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
에럴드가 하하, 웃으며 팔짱을 꼈다. 네이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노래가 사실이었으면 케릴 집사가 헤린스 백작가에 아직 남아 있지 못했겠지. 케릴 집사도 안 됐네. 괜히 그런 노래가 퍼져서 사실 여부를 떠나 이자르 의상실 하면 케릴 집사부터 떠오르게 되었잖아?”
“…….”
“그러니 이자르 의상실의 비리 장부가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니까? 소문만 무성하게 떠도니 죄 없는 사람이 남의 입에나 오르내리고, 나같이 마음씨 넓은 도련님도 집사를 의심의 눈길로 지켜보게 되니까.”
네이센의 입가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헤이 백작가 집사랑 이자르 옷가게 사장이랑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에럴드가 제 귀에다 이 노래를 불러 준 날은 카드 게임으로 돈을 다 잃을 뻔했다가 마지막 승부에서 승리를 거머쥔 날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렇게나 많은 칩을 바꿀 금화가 없었지만 아스넬 대공이 선심을 제대로 쓰는 덕분에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본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손에 쥔 날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을 만도 했지만 에럴드가 킬킬거리며 부른 노래가 떠오르자 열이 오른 그는 헤린스 백작가 식당에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잠결에 식당으로 들어서는 에드를 봤다. 뻗친 머리로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들어서는 꼴에 잘 되었다 싶었다.
〈건방진 새끼.〉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와인 잔을 벽을 향해 날리자 퍽, 부딪혀 깨졌고 말단 하인의 뺨에 옅게 생채기가 나며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 이거지.’
같은 식당 같은 식탁에서 같이 앉아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고개를 숙이는 말단 하인의 얼굴을 보자 속이 시원해졌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이 정도로만 하고 아침에 보자고, 에드.〉
동시에 비죽이 떠오른 생각에 집사 케릴의 방으로 향했다. 잠을 자고 있는 그를 깨워 손을 까딱이며 웃었다.
〈집사, 이제껏 헤린스 백작가의 명망으로 그 손아귀에 잡아 쥔 것들을 모두 내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내놓는다면 그게 어떤 것이라도 눈감아 주도록 하지. 헤린스 백작가의 소백작으로서 명예를 걸고 약속해.〉
〈…….〉
〈하지만 그 늙은 손아귀에 작은 돌덩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간 집사의 끝이 몹시 처량해질 거야. 이 또한 헤린스 백작가의 소백작으로서 장담하지.〉
* * *
잘 자다가 벌컥 열리는 문에 케릴은 눈을 번쩍 떴다. 팔짱을 낀 채 머리맡에 자리 잡은 네이센을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네이센과 달랐다. 품행이 단정치 못했어도 느긋한 면모가 있던 그의 얼굴로 사나운 기운이 들끓었다.
〈집사, 어떻게 하겠어?〉
욕심껏 모아놓은 물건들을 내놓겠어? 아니면 그냥 뭉개겠어?
선택의 기로에서 케릴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건 그냥 던져 보는 말이 아니구나.’
10년 넘는 집사의 경력으로 감을 잡은 케릴은 네이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잘못을 빌기도 전에 속삭이는 소백작의 은밀한 제안에 침대 매트리스 밑에 넣어 둔 장신구 함을 꺼내 건넸다.
어깨를 톡톡, 케릴이 이걸 모았던 정성을 위로한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린 네이센은 방을 나섰다. 이걸 다 어떻게 모았는지 묻지 않았다. 또 그런 짓을 할 거냐며 따지지 않았다.
이번 일은 완전히 묻어 주고, 실체가 드러나면 백작에게도 잘 말해 둘 테니 앞으로 처신을 잘하라는 무언의 맹약이었다.
네이센은 비식 웃었고, 케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네이센은 함에 든 장신구들을 성의 없는 눈길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동이 떠오를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백작가 본관 2층으로 옮겨진 에드의 방 앞에는 은은한 램프가 켜져 있었다.
‘말단 하인 놈의 방 앞에 무슨 이런 낭비를.’
원래는 대공가의 기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있었다면 속에서 열불이 더 치솟았을 터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네이센은 은은히 비쳐 드는 복도의 불빛에 에드의 하얀 얼굴이 옅게 물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방문은 일부러 열어 두었다.
에드의 감은 두 눈에 피로함이 배어 있었다. 오른쪽 뺨에 새로 생긴 붉은 생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잠시 내려다본 네이센은 장신구 함을 던졌다.
그 장신구 함이 벌어지며 이불 위로 장신구들이 통통 떨어지는 것이 극적이었다.
네이센은 입매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변명해야지? 에드? 별채의 네 방에서 나온 것들인데.〉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에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이마를 꾹꾹 밀치는 자신에겐 힘이 있었다.
집사에게서 뜯어낸 물건으로 에드에게 덮어씌우며 압박해도 그는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네이센은 그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녀석이 아무리 대공의 관심을 받는다 해도 결국 제 손아귀에서 그의 목줄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풀어졌다.
‘……그렇게 녀석을 구석으로 잘 몰았는데.’
하, 거기서 대공이 나타날 줄이야.
새벽부터 벌어지는 소동이 대공의 눈과 귀에 잘 들어가길 원했지만 대공의 개입을 원한 건 아니었다.
〈뭔가 잘못 안 것 같군요, 소백작.〉
에드를 내리치려던 자신을 막은 대공의 손에 힘이 넘쳤다.
에드를 범인으로 몰고자 얼기설기 엮었던 상황은 모두 대공에게 허물어졌다. 본전도 못 찾고 말았다.
