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
“이번 북부 로얄트 기사단의 입단 시험은 한 명의 시험관을 통해 점수가 매겨진다. 대련 방식의 시험이며 셋이 한꺼번에 시험관과 대결해도 좋고 차례를 정해 한 명씩, 혹은 두 명씩 대결해도 좋다.”
세네르는 이르텔의 말을 곱씹었다.
‘셋이 덤벼도 좋고 차례를 정해 공격해도 된다고?’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닌가? 대공이 입단 시험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점수제라면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시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대결하면 합격하게 해 주겠다는 건가?
세네르는 무기를 손질했다. 그 옆으로 슬렁슬렁 다가온 아슬러도 히죽 웃으며 새로 장만한 무기를 닦았다.
그때 고요해진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세네르와 아슬러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럼 준비되었나.”
무기를 손질하던 텔론의 손길이 뚝, 멈췄다.
낮고 그윽하게 연무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지금 상황과 맞지 않다 싶었다.
훈련장 안으로 들어선 이는 아스넬 대공이었다.
* * *
연무장 안으로 들어선 아스넬을 바라보는 텔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대공께서 여기에 왜 오셨지? 형식적인 입단 시험이라 직관은 안 할 것 같았는데. 우리가 실력 쟁쟁한 기사들도 아니고…….’
대공이 세네르와 아슬러, 자신을 불러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대공 전하? 저희에게 북부 기사단 로얄트의 입단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니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씀도요?〉
대공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경들이 헤린스 백작가에 계속 있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북부 기사단에 입단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지.〉
온화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여유롭고 한가한 헤린스 백작가의 분위기와 달리 북부 기사단의 생활은 딱딱하고 거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요 며칠 헤린스 백작가에서 지내는 북부 기사단원들을 보면 알 거야.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헤린스 백작가의 분위기가 여유롭고 한가하다니?
그건 그냥 얼렁뚱땅 되는대로 굴러가는 것에 불과하지.
그리고 텔론은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발을 까딱이는 자유분방한 북부 기사들도 기사들이었지만 그 옆에 내려놓은 경량 갑옷과 신발이 너무 부러웠다.
경량 갑옷은 정식 갑옷에 비해 금속을 덜 쓰거나 압축해서 가벼웠다. 묶고 채워야 할 버클도 많아 신경 쓸 것이 많은 정식 갑옷에 비해 모양새가 단출했고 움직이기 용이했다.
하지만 경량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압축 금속을 사용하거나 정제된 마법을 덧씌워 만들었는데 어떤 방식의 경량 갑옷이든 몹시 비쌌고 귀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 갑옷을 고위 기사부터 말단 종자까지 입고 있는 북부 기사단원들을 보자 텔론의 눈이 핑핑 돌아갔다.
무기와 방어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텔론은 북부 기사단원들의 경량 갑옷이 정제된 마법으로 덧입혀져 깃털처럼 가볍고 바위처럼 탄탄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래서 북부 기사단원들이 경량 갑옷을 몸에서 떼어 낼 때마다 손으로 만져 보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몰랐다.
참된 기사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는데 웃기는 말이었다.
자고로 기사란 어깨에는 금빛 자수가 놓인 휘장이 뒤덮여 있고 손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무기가 들려 있어야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기사더라도 몸엔 찢어진 헝겊을 걸치고 손에 날이 빠진 페이퍼 나이프가 들려 있어 봐라. 누가 기사 취급해 주나. 비렁뱅이로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지원을 제대로 받아 본 이들이나 그런 말들을 내뱉는 거였다.
헤린스 백작가에서는 날이 무뎌진 검을 하나 바꾸는 데에도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급 기사의 급료로는 광이 번지르르 나는 무기가 뭘까. 기본에 충실한 검과 방어구를 장만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리고 기존 기사들과 동일하게 지원할 생각이지.〉
입술을 삐죽이며 구두쇠인 집사 케릴과 입씨름했던 지난날을 상기하던 텔론은 대공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북부 기사와 동일하게 지원이라니, 그렇다면 북부 기사단이 지닌 무기들과 방어구도 지원해 준다는 건가?’
