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4화 (44/198)
  • Chapter 44

    헤린스 백작가보다 위신이 떨어지니 부를 과시하기 위해 셀튼 남작은 많은 지참금을 보냈었다. 그때 제게서 받아 든 봉투를 본 헤린스 백작은 실룩이는 입가를 숨기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너무 많은 금액에 셀튼은 좋아하기도 어려웠다. 사업할 때를 생각해 보면 너무 좋은 조건은 시린 바람을 일고 오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부디 이번에 그렇지 않길 바라며 셀튼은 계약서를 확인했다.

    북부 게렁틴의 군주 아스넬 린든의 동생인 로넨케아즈 린든 (약혼 당시 로넨 헤린스)과 남부 셀튼 남작가의 장녀 엘리사 셀튼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파혼한다.

    셀튼은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한 후 서명했다.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자 로넨과 완벽하게 인연이 끝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긴 계약서의 내용에 작게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거센 태풍이 지나간 후 남은 잔해처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각각 계약서를 챙긴 후 대공이 말했다.

    “이걸로 엘리사 영애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군.”

    “충분히 감사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대공 전하.”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고.”

    입가가 부드럽게 풀린 아스넬이 고개를 손에 쥔 크리스털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 조금 더 술을 따라 마셨다.

    그를 본 셀튼은 아, 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가 했더니 술을 마실 때 대공과 건배도 없었고 교류도 없었다.

    ‘마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술잔을 비운 아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단한 장미 목 책상 위에서 작게 포장된 상자를 손에 들고 왔다.

    그리고 셀튼의 시선이 아스넬의 손에 올려진 포장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동안 엘리사 영애가 로넨에게 많은 신경을 써 줬다고 하여 나도 준비해 봤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

    “엘리사 영애가 로넨을 본 마지막 날 쿠키를 준비해 왔다고 하더군. 나도 그 레시피를 얻어 만들어 봤으니 잘 전해 주게, 셀튼 남작.”

    그건 엘리사가 로넨에게 독이 든 쿠키를 준비했을 때 상자와 똑같았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 셀튼이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 대공 전하.”

    “왜 그러는가, 셀튼 남작.”

    “정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

    “…….”

    “헤린스 백작가의 하인이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 쿠키를 로넨이 먹을 수도 있었던 일이 2주 전에 일어났지. 그동안 사실을 알리고 자초지종을 전할 시간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박한 건가?”

    “…….”

    “아니면 내가 로넨을 노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한 건가? 셀튼 남작? 그럼 나를 너무 우습게 봤는데…… 그게 아니라면 로넨이 아닌 하인이 대신 당했으니 내가 유하게 넘길 거라고 생각한 건가?”

    “대, 대공 전하.”

    “그랬다면 그것도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거고.”

    아스넬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르며 셀튼을 바라보았다.

    “독에 당한 이가 몸을 제대로 가누기 시작하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지. 그러니 셀튼 남작.”

    아스넬의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지는 동안 셀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조금씩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7년 동안 1년에 네 번 엘리사 영애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하지. 오늘은 쿠키를 준비했지만 다음에는 빵, 혹은 육포를 선물로 보낼지 모르겠어.”

    그러니 앞으로 그녀는 물 한 모금, 고기 한 조각 먹을 때마다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고, 남작가 밖으로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아스넬은 그를 말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엘리사를 노릴 것이며 그를 잘 피해 보라는 살뜰한 조언이었다.

    사교적이고 활발한 엘리사가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될 것이고, 물 한 모금을 마실 때도 마음을 놓지 못할 터였다.

    “그럼 셀튼 남작, 엘리사 영애가 무탈하게 잘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네.”

    대공은 그 말을 끝으로 술잔을 비웠다. 그의 시선 끝에는 얼굴이 희게 질린 셀튼 남작이 있었다.

    * * *

    에드는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이틀 동안 헤린스 백작가의 정원을 꾸몄더니 약간의 피로감이 남았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로넨은 즐거워했고 정돈된 정원을 보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앞으로 많은 꽃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잎을 드리우겠지.’

    그걸 보지 못하고 헤린스 백작저를 떠나겠지만.

    에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헤린스 백작저를 떠나 황궁으로 향한다는 것이…… 과연 헤린스 백작저를 아무 일 없이 떠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밤을 새운 적도 있었는데 막상 그날이 다가오자 기분이 묘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별 탈 없이 마무리하고 떠나는 거니까.

