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5화 (35/198)

Chapter 35

훈련장으로 들어온 대공에게 이르텔이 인사를 하자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기를 죽 걸어 놓은 무기대로 걸음을 옮겼다.

“잘 준비해 놓았군.”

“네, 대공 전하.”

어제 장만한 무기를 꺼내 손질하던 세네르와 아슬러가 시선을 마주쳤다. 대공이 저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직관하는 건지 의아함을 내비치자 대공이 가볍게 말을 걸었다.

“경들도 입단 시험 준비를 잘 마쳤나?”

그에 긴장을 풀며 세네르가 답했다.

“네? 아, 네에에. 대공 전하의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슬러도 그를 뒤따라 입을 열었다.

“인사를 미처 드리지 못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마음에 쏙 드는 무기들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슬러와 세네르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텔론도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어제 무기를 밤새워 품에 안고 닦느라 대공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그래?”

대공이 옅게 웃으며 무기대에서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입단 시험을 시작해 볼까?”

“…….”

“…….”

“…….”

“북부 기사단의 총지휘관 아스넬 린든, 지금부터 로얄트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평가하는 시험관으로서…….”

무기대에서 커다란 창을 꺼내며 아스넬이 말을 이었다.

“경들의 앞에 선다.”

대공의 선언이 떨어지자 아슬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돌려 출구를 바라보았다.

‘하나 있는 출구를 안에서 걸어 잠근 것 같은데.’

그때 아슬러의 얼굴 옆으로 커다란 창이 빠르게 지나갔다.

‘허억.’

창대에 뺨을 스칠 뻔한 아슬러가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허공을 쌔앵 날아가 훈련장 기둥에 박힌 창이 티이잉, 소리를 내며 아래위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딜 봐, 나를 봐야지.”

얼마나 거센 힘으로 날린 건지 여전히 부르르 떨리는 창 손잡이에 침을 꿀꺽 삼킨 아슬러는 대공의 목소리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경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의심을 안 했는데 이, 이거 조짐이 이상해.’

뛰어난 검술이 아닌 미꾸라지처럼 피할 자리를 귀신같이 파악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안전한 길만 택해 온 아슬러는 온몸에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분, 분명히 이거 함정이야!’

요행만 바라며 기사 생활을 이어 온 아슬러의 머릿속으로 대공의 공격에 구겨진 종잇장처럼 데굴데굴 나가떨어지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몸을 돌린 아슬러는 달렸다. 뒤에서 헛,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발만 움직였다. 훈련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저 문만이 제가 살 수 있는 목숨 줄처럼 느껴져 마음이 급했다.

‘이대로 어제 산 무기를 챙겨 들고 헤린스 백작가를 벗어난다면 설마 이 목구멍에 거미줄이라도 치겠어? 그러잖아도 비싼 무기들을 챙겨 뒀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악.”

동시에 강력한 힘이 아슬러의 뒤를 강타했다. 힘차게 질주하던 추진력과 함께 등을 무겁게 덮치는 아픈 타격에 아슬러의 몸이 앞으로 확, 밀리더니 철퍼덕 고꾸라졌다. 그 후에도 멈추지 않고 반질반질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단단한 철목 기둥에 머리를 팅, 박고 멈췄다.

우당탕탕, 훈련장에 울리는 거친 소리에 대공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세네르의 시선이 뒤쪽 문가에 닿았다.

이 상황에 압도된 텔론은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대공이 무기대에서 순식간에 집어 들어 날린 흑단 목검을 등에 맞은 아슬러가 허공에 부웅 뜨듯이 몸이 밀리더니 데굴데굴 굴러 기절하기까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였다.

대공의 뒤에 서 있던 이르텔이 철목 기둥에 박힌 창을 빼 수습했다. 단단한 철목을 깊숙이 뚫고 들어간 창을 뽑는 이르텔의 미간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뭉툭한 흑단목검도 수거해 정리했다.

대공이 다시 무기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 미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등부터 보이니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서 말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 마물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등을 보이면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어서 이런 실수를 했지 뭔가.”

“…….”

“…….”

기절을 한 자는 말이 없었고, 세네르와 텔론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이는 명백한 내 실수이니 아슬러 경은 북부 로얄트 기사단 입단 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할까?”

이번엔 어떤 무기를 써 볼까, 고민하던 대공이 시선을 돌렸다.

“다음 로얄트 기사단의 입단 시험 응시자로는 누가 나서는 거지?”

무기를 품에 안고 있던 텔론은 작게 딸꾹질했다. 세네르는 숨을 죽인 채 분위기를 살폈다.

