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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6화 (36/198)

Chapter 36

매끈매끈한 바닥을 내려다보며 텔론은 대공의 발치를 확인했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대공의 오른발이 앞으로 나온 것을 확인하며 오른손에 쥔 검을 고쳐 쥐었다.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줄였다.

공격이 먹히지 않으니 방어적으로 나가 볼 심산이었다. 이르텔이 쓰던 대검과 달리 검신이 크고 두껍지 않은 대공의 장검은 검과 도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볍게 허공에 검을 털어 내듯이 손을 움직인 대공이 텔론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하자 먼저 움직였다.

‘이, 이번엔 찌르기다.’

빠른 속도로 맞부딪혀 오는 검의 위력이 강력했다. 그 충격만으로 텔론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검과 검이 맞붙은 상황에서 뒤로 밀리자 텔론은 마치 커다란 태산과 싸움을 하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닿은 건 검과 검인데 대공의 힘에 온몸이 납작하게 눌리는 것 같았다.

텔론은 검을 비스듬히 움직여 검끼리 맞닿은 힘을 비껴 내고 싶었다. 그러나 빈틈없이 저를 짓누른 대공의 힘이 너무 막강해 왼손에 쥔 손도끼를 휘둘렀다. 대공의 장검을 밀어내려는 의도였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균형이라도 흐트러뜨릴 심산이었다.

‘성공한 건가.’

묵직하게 맞붙었던 검의 무게가 사라지자 텔론은 힘겨운 숨을 토했다. 짧은 시간 내에 벌어진 공방전으로 지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올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났다 싶었던 대공이 검을 묵직하게 휘둘렀다. 동시에 파아악, 마치 폭풍 같은 검압이 땅을 가르며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힘이 빠진 텔론의 몸으로 거대한 검압이 밀려들었다.

“으윽.”

한쪽 무릎을 꿇으며 거센 압력을 받아 낸 텔론은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바닥에 검을 세워 막았다. 고개를 들어 간신히 앞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거대해 보이는 대공이 다시 한번 장검을 치켜들어서 겨누었다.

그리고 스르르,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지며 매가리 없이 앞으로 스러지는 몸으로 딱딱한 땅이 덮쳐들었다.

그렇게 텔론은 정신을 잃었다.

“…….”

장검을 갈무리하며 대공이 시선을 돌렸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세네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북부 로얄트 기사단의 입단 시험 마지막 응시자 세네르.”

“…….”

“준비되었나.”

낮게 깔리는 대공의 목소리에 세네르는 이맛살을 구겼다.

‘출입구가 완전히 막혀 있는데.’

이번에도 이르텔이 다가와 정신을 잃은 텔론을 운반했다. 텔론을 어깨에 메고 움직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확인하며 세네르는 살짝 열렸다 각도를 좁히며 천천히 닫히는 훈련장 문을 노려보았다.

‘저 문을 뚫고 나갈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순순히 보내 주지 않겠지.’

팽팽하게 당겨진 탄탄한 천으로 막혀 있는 연무장에는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출구인 문 앞은 이르텔이 떡하니 지키고 있는 것을 본 세네르는 작게 혀를 찼다.

대공과 이르텔 중 하나를 치고 퇴로를 찾아야 한다면 이르텔을 노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세 걸음 만에 잡히나 열 걸음 만에 잡히냐의 차이였다.

어제 무기점에서 가볍게 검을 맞대 본 결과 이르텔은 자신을 한 손으로 상대해도 충분할 만큼 실력 차이가 컸다.

‘……그런 이르텔보다 한 수가 뭘까? 몇 수나 위에 존재하는 대공의 빈틈을 찾기란 불가능하단 말이지.’

텔론이 대공과 검을 맞대는 동안 세네르는 대공의 움직임을 눈으로 샅샅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대공의 실력은 앞으로 내디디는 한 발자국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묵직한 몸에 실리는 힘은 하루 이틀 수련해서 지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을 놀리는 손길은 허세로 찌들어 허리춤에 무기를 덜렁덜렁 차고 다니는 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공격은 날카로웠고 공격에 가해지는 힘은 압도적이었다.

겨우 몇 번, 그것도 하급 기사를 상대로 검을 몇 번 휘두른 것에 불과함에도 완벽한 검술을 구사하는 대공의 움직임에 세네르는 감탄하는 동시에 의구심을 품었다.

