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어떻게 정원을 꾸미고 싶은지 생각해 두신 분위기가 있으십니까?〉
긍정적인 에드의 대답에 로넨의 얼굴이 환하게 달아올랐다.
〈어어! 생각해 둔 게 있어. 꽃으로 꾸밀 거야. 올해도 피고 내년에도 피고 그리고 그 후에도 또 피는 꽃들로 정원을 만들 거야!〉
……음, 그건 그냥 꽃동산인 것 같은데. 즉흥적으로 생각한.
아무래도 같이하기 싫다고 할까 봐 그런지 빠르게 대답하는 로넨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에드는 웃었다.
‘그래, 저 환한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울 순 없지.’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서쪽 정원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응응, 그렇게 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오에게 조언을 듣고 정원을 가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응응, 알았어!〉
그렇게 시작된 정원 꾸미기는 힘들었다. 몹시 고단했다.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햇살은 더웠고, 세세한 계획 없이 시작된 정원 꾸미기는 진도가 거북이걸음보다도 느렸다.
이번 기회에 헤린스 백작가의 정원을 제대로 손보고자 하는 지오는 타협을 몰랐고 로넨은 애기똥풀에 붙은 무당벌레만 봐도 신기해하고 행복해했다.
“이거 끝나기는 하는 걸까?”
땅에 삽을 푹, 박으며 에드가 한숨을 내쉬자 북부 기사단원들과 수레에 또 꽃을 잔뜩 싣고 온 지오가 어깨를 툭, 치며 밝게 웃었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과연 정원에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정원사다운 발언이었다.
에드는 다시 한번 한숨을 포옥 내쉬며 삽을 들었다. 아무래도 꾸밀 정원의 규모를 줄일 수는 없어 보이니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아스넬은 팔짱을 낀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가 본관의 서재에서 내다보이는 서쪽 정원이 시끌시끌하니 분주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재로 올라온 로넨이 말했다.
〈아스넬 형, 오늘은 에드랑 함께 헤린스 백작가의 정원을 꾸밀까 해요.〉
이미 에드와 이야기가 다 된 분위기에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르텔과 함께 로넨의 외출을 허락했다.
그리고 화원으로 향한 마차는 꽃마차로 탈바꿈해서 돌아왔다.
마차 뒤를 따른 붉고 노란 꽃이 가득한 수레에서 내린 에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수레에서 내린 지오는 신이 난 표정으로 모종을 옮기기에 바빴다.
대공은 삽을 질질 끌고 움직이는 에드를 시선으로 따랐다. 에드가 삽으로 땅을 파면 로넨이 모종을 들고 쫑쫑 걸어와 쭈그려 앉아 정성스레 꽃을 심었다.
그러다 힘에 부치는지 에드의 손에 들고 있던 삽이 모종삽으로, 모종삽에서 꽃모종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대공은 옅게 웃었다.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하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핏줄이 살짝 선 손목이 따스한 햇살 아래로 드러났다.
아무래도 저들의 일손을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 * *
아스넬이 봄 햇살이 내리 떨어지는 정원으로 나왔을 때, 에드는 떡갈나무에 손을 짚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로넨은 주둥이가 긴 물뿌리개로 방금 심은 꽃모종 위로 물을 주고 있었다.
“얼마나 남은 거야?”
아스넬이 다가가며 묻자 물뿌리개를 손에 쥔 로넨이 쪼르르 달려왔다.
“지오가 그러는데 거의 다 했대요. 꽃수레가 두 대 정도 남았다고 했어요.”
그건 이제 시작이라는 말인데.
죽은 너도밤나무를 뽑아내고 땅을 정리하던 북부 기사단원들이 손을 털며 아스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화원에서 울타리용으로 구매한 잎갈나무를 자르고 정리하던 기사단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을 바라보았다.
아스넬의 뒤를 따른 제이논이 시원한 레몬 꿀 차와 쿠키를 기사단원들과 에드에게 나눠 주었다.
레몬꿀 차를 꿀꺽꿀꺽 넘긴 에드가 쿠키를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공이 시선을 돌려 로넨과 에드가 정성껏 만든 꽃동산을 내려다보았다.
서쪽 정원의 반 정도를 꽃동산으로 꾸밀 생각인지 돌무더기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이쪽은 빨간색 꽃동산?”
“네, 버베나와 투구꽃. 그리고 튤립이랑 카네이션도 있어요.”
“이쪽은 주황색 꽃이고.”
“네, 이건 나리꽃이고 이건 꽃창포인데요. 지오가 다 손이 많이 안 가고 생명력이 강한 꽃들이라고 그랬어요.”
대답을 하면서도 로넨이 물뿌리개로 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셨다.