훈련장을 정리한 이르텔이 몸을 숙여 기절한 아슬러의 뺨을 톡, 톡 쳐 보다가 뒷덜미를 낚아채 문가로 움직였다.

세네르는 이르텔을 주시했다. 이르텔이 문을 열어 아슬러를 내밀자 밖에서 알아서 받아 챙기는 손들이 보였다.

‘……밖을 북부 기사단원들이 둘러싸고 있는 건가?’

‘쯧.’

짧게 혀를 찬 세네르가 허리춤에 찬 검을 살짝 뽑아 그 검 손잡이로 곁에 서 있는 텔론의 등을 찌르며 밀었다. 날이 선 분위기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텔론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톡, 튀어 나갔다.

“어엇.”

대공이 그런 텔론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텔론 경이 다음 시험을 볼 응시자인가?”

“아, 그, 그게 저…….”

“아니면 세네르 경과 둘이?”

대공의 시선이 텔론의 뒤로 넘어가자 세네르가 뒤로 빠지며 답했다.

“아닙니다, 텔론이 먼저 시험을 보겠습니다.”

세네르가 벽으로 바짝 붙으며 그들의 대련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대공의 시선이 세네르를 멍하니 바라보는 텔론에게 닿았다.

“그런가? 그럼 텔론 경은 검과 도끼를 사용할 것 같으니 나는 이걸로 하지.”

대공이 무기대에서 집어 든 장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손에 잘 맞아 들어가는 검이 손질이 잘되어 반지르르한 빛이 흘렀다.

“텔론 경은 그 자세가 시작 자세인가?”

“네, 네에에?”

“텔론 경이 준비되었다면 시험을 시작하지.”

저를 사냥개의 먹잇감처럼 내민 세네르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던 텔론이 시선을 돌렸다. 무기를 골라 이쪽으로 다가오는 대공은 허공에 가볍게 검을 털 때마다 어깨가 울근불근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편한 셔츠와 바지를 입었음에도 대공의 탄탄한 몸 선은 가려지지 않았다. 텔론이 옷소매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툭, 불거진 힘줄에조차도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깨를 추욱, 늘어트린 텔론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세네르 대장이 나와 대공의 대련을 보고 약점을 찾아보려는 것 같은데.’

이거 완전 실패가 눈에 뻔히 보이는 수 아닌가? 내가 대공을 상대로 몇 합이나 견딜 수 있다고…….

손에 쥔 무기가 버겁게 느껴진 텔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대공이 장검 끝으로 도끼의 끝을 가볍게 톡, 톡 쳐 왔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손끝이 지잉, 울리며 텔론의 손이 잘게 떨렸다.

‘……굳이 검을 맞대 보지 않아도 실력 차가 이리 극명하게 나는데.’

“아니면 해 보지도 않고 백기를 드는 건가?”

텔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여기서 백기를 든다면 훈련장 밖으로 그냥 나갈 수 있게 해 줄까?’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는 훈련장 문을 확인한 텔론은 등을 보였다가 혼쭐이 난 아슬러가 퍼뜩 떠올랐다. 얼른 고개를 바로 해 대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분명히 온화했으나 냉철함이 서린 대공의 시선을 읽었다.

‘아니, 그냥 나갈 수 있게 길을 터 줄 분위기가 아니야.’

그렇다면.

텔론은 양손의 무기를 바로 쥐었다. 무서웠지만, 평소 선망의 대상이었던 북부 로얄트 기사단의 최고 정점인 대공과 검을 맞댈 수 있는 기회였으니 한번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이길 순 없겠지만 뒤꽁무니 빼는 모습은 보여 주진 말자 이거야.’

가볍게 톡, 톡 도끼 끝을 쳐 오는 장검을 살짝 쳐 내자 대공이 뒤로 물러났다. 텔론은 기사의 예를 갖추며 대공에게 인사를 했다.

그것을 신호로 대결이 시작되었다.

텔론은 양손에 쥔 검과 손도끼를 번갈아 휘두르며 대공과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 공격 의도를 알아챈 대공이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에 쥔 무기가 지나가는 속도와 궤적을 감각적으로 파악한 대공이 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끝이 텔론의 목젖 바로 아래에 닿았다.

텔론의 등 뒤로 한기가 돌았다. 한 끗 차이, 정말로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 내쉰 텔론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공을 올려다보다가 뒤로 살짝 빠졌다. 그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생각했다.

‘방, 방금 정말로 대공의 움직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충분히 찌르거나 벨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고…… 그렇다면 목숨을 위협할 생각은 없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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