머리를 굴려 그날 밤, 방에 불을 활활 피운 날 방에 혼자 남은 에드가 도둑질을 했을 거라고 내놓은 계책도 여지없이 대공에게 뚫렸다.
대공은 비뚜름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저를 압박했다. 탄탄한 몸이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다가붙자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 네이센은 대공이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리는 새하얀 셔츠를 보았다.
목까지 단정하게 단추가 잠겨 있었던 셔츠 아래로 드러난 대공의 피부는 매끄러웠다. 그 위를 덮은 울혈은 수많은 상상력을 부추겼다.
대공은 그 상상력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는 그럴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사람하고만 체온을 맞대거든.〉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바닥에 주저앉은 자신을 이르텔이 부축했다. 얼이 빠져 제 방으로 들어온 네이센은 문을 잠근 후 사람들과 접촉을 피했다.
‘둘이 밤을 함께 보낸 건 확실하고.’
가늘어진 눈으로 어두운 방에 앉아 골몰했다.
‘둘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된 거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네이센은 책상을 쾅, 쳤다.
헤린스 백작가 본관을 대공이 쓴 이후로 자신은 별관에서 지내 정보가 부족했지만 설사 둘이 몸만 맞댔더라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대공과 맺은 인연으로 다른 곳에서도 투자가 들어오고 있는 마당이니 결코 대공의 눈 밖에 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대공이 헤린스 백작가에 발을 빼는 순간 두 배, 세 배로 뜯어 가려고 안달을 낼 테니.〉
그랬는데 에드를 그렇게 윽박질렀으니…… 하, 대공도 취향 한번 독특하지. 그런 놈을 품에 안고 즐기고 싶은가? 얼굴이야 반반하지만 먼지 구덩이에서 박박 기던 천한 놈을 안아 봐야 무슨 재미가 있다고?
입매를 못 마땅히 구긴 네이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로 대공과 헤린스 백작가가 틀어지면 곤란했다. 그러니 대공을 찾아가 사죄하고 에드에게 사과하는 게 좋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공이야 언제든 찾아뵈어 무릎을 꿇을 수 있었지만 에드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센은 차라리 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노선을 택했다. 회피해 봐야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지만 제 마음이 끌리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불호령을 내릴 것도 뻔했으니 숨을 죽이고 몸을 낮췄다. 큰 태풍이 조금이라도 사그라지면 그때 나가서 일을 해결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당일 저녁 대공이 그를 찾았다.
똑, 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르텔은 말을 전했다.
〈대공 전하께서 서재에서 소백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공이 찾는 거라면 뻗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 밖으로 나온 네이센은 마음을 졸이며 백작저 본관에서 별관으로 발을 옮겼다.
‘종일 눈에 띄지도 않고 쥐 죽은 듯이 지냈는데 여전히 대공의 분이 누그러지지 않은 걸까?’
단단히 혼을 내려고 벼르다가 나를 부르는 걸까?
혹시 헤린스 백작가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침에 서늘했던 대공의 눈빛이 눈앞에 떠오르자 네이센은 작게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팔뚝을 손으로 문지르며 이르텔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백작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네이센은 그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를 맞은편 소파로 안내하며 차를 마시는 대공의 표정이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미미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소백작에게 성급하게 군 면이 있더군요.〉
〈…….〉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로 올리는 금화에 네이센은 꿈틀거리려는 입매를 진정시켰다. 평소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금화였다.
‘하긴 그렇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하인 나부랭이 때문에 귀족과 싸울 정도로 대공이 순진할 리가 없지.’
이렇게 돈을 많이 내놓는 뜻도 잘 알아차렸다. 오늘 있었던 일은 어디에도 말하지 말고 입을 닫고 있으라는 의미겠지.
‘아침엔 자기 허락 없이 에드를 건드린 게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결국 내 쪽으로 추가 기울었겠지. 헤린스 백작가의 장남과 그에 딸린 하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보니.’
얼마 가지도 않을 하인과의 몸정이라고 해 봐야 대공의 치부밖에 되지 않았다. 테이블에 놓인 금화는 그를 깨달은 대공의 선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네이센은 입을 꼭 다물기로 다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 전하.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절대 입 밖으로 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일이라니요, 소백작? 나는 어제 해결할 일이 있던 터라 소백작에게 투자하지 못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만.〉
〈아!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제가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지워 버리라는 대공의 말을 네이센은 넙죽 받았다. 대공과 차를 마시고 금화를 챙겨 들었다.
‘그게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된 일이란 말이지.’
잠시 회상에 잠겼던 네이센은 옆에서 조잘대던 에럴드가 팔을 툭, 쳐 오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왔다.
도박장 안은 여전히 적당히 밝고 적당히 시끌시끌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니까? 내가 쏠 테니.”
“아, 됐으니까 너나 가서 먹어.”
네이센은 테이블로 칩을 던지며 젠에게 눈짓했다. 카드나 돌려.
그날 대공에게 받은 금화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공격적으로 카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참나.”
심드렁한 네이센의 대꾸에 흥미를 잃은 에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젠이 카드를 섞으며 작게 말했다.
“네이센 님, 에럴드 님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지 아십니까?”
“쟨 항상 저렇잖아?”
“물론, 에럴드 님은 항상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밝고 쾌활한 분이시지만, 오늘은 그저께와 어제 이틀 연속으로 골든벨을 울리실 정도로 크게 따셔서 그렇습니다.”
네이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이틀 연속으로 골든벨을 울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