저렇게 신경을 쓰는 거 보니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지개색 꽃동산을 만들 심산인가 본데…… 그럼 이쪽은 노란 꽃이겠네.’
속으로 가늠한 아스넬은 나무에 기대져 있는 삽을 들었다.
정원을 가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매일매일 돌봐도 손 가는 일이 계속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곳을 재건하는 일이라니? 시간과 노력이 보통 들어가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 해 보다가 힘들다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무지개색 꽃동산을 꾸밀 생각에 지칠 틈도 없는 건지 씨익 웃는 로넨을 내려다본 아스넬은 다시 돌 더미로 엉성하게 나눈 구역을 보았다.
북부 기사단원들에게 로넨에게 적당히 호응해 주라고 했는데 이래서야 애먼 에드만 잡을 판이었다.
삽을 든 대공이 말했다.
“1기사단은 이쪽으로, 2기사단은 저쪽으로.”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주자 북부 기사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공을 필두로 1기사단 기사들이 땅을 파자 나머지 기사들은 모종을 옮겨 심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인원들이 맡은 일을 거침없이 해 나가자 정원 가꾸기에 속도가 붙었다.
덕분에 에드는 레몬 꿀 차를 마신 이후로 손 하나 까딱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삽을 들고 솔선수범하는 대공을 눈으로 좇다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다.
그리고 어느새 대공이 마지막 구역인 보라색 꽃동산을 끝냈을 때 이르텔이 다가와 전했다.
“셀튼 남작이 헤린스 백작저에 도착했습니다, 대공 전하.”
* * *
셀튼 남작은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헤린스 백작가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자 평소 저를 맞던 집사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인사를 했다.
“대공 전하께 안내하겠습니다, 셀튼 남작님.”
짧고 단정한 붉은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그의 뒤를 따르며 셀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추측대로 엘리사가 사고를 쳤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2주 전 일이었다. 웬일로 헤린스 백작가에 먼저 방문하겠다고 말한 엘리사가 기특했다. 약혼자인 로넨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쿠키까지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한마디 한마디 내놓는 말이 갸륵해 웃으며 네 원하는 걸 다 해 주마 했는데, 그게 다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던 것일 줄이야.’
엘리사를 호위했던 맥이 달려와 헤린스 백작저에서 생긴 소동을 알렸을 때 셀튼은 직감했다. 엘리사의 짓이구나 하고.
엘리사가 준비했던 쿠키를 정리하다 헤린스 백작가의 하인이 쓰러졌다고 했다. 혹시 몰라 맥이 은쟁반 위에 챙겨 왔다는 쿠키는 물에 젖은 부분이 검게 그을리듯 변한 흔적이 있었다.
셀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했다. 엘리사가 쓴 방법이 독이라는 걸 알았다. 그 뒤로는 왜? 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왜 독을 써서 로넨을 노렸으며, 이 과정에서 어쩌다 하인이 쓰러졌는지 궁금했다.
셀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눈앞으로 음료에 쿠키를 찍어 먹는 로넨이 떠올랐다.
그리고 로넨이 아니라 하인이 쓰러졌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돈으로 적당히 무마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엘리사가 남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물었다.
〈왜 그랬는지 묻겠다.〉
마차에서 내리는 엘리사가 길게 숨을 들이켜더니 답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셀튼은 엘리사를 노려보며 추궁했다.
〈아니다, 그 대답부터가 틀린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면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입니다, 라고 하거나 누군가의 함정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했다.〉
〈…….〉
〈그리고 네 방에서 이런 약병도 나오지 않았겠지.〉
셀튼이 위험 표시가 붙은 약병을 장갑 낀 손으로 들고 흔들자 엘리사가 흠칫, 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셀튼의 입매가 비틀렸다.
〈…….〉
〈그렇다면 왜 그랬느냐? 왜 헤린스 백작가에 독이 든 쿠키를 가지고 갔느냐.〉
엘리사는 끝내 답하지 않았고 셀튼은 그녀를 방에 가두었다.
남작은 엘리사 대신 그녀를 보필한 하인과 하녀를 불러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감히 내가 하려는 일에 재를 뿌리고 내 얼굴에 흙을 던지며 욕을 보인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저, 저희는 엘리사 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처음엔 모른다며 발뺌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그들은 엘리사가 지시한 일을 술술 불었다. 독을 구한 경로와 누굴 노렸는지까지 파악한 셀튼은 눈가를 찌푸렸다.
독은 깊은 숲속에 사는 사냥꾼을 통해서 구했고 독으로 노린 사람은 로넨이 맞았다. 셀튼은 제가 그리는 미래를 방해하는 엘리사가 못마땅했다. 헤린스 백작가에 빚을 진 것도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