    마차에 올라탄 에드는 창으로 헤린스 백작저를 둘러보았다.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로넨을 어떻게 피하나, 이 생각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꽃도 같이 심고 빵도 나눠 먹기에 이르러 에드는 옅게 웃었다.

    오늘은 에드가 로아 보육원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자라고 아스넬 대공에게 편지를 보낼 때 도움을 받은 곳이었는데 헤린스 백작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로아 보육원은 풍요로움이 넘치는 남부 중앙과 떨어진 곳에 있었다.

    탄탄한 평지와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남부 시내를 빠져나와 걷다 보면 도로 사정부터 다른 외곽에 들어서게 된다.

    거기에서 넓은 개울 두 개를 건너면 높은 산자락과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있었다.

    그 오르막길 입구에 로아 보육원이 있었다.

    높고 풍요로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남부의 중심지와 분위기가 달랐다. 작고 단층인 건물들이 주를 이루는 외곽의 길가에는 양옆으로 높고 빽빽하게 심어진 검붉은 가시덤불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솟은 가시덤불은 날카로웠고, 사람 키보다도 한참 높게 자라 곤궁한 외곽의 살림살이를 눈에 띄지 않게 막았다.

    그리고 서로 얽히고설킨 가지는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마물이 침입했을 때 피해를 키우는 장해물이 되었다.

    피부에 살짝만 스쳐도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가시덤불은 마물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도피를 막는 방해물로 작용했다.

    거대한 마물의 손아귀에 우지끈 부러져 사람들의 머리 위로 퉁, 퉁 떨어지거나 울퉁불퉁한 바닥으로 내리꽂혀 퇴로를 막았다.

    오르막길 마을 사람들은 몇 번이나 호소했다.

    〈제발 가시덤불을 자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관공서는 불허했다.

    〈제국 아인드를 이루는 작은 풀에서부터 거대한 바위까지 너희 같은 녀석들이 손을 댈 수 있는 건 없으니 물러가라.〉

    오르막길 사람들을 다시 간청했다.

    〈저희의 비루한 손으로 감히 나무에 손을 댈 수 없다면 귀하신 분들께서 부디 가시덤불의 가지를 치고 뿌리를 뽑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관공서는 여전히 불허했다.

    〈그리 말해도 뜻을 알아듣지 못하니 너희는 오르막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없는 듯 살아가라, 그것이 너희들의 존재 이유니까.〉

    낡은 집, 빈곤한 살림살이, 귀족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언어, 남루한 차림새.

    풍요로운 남부의 이면에 자리한 비천한 것들은 오르막길로 밀어 넣고 높은 벽을 둘렀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심었고 넓은 개울을 파서 선을 그었다.

    ‘감히 이곳으로 넘어오지 말거라.’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을 짚고 들어가 해결하지 않고 보기 싫다며 눈에 띄지 않게 치워 버릴 뿐이었다.

    원작에서 어릴 때부터 오르막길에서 자란 에드는 8살 때 마물의 침입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 이후로 로아 보육원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생활했다.

    로아 보육원은 잘 보이는 마을 입구에 있었다. 언제든 문이 열려 있으니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오르막길 마을에는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을의 치부가 될 것도 없이 흔한 일이라 굳이 떠들 일도 아니었다.

    ‘원작의 에드’가 남긴 몇몇 기록으로 그를 알게 된 에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로아 보육원에 들렀다.

    대공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원작의 에드’가 마음의 고향으로 둔 곳이기에 찾아오는 길이 험해도 발자국을 꾸욱 찍었다.

    덜컹덜컹.

    마차의 움직임이 심해질 무렵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사가 급해지고 길이 덜 닦인 도로에서 흙이 튀어 마차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를 막기 위해서 마차의 창문을 꼭꼭 닫아걸려고 했다.

    “어?”

    그 순간, 에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채 오르막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검붉은 가시덤불의 가지들이 뭉텅뭉텅 잘려 있었다. 너무 깊게 파고들어 땅 밑에서도 얽히고설킨 가시덤불의 뿌리들이 반도 넘게 파헤쳐져 정리되어 있었다.

    ‘전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조밀하게 들러붙은 가시덤불 때문에 여름에도 빛 한 점 들어차지 않을 것 같던 오르막길 마을의 초입이 이렇게 싹 정리가 되었다고?

    에드가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빼자 마차를 끌던 텐스가 주의를 줬다.

    “에드, 위험해. 창문 닫고 손잡이 잘 잡고 있어. 금방 도착하니까.”

    하지만 오르막길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염원했던 시원하게 정리된 가시덤불을 바라보자니, 에드는 쉽사리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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