맛있게 마셨던 차라는 걸 안 에드는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 안에 맴도는 오렌지 향에 어쩐지 발끝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