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1화 (41/198)

Chapter 41

‘미치겠네.’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로워하던 네이센은 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에게 돈을 한 번 더 빌리고 그 대상단 부부와 다시 게임을 한다면 다시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야! 그래, 그러면 되잖아?! 걱정할 것 하나 없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엔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치안대의 연락을 받은 헤린스 백작이 집사를 보내 네이센을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때 그의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처얼썩.

네이센의 뺨을 때린 헤린스 백작이 외쳤다. 노한 목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네이센은 아픈 뺨을 달랠 새도 없이 헤린스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버지.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시끄럽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의 추잡한 모습을 봤는지 아느냐?!”

“그, 그게 그러니까 지난밤에 분명히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다른 말 할 것 없다. 오늘 당장 저택을 떠나 벤타 학술원으로 떠나거라.”

네이센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의 아버지라면 이렇게 화를 내더라도 금세 화가 풀리곤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이상했다.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네? 벤타 학술원이라면…….”

“그래! 교리가 엄격하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법도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는 학술원이다! 지금 너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배움이지!”

“하지만 아버지!”

네이센은 화가 단단히 난 헤린스 백작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벤타 학술원은 남부의 옐타 산맥의 중턱에 있는 학술원으로 외부 세계와 격리되고 교칙이 엄격한 기숙 학술원이었다.

“시끄럽다! 아스넬 대공께서도 후원하시는 곳이라 하니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터! 그러니 잔말 말고 따르거라. 대공께서 치안대에서 전하는 소식에 어찌나 어이없었으면 내게 넌지시 벤타 학술원을 말했겠느냐?!”

헤린스 백작의 노기 띤 음성에 네이센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물었다. 이번엔 어떤 말을 해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럼 의자에 앉아라, 네이센. 삭발을 하고 입학해야 하니 내가 직접 너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겠다.”

“……아, 아버지.”

“1년이 안 된다면 2년, 3년도 좋다. 네가 정신을 차리고 헤린스 백작가의 소백작으로서 위엄이 제대로 설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절대 아까운 것이 아니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학습하고 정진하거라.”

책상에 올려진 가위를 집어 드는 헤린스 백작의 서슬 퍼런 동작에 네이센은 고개를 떨구었다.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굳은 의지를 꺾기 어려우니 1달, 길어야 두어 달 정도만 그 촌구석에 처박혀 있자고 생각하면서 쓰린 속을 달랬다.

싹둑싹둑.

그 생활이 생각보다 길어질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네이센은 싹둑싹둑 잘려 나가는 갈색 머리카락을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 * *

“에드, 여기에 이 빨간 패랭이꽃을 심으면 어떨까?”

오전부터 헤린스 백작 저의 서쪽 정원이 분주했다.

정원 한편에 패랭이꽃과 수선화가 담긴 작은 화분과 흙이 묻은 삽과 물뿌리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로넨은 손에 든 화분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꽃을 심을 장소를 찾았다. 손에 낀 장갑은 이미 흙투성이였다. 정원을 부지런히 헤집고 다니느라 신발과 바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로넨의 곁에서 에드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답했다.

북부 기사들의 손길이 닿은 동쪽 정원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서쪽과 남쪽 정원은 그렇지 못했다. 온실 정원은 지오가 신경 써서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야외는 달랐다.

훈련장 주위로 꽃나무와 과실나무를 심은 동쪽 정원과 달리 다른 정원은 미관을 해치는 요소가 있었다.

따스한 봄의 손길이 닿은 고즈넉한 정원으로 두더지 친구들이 소풍을 왔다 간 건지 땅이 푹푹 팬 곳도 있었고, 시름시름 앓는 꽃나무가 방치된 채로 있기도 했다.

그랬던 정원이 지금 이렇게 활기가 도는 건 로넨의 기특한 생각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헤린스 백작이 말했다.

〈지난밤 네이센이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저택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공 전하. 며칠 후 대공 전하께서 백작가를 떠나실 때 배웅을 한 뒤 움직이면 좋았을 텐데 일정에 여유가 있지 않아 그러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대공은 물을 마시며 답했다.

