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7화 (37/198)

Chapter 37

대공이 그런 세네르를 내려다보며 오른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등으로 은빛 물결이 일렁이며 나타나며 예리한 빛무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땅으로 내리꽂히며 소환진이 표출되었다.

소환진 위로 나타난 은빛 늑대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행동은 얌전했지만 흔들리는 꼬리에는 검은 불길이 피어올랐고 하아암, 하품을 하며 쩍 벌린 입에는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렸다.

“아란.”

대공이 늑대 머리를 쓰다듬자 그 불길이 언뜻 사그라지는 듯이 보였으나 대공이 손을 떼자 다시 일렁거렸다.

“뜯어 먹어.”

대공이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은빛 늑대가 소환진을 훌쩍 뛰어넘어 밖으로 나왔다. 타닥타닥, 힘이 넘치는 은빛 늑대가 매끄러운 바닥을 박차며 전진했다. 크고 빠르고 무거운 짐승의 발소리가 훈련장을 울리며 고꾸라져 있는 세네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기절한 척하고 있던 세네르는 일순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어둠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쩍, 벌린 은빛 늑대의 입이 보였다.

“아악.”

크게 뜨여진 세네르의 눈동자가 금세 겁을 집어먹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죽는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상체를 일으킨 세네르는 벌벌 떨며 뒤로 기었다. 발과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리다 못해 꺾이기 일쑤였고 은빛 늑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시커먼 절망에 잠겨 들었다.

그런 세네르를 내려다보며 대공이 무심하게 말했다.

“발부터 뜯어먹어야지.”

크아아.

“그래야 오래오래 씹고 뜯을 수 있으니.”

대공의 속뜻을 알아들은 은빛 늑대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뒤로 빠지는 세네르의 발치를 물자 세네르는 고개를 저으며 발을 바동거렸다.

으아아아, 은빛 늑대의 입가가 닿은 발치로 열기와 한기가 동시에 느껴지며 머릿속으로 무섬증이 치달았다. 아직 씹히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끔찍하게 아픈 것 같았다.

“싫, 싫어! 저, 저리 가.”

은빛 늑대의 얼굴을 발로 차려고 했지만 커다랗게 입을 벌려 포효하는 거대한 짐승의 기세에 눈앞이 검게 물든 세네르는 온몸을 덜덜 떨다 뒤로 넘어갔다.

대공이 그 모습을 직시하다 은빛 늑대의 털을 쓰다듬었다. 눈에 초점을 잃고 뒤로 넘어간 세네르의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대공이 세네르의 힘없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검을 내리꽂으며 말했다.

“바지에 실례를 했군, 세네르 경.”

* * *

네이센은 입에 문 연초를 잘근거렸다.

‘아, 시끄러워.’

누군가는 돈을 내고 누군가는 돈을 버는 공간은 신이 난 박수 소리와 안타까움이 밴 탄식이 공존하며 굴러가고 있었다.

행복을 꽃피우는 행운의 집

꿈과 희망을 가득 실은 신조를 내세운 게임 가게답게 번화가 구석에 밝은 색감으로 터를 잡은 건물은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복권 한두 장을 사러 발길을 옮긴 어느 노부부부터 명망 높은 귀족가의 어린 자제까지 나이도 신분도 상관이 없었다.

번화가 4층 건물로 우뚝 서 있는 ‘행복을 꽃피우는 행운의 집’ 1층에서는 소소한 행운을 거머쥘 수 있는 복권을 판매하고 구슬 뽑기와 같은 놀이기구가 있었다.

하지만 2층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남부의 번화가라 땅값도 비싸건만 2층은 공실로 두고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만 남겨 두었다.

3층과 연결되는 2층의 둥글둥글 타원형 계단은 언뜻 보면 부드럽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계단을 구성하는 차가운 금속의 속성은 그렇지 않았다.

계단을 밟고 3층에 오르면 간판은 달리지도 않았고 검은색과 은색이 교차하는 벽에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조용한 곳이었다.

그 공간을 따라서 검은 카펫이 깔린 안쪽으로 들어서면 검은 문 앞을 지키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회원임을 증명하면 검은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이 ‘행복을 꽃피우는 행운의 집’에서 가장 큰 수익이 발생하는 도박장의 VIP실이었다.

미로 같기도 했고, 초행자에겐 그 안을 함부로 내어 주지 않으려는 야박함도 있는 도박장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특유의 조심성과 불친절함이 있었다.

활짝 열린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발소리마저 잡아먹는 어둡고 짙은 붉은색의 카펫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장미 목 테이블들은 검고 단단했다.

그중 한 테이블에 서서 카드를 섞던 직원 젠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네이센에게 말했다.

“네이센 님, 목을 축일 와인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삐딱하게 고개를 괸 네이센이 손에 들고 있던 칩을 툭, 던졌다.

“잔말 말고 카드나 돌려.”