‘이게 정말 북부 로얄트 기사단의 입단을 위한 형식적인 시험에 불과한 건가?’

워낙 출중한 기사들이 모인 기사단이니 입단 시험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러니 차라리 대공이 나서서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를 위해서 친히? 그저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기 위한 장치로?

아니면.

로넨을 툭, 툭 괴롭힌 자들을 대공이 손수 처리하는 수단으로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인가?

세네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악이 서리지 않은 대공의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넨을 건드린 것에 대한 처벌이라면 이렇게 끝내지 않을 것 같은데…… 애들을 죽이진 않았으니.’

……대공이라면 쉽게 죽일 수도 있을 텐데.

세네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이 이 시험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적당히 대공을 상대하다가 기절한 척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자. 그리고 무기를 챙겨 어딘가로 숨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대공은 며칠 뒤면 헤린스 백작가를 떠날 테니 돈이 궁해지면 슬그머니 백작저로 돌아오면 될 일이었고.

생각을 마친 세네르는 대공을 향해 다가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예를 갖추며 손에 오래 쥐고 있어도 땀에 미끄러지지 않는 질 좋은 장검을 고쳐 쥐었다.

이번에 대공은 무기대에서 고른 무기가 아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그가 고개를 까딱하자 자세를 잡은 세네르가 먼저 움직였다. 어차피 기절한 척하며 실려 나갈 생각이었으니 방어는 뒷전이었다. 속전속결로 이 상황을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매끄러운 바닥을 빠르게 달려간 세네르는 검을 앞으로 길게 그었다. 자신이 대공의 시선에 그대로 노출되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대공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상체로 날아들 공격을 대비했다.

카아앙.

역시나 빈틈없이 공격을 막는 대공의 검 끝이 매서웠다. 단단한 장검이 탄탄한 검신에 막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세네르의 공격을 막은 대공이 맞대어진 검을 검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 힘에 짓눌려 움직임이 막힌 세네르는 이를 꽉, 깨물었다.

“…….”

“…….”

강했다. 몹시 강했다. 대공과 검과 검을 가벼이 맞댄 것뿐이건만 맨손으로 무쇠를 내리치는 것처럼 손목에 충격이 오며 손이 덜덜 떨렸다.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거센 힘의 여파로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긴장으로 온몸이 뭉쳤고 대공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에게 자꾸만 몸이 질질 딸려 가는 것 같았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커다란 짐승 앞에 선 기분이었다. 온몸에 오한이 들며 대공에게서 물러나고만 싶었다. 그의 시선이 닿기만 해도 온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빨리 기절해도 이상하게 보이질 않을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더 이상 대공과 검을 맞댔다간 몸과 정신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대공의 검을 살짝 밀치며 뒤로 물러나던 세네르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긴장한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후우우, 긴 한숨을 내쉰 세네르는 검을 바로잡았다. 이번엔 방어적으로 대공에게 맞서기로 결심했다. 대공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 이상해 보이지 않게 기절할 수 있는 틈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 얄팍한 수를 이미 다 읽은 대공은 이번엔 검을 옆으로 돌려 잡았다. 베기나 찌르기처럼 검 끝이나 날로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검의 몸통이 세네르를 향해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그대로 검에 기운을 실어 검을 휘두르자.

파아악.

파공음이 일며 거센 돌풍처럼 인 검압이 세네르를 향해 날아왔다.

“윽.”

세네르의 발치에 검기가 거세게 부딪히자 충격으로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대공이 날린 검압이 무릎에 퍽, 부딪히자 세네르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을 맞댄 것도 아니고 멀찍이서 날리는 검의 기운에 이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었지만 세네르는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비로소 이곳이 로넨을 괴롭혔던 것을 처벌하는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압에 처음 닿은 발은 마차에 밟힌 것처럼 욱신거렸고, 무릎을 강타한 검압은 돌진하는 코끼리 떼에 치받힌 것처럼 온몸으로 충격이 번져 올라가며 덜걱거렸다.

“으윽.”

그리고 또다시 날아온 세찬 검압에 이번엔 배를 강타하자 세네르는 배를 손으로 짚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마를 바닥에 박은 채 끙끙거렸다.

대공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고꾸라진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도 못하고 시선으로만 그의 발치를 따른 세네르는 제 바로 위에서 대공의 검이 위로 향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절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겠는데?’

그래도 지금은 기절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세네르는 그대로 기절한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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