눈이 동그래진 텔론을 힐끗, 바라본 세네르가 말했다.
〈지원이라면 어떤 지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부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큰 무기점이 락 무기점이라고 하더군.〉
〈……락 무기점이라면.〉
〈경들이 북부 기사단에 입단하겠다는 의사만 확고하다면 그곳에서 무기를 장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내가 경들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니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주겠네. 락 무기점은 유서 깊은 무기가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경들을 위해 그 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고 일러두지.〉
〈그, 그럼 4층에도 올라가 볼 수 있는 건가요?!〉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텔론이 입을 열자 옆에서 아슬러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나 아슬러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매를 감추지 못했다.
‘……로넨에게 그리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구박을 하면 구박했지.
목검을 드는 자세가 틀렸다며 호통쳤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자신이 올 때까지 치고 있으라고 하고 잊어버려 방치한 적도 있었다.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자 텔론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슴에 콕콕 찔리는 로넨과의 과거사를 되새겨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해 줄 걸 그랬네.’
또렷한 남보라색 눈동자가 저를 향한 채 질문을 할 때마다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무시했던 일이 생각나자 텔론은 입 안이 씁쓸했다.
그러나 티끌만 한 죄책감은 곧 자기 합리화로 귀결되었다.
‘그래도 세네르 대장이나 아슬러보다는 내가 훨씬 잘해 줬지.’
세네르 대장과 아슬러는 걸핏하면 목검으로 로넨의 머리통을 내리치며 정신 차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검술을 훈련할 때 긴장을 내려놓으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고로 그런 상황에서는 원래 정신을 차리라며 큰 소리가 나고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찔릴 것도 없지.
그걸 아니까 로넨도 대공께 우리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거고…… 아니, 사실 이미 말한 상태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공도 기사의 훈련 상황을 모르지 않으니 별말 없는 걸지도 모른다. 같은 기사로서 충분히 눈 감고 넘어갈 수 있는 일 아니던가.
그 증거로 기품 있고 온화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대공의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목소리는 온유했고 나긋나긋했다.
악의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점잖은 태도는 이쪽에 길이 있으니 헤매지 말라고 앞을 밝히는 등대 같았다.
〈물론이지, 나는 헤린스 백작가에 진심으로 보은을 하고 북부로 떠날 예정이야. 로넨을 다시 만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으니…… 그러니 경들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부담스러워할 것 없이 말하도록 해.〉
북부 기사단의 입단 시험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준비해 주다니…… 텔론은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기사단 입단 시험의 종목과 시험관도 말이 나오지 않도록 구색을 맞춰 준비할 테니.〉
1년의 절반은 추운 겨울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보다 추운 겨울인 북부를 지키는 로얄트 기사단.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에겐 명예와 긍지가 있었다.
마물로부터 북방 사람들을 보호하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끈기와 인내로 결국 파훼하는 일화들에서 텔론은 인간적인 승리의 면모를 느꼈다. 로얄트 기사단에는 뜨겁게 피를 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다니?!’
물론, 북부 기사단에 입단한다 해도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진 않겠지만 아스넬 대공이 지휘하는 로얄트 기사단원들과 제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입단 지원서에 서명을 휘갈겼다.
한가로운 한낮의 대화를 상기하던 텔론은 훈련장에 들어선 대공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 아무래도 대공께서 입단 시험을 구경하러 오신 것 같지?’
설마 우리 같은 하급 기사들의 입단 시험을 직접 보러 오실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대공이 대련으로 준비된 시험을 관람한다고 생각하니 텔론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었다.
‘아씨, 대공께 어설픈 내 검술 실력이 탄로 나면 어떡하지? 북부 기사단에 비하면 진짜 보잘것이 없는데.’
텔론은 주위를 살피며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관은 왜 아직도 보이질 않는 거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대비라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