〈아닙니다, 헤린스 백작. 사정이 있는 일에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 괘념치 말고 네이센 소백작의 여정에 항상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네이센 소백작의 앞길에 행복이 함께 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옆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듣던 로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네이센 소백작이 저택을 떠나셨다고요?〉

〈그래, 로넨. 조금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단다.〉

〈아…… 얼마나 걸리는 여행인가요?〉

〈글쎄다, 짧아도 1년은 되지 않을까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구나.〉

헤린스 백작의 대답에 로넨은 먹던 스테이크도 놓치고 시무룩해졌다.

‘왜 그러지?’

로넨의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에드가 로넨의 눈치를 살피다 연어찜이 든 접시를 살짝 앞으로 밀며 물을 마셨다.

어제 오전 치안대에서 헤린스 백작가를 방문했다.

어쩐 일이냐며 반갑게 치안대 부대장을 맞은 헤린스 백작은 아침 식사 때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바닥을 쳤다. 몹시 겸연쩍어하며 집사를 찾았고 백작가를 나서는 치안대 부대장을 배웅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눈가에 매달린 짙은 피로와 함께 꾀죄죄한 몰골로 집사와 마차에서 내린 네이센은 별관으로 직행한 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네이센이 별관에 들어서자 헤린스 백작이 명을 내렸다.

〈오늘은 저택의 별관에 집사 외에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세나의 말에 의하면 네이센이 부도덕한 모습을 보여 헤린스 백작이 몹시 노했다고 했다. 남부의 자랑인 분수대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데 그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양이었다.

타인의 평판에 몹시 신경을 쓰고 귀족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이론적으로는 빠삭하게 알고 있는 헤린스 백작이 그에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 때문에 네이센을 어디로 보낸 것이라면 아귀가 들어맞았다. 헤린스 백작가로 쏠린 타인의 이목이 사라지고 소문이 잠잠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네이센을 소문의 중심지에서 치워 버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네이센이 헤링 분수대 앞에서 보인 추태가 대체 어떤 추태이기에 헤린스 백작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 웬만해선 그를 끼고돌던 백작이?’

조금 궁금했지만 에드는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네이센의 얼굴이 떠오르자 금세 흥미가 식었다.

에드는 숟가락을 들었다. 인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놈에게 관심을 두는 시간에 피와 살이 되는 수프를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는 게 이득이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로넨이 불렀다.

〈에드.〉

〈네, 도련님.〉

〈그게 음…… 정원을 꾸미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을까?〉

〈정원이요?〉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덧붙였다.

〈서쪽과 남쪽 정원을 꾸미고 싶거든. 좀 휑해서.〉

물론, 꾸밀 수 있었다.

로넨이 하고 싶다면 헤린스 백작가의 서쪽과 남쪽 정원만 꾸밀 뿐이랴? 산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 산을 만들 수 있었고 수영장을 파고 싶다면 수영장을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에드는 로넨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사흘 후면 아스넬 대공은 헤린스 백작가를 떠나 황궁으로 향하는 여정에 오른다. 황제가 친동생을 찾은 대공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하는 축하연의 일정에 맞춰 아스넬 대공은 황도에 올랐다가 북부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떠날 장소에 꽃을 심자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좋은 추억도 없는 헤린스 백작가의 정원을 꾸미자는 로넨의 말에 에드는 동하지 않았다.

‘꾸미는 게 뭐야. 마음 같아서는 굴착기라도 동원해 다 헤집어 놓고 싶은 심정이구만. 다 부수고 갈아엎어 폐허로 만들고 떠나고 싶다.’

대답이 즉시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진 것인지 로넨이 말을 덧붙였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3일 후면 헤린스 백작가를 떠나야 하잖아? 그런데 네이센 소백작도 1년 동안 저택에 안 올 거라고 하니까.〉

〈…….〉

〈그러면 헤린스 백작 부부가 외롭지 않을까 해서. 많이 적적할 것 같은데.〉

말끝이 늘어지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로넨의 말간 눈동자에 에드는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심장이 찔린 것같이 뜨끔했다. 에드는 크윽, 코를 훌쩍였다.

‘허, 봤나. 헤린스 백작. 헤린스 백작 부인.’

당신들이 학대하고 괴롭히던 이 작은 아이가 지닌 크고 깊은 도량을?

벤뎅이 소갈딱지보다도 못한 당신들을 위하는 대인배의 그릇을?

크고 너른 로넨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은 에드는 상체를 숙였다. 로넨과 시선을 맞추며 로넨의 청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