“네, 그럼 카드를 세 장씩 돌리겠습니다. 네이센 님.”

금화를 내고 바꾼 칩을 함부로 던지는 손길은 버릇이 없었다.

그러나 연달아 지는 판에서도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았다가 큰 손해를 입은 사람치고는 멀쩡해 젠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팁으로 던진 칩을 챙긴 젠은 네이센의 눈앞에 손을 앞으로 뒤로 움직이며 내보였다. 아무런 속임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킨 젠은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

카드를 잘 섞은 젠이 세 장의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조심히 확인한 네이센이 칩을 더 걸었다.

“그럼, 카드를 두 장씩 더 돌리겠습니다. 네이센 님.”

카드의 모양과 숫자에 따른 여러 가지 규칙을 통해서 승패가 나뉘는 게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헤린스 백작가를 나선 네이센은 점심 저녁도 거르고 게임에 빠져 있었다.

‘♥2, ♣2, ♣8.’

그리고 더 들어온 카드가 ‘◆k, ◆6.’

‘제길, 같은 숫자가 두 개밖에 안 들어왔네.’

네이센은 시선을 힐끗, 들었다가 테이블로 칩을 몇 개 더 던졌다.

“한 번 더.”

“네, 저도 한 번 더 가겠습니다. 네이센 님.”

초반에 들어온 카드가 그럭저럭 좋아서 이번 판은 좀 쉽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뒤로 따라붙은 카드들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확률 싸움.’

내가 별로면 저쪽도 별로일 수 있었고 이번에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되는 거지.

어깨를 으쓱한 네이센은 칩을 더 던지며 말했다.

“한 번 더.”

“네, 알겠습니다. 네이센 님. 저도 한 번 더 가겠습니다.”

도발적으로 칩을 걸어도 착실하게 따라오는 젠과 수 싸움을 하다가 결국 졌을 때 네이센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이맛살을 구겼다.

‘오늘 진짜 더럽게 안 풀리네.’

그때였다. 네이센이 앉은 옆의 의자가 뒤로 밀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남자가 있었다.

“네이센, 들었지? 지난 주말에 이자르 의상실에서 불이 났다는 거.”

네이센과 안면이 있는 가네 백작가의 차남 에럴드였다.

‘하, 또 그 이야기인가.’

고작 옷가게 하나가 불탄 걸로 아주 대대적으로 난리였다.

지난 주말에 남부에서 유명한 이자르 의상실에서 불이 났다더니 여기서도 그 이야기, 저기서도 그 이야기였다.

“바쁘니까 다음에 이야기해.”

“바쁘기는? 연달아 꼬라박았으면서?”

네이센의 눈동자가 말없이 그에게 향하자 에럴드가 씨익 웃었다.

“하하, 그렇게 노려볼 거 없고 이자르 의상실의 사고 경위를 파악하던 남부 중앙 치안대 대장이 비밀 장부를 발견했다더라?”

그것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남부 일간지에 대서특필이 되어서 소란이었다. 그 바람에 이자르 의상실과 헤린스 백작가 집사의 결탁이 수면 위로 떠 올라 떠돌고 있었다.

시장 바닥에서 무슨 노래가 떠돌았다는데 그걸 제일 먼저 알려 준 놈도 에럴드, 저 자식이었다.

귀족가 자제답지 않게 평민들에게 뭐 그리 관심이 많은 건지 시장부터 빈민가까지 안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었다.

입은 또 얼마나 가벼운지 몰랐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터였다. 하여튼 도움 되는 것 하나 없이 징글징글한 놈이었다.

“처음엔 불에 탄 갑옷이 수상해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뿌리 마디마디에 얽힌 알감자처럼 의혹이 쏟아져 나온다고 하니 진짜로 믿을 사람 없지 않냐?”

네이센은 아무 대답 하지 않았지만 에럴드는 꿋꿋했다. 입이 쉬지 않았다.

“이제껏 친절하고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것처럼 굴던 의상실 부부가 실은 뒤로 어마어마한 착복을 하고 있었다니? 한두 푼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래서 뭐?”

“우리 부모님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셨는지 모른다니까? 설마 의상실 부부가 그랬을 줄이야. 그리고 가네 백작가 집사도 혹시나 이자르 의상실과 그런 건 아닌지, 정말이지 걱정이 하나둘이 아니라니까.”

네이센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는 에럴드의 속마음이야 아주 잘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헤린스 백작가의 집사 케릴은 어떻게 되었어?’

‘진짜로 착복했대? 아니면 그냥 뜬소문?’

‘진짜 착복을 한 거라면 헤린스 백작은 어떤 식으로 처분을 내릴 거래?’

그걸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것이었다.

네이센은 그런 에럴드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와인을 마시며 심드렁히 답했을 뿐이었다.

“헤린스 백작가의 집사가 진짜 그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면.”

“궁금하면?”

“케릴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고 정확하지, 에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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