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3화 (43/198)

Chapter 43

‘그렇잖아도 남작가라고 업신여기는데 이런 일로 책까지 잡혀야 한다니.’

혀를 짧게 찬 셀튼은 독을 판 사냥꾼을 은밀히 처리했다. 헤린스 백작가에는 갖가지 보석이 든 근사한 보석함과 함께 의원을 보냈다. 의원에게는 쓰러진 하인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지시했다.

제대로 된 약을 처방하지도 않았다. 쓰러진 그놈이 며칠 앓다가 죽으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이런 소란의 중심에 있던 증인은 없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자신에게도, 헤린스 백작가에도, 그리고 그 하인에게도.

엘리사도 곧 정신을 차릴 터였다. 그 애가 로넨과의 약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귀족 사이의 약혼과 결혼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이던가? 어차피 정치적이고 정략적이고 돈으로 묶인 관계인 것을.

하인이 앓다 죽고 나면 다시 헤린스 백작가와 관계를 이어 가면 될 일이었다. 엘리사가 여전히 반항적으로 굴어도 상관없었다. 10년이고 20년이고 약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엘리사가 처지를 깨닫게 되면 그때 결혼시키면 되었다.

‘로넨이 엘리사와 둘이 만나는 자리는 없애고, 엘리사는 연금으로 통제하면 되니 헤린스 백작 부부에게는 적당한 금은보화나 쥐여 주면 되겠지.’

셀튼은 일의 처리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분을 삭였다.

하지만 로넨의 친형이 북부 대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셀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스넬 대공이 헤린스 백작가에 들어선 이후 쓰러진 하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대공이 접한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설마 엘리사가 독으로 로넨을 노렸다는 걸 아는 건 아니겠지?’

전전긍긍하며 창가를 서성이던 셀튼에게 대공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로넨과 엘리사의 파혼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엘리사가 헤린스 백작가에 방문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셀튼은 편지 내용을 보고 또 봤다. 몇 번이나 곱씹고 입술은 잘근잘근 짓씹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편지 속 말투는 예의가 있었고 로넨의 사정으로 파혼을 요청해 미안하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엘리사의 일을 모르는 것 같긴 한데.’

가늘게 뜬 눈으로 생각에 잠겼던 셀튼은 서재에 들어서는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이제 만족하느냐.〉

엘리사를 향해 일갈한 셀튼은 어그러진 미래에 화가 나면서도 로넨과 끊어진 인연에 대공이 셀튼 남작가에 관심을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북부 대공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셀튼은 빠르게 답장을 썼다. 너무 아쉽지만 파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북부 대공은 셀튼 남작가에 거액을 투자했다. 엘리사의 일로 계속해서 신경을 쓰던 셀튼이 마음을 푹 놓을 정도로 선심성 묻지 마 투자였다.

연락은 편지로 주고받아 대공을 직접 본다는 부담도 없었다. 더욱이 대공은 투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깐깐하게 따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이 엘리사의 약혼 지참금을 돌려받으러 오라고 연락했다. 셀튼은 이미 투자받은 금액이 크니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답장했다.

그러나 다시 만남을 요구하는 답장에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헤린스 백작가에 오게 된 셀튼은 아스넬 대공과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아닌 대면할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소문만 자자한 미지의 인물이자 자신보다 훨씬 직위가 높은 분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똑, 똑.

텐스가 서재 문을 노크했을 때 아스넬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었다.

셔츠 소매를 탁탁 잡아당겨 정리하는 그의 손길은 날카로웠으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셀튼 남작이 헤린스 백작저에 당도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아스델은 이르텔에게 삽을 넘겼다. 백작가 본관으로 올라온 뒤 옷을 갈아입고 창가로 향했다.

아직 정돈이 덜 된 서쪽 정원에는 이르텔과 로넨이 삽과 물뿌리개를 들고 보라색 꽃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 에드와 지오가 부지런히 꽃을 날랐다.

‘나랑 눈이 마주칠 때는 쭈뼛거리며 얼어붙어 있더니.’

아까와 다르게 움직이는 에드의 행동은 가볍고 날래기만 했다.

똑, 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대공 전하, 셀튼 남작님이 오셨습니다.”

주의를 환기하듯이 텐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를 인지한 아스넬은 커튼을 쳤다. 환한 햇살이 비쳐 드는 창가의 길목을 막고 타인의 눈길에 즐거운 정원의 모습이 닿지 않게 차단했다.

“안으로 모셔.”

서재의 전등을 켜며 답한 대공은 소파에 앉아 방문객을 기다렸다.

묵직한 문을 열어젖힌 텐스는 셀튼을 서재 안으로 안내했다.

‘무슨 그림 같네.’

텐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셀튼은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환한 빛을 뿌리고 있는 것 같은 아스넬을 바라보았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은 하얗고 서늘한 얼굴과 대비되어 그 색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깊고 서늘한 홍채는 붉디붉은 석류같이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넬 대공 전하.”

“나야말로 반갑네.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지만, 셀튼 남작.”

아스넬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소파에 앉은 셀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린스 백작이 어지간히도 신경을 썼군.’

서재에 놓인 의자 하나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았다.

장미 목으로 만든 의자 등받이에는 북부를 상징하는 문양과 비슷한 그림이 수놓아진 쿠션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깃펜도 희귀한 은빛 공작새 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를 확인한 셀튼은 테이블에 곡선이 미려하게 깎인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이 술은 저희 셀튼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황금 사과주입니다, 대공 전하.”

“황금 사과주라.”

“너무 달지도 쓰지도 않은 것이 목 넘김에 무척 흡족할 것입니다.”

“이런, 선물은 내가 준비해야 하는데 남작이 먼저 손을 썼군.”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보답한다고 생각하니 술 창고를 털어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넉넉히 챙겨 왔으니 편하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책상 한편에 엎어져 있는 잔을 두 개 들고 왔다. 크리스털 잔이 불빛에 빛나며 반짝이는 빛을 뿌렸다.

“그럼 가볍게 한잔하지.”

자리에 앉은 아스넬이 주둥이가 길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병을 기울여 잔에 따랐다.

황금색의 도수 높은 술이 감미로운 향을 자아내며 술잔에 따라졌다. 찰랑찰랑, 컵의 표면에 술이 넘칠 정도로 거침없이 부어졌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잔에 넘칠 듯이 따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지.”

입가에 미소를 띤 아스넬이 셀튼을 바라보았다.

“이걸 한 번에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누가 그러던데.”

양껏 따른 잔을 셀튼에게 내밀며 아스넬이 잔을 들었다.

‘이 많은 양을 한 번에 마신다고?’

셀튼은 잔에 넘칠 것 같은 술을 내려다보다가 대공이 잔을 입가에 갖다 대자 얼른 술잔을 들어 올렸다. 대공이 먼저 마시는 걸 보고 뒤따라 잔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작지 않은 크리스털 잔에서 빠르게 술이 비었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이번에도 찰랑찰랑, 술이 잔에 넘칠 것 같은 위험 수위에 셀튼은 조심스레 잔을 손에 들었다.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른 대공이 이번에도 먼저 술을 마셨다. 셀튼은 그 분위기를 읽고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술이 목구멍을 화하게 긁고 넘어가자 셀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좋은 술이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지레 찔리는 셀튼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잔을 싹 비운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함에서 서류와 작은 봉투를 꺼내 소파로 돌아왔다.

“듣기로는 엘리사 영애가 참 영특하고 사려가 깊다고 하던데.”

쩌억, 물소 가죽이 눌리는 특유의 소리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던 셀튼은 시선을 들었다. 깊고 신비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교성도 좋고 활달해 주위의 평판도 좋다고 하지.”

“그 또한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엘리사 영애에게 파혼이라는 그늘을 드리워 미안하네.”

“아닙니다, 대공 전하.”

“셀튼 남작이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

대공이 하얀색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확인해 보게. 이쪽 사정으로 파혼하게 되어 위약금과 위로금을 넣었으니.”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이미 많은 도움과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아니지, 이런 것일수록 형식적으로 결점이 없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잘 치러야 제대로 끝을 낼 수 있는 노릇 아니겠나.”

대공이 하얀 봉투와 함께 서류를 셀튼에게 넘겼다.

하얀 봉투를 열어 보자 높은 금액이 적혀 있는 수표가 들어 있었다. 약혼식 때 헤린스 백작가에 보낸 지참금에 수십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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