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2화 (32/198)

Chapter 32

월요일 오전, 남부 일간지에 이자르 의상실에 대한 소식이 실렸다.

“에드, 지난 주말에 이자르 의상실에 불이 났대.”

“그렇습니까?”

에드는 로넨과 정원 한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응, 불길이 엄청 거셌나 봐. 다행히 불길이 금방 잡혔다고 기사가 났어.”

“네, 정말 다행입니다.”

에드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일로 남부 중앙 경비대 대장이 이자르 의상실의 수상한 점을 발견해 상부에 보고하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아, 로넨 도련님! 에드!”

봄볕 아래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쪽 끝에서 소년 하나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정원사 지오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심심해서.”

에드의 곁으로 달려온 지오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북부 사람들이 내 일을 다 가져가서 할 일이 없어졌어.”

“무슨 일을 하는데?”

옆구리에 블록 게임을 끼고 있던 지오가 아! 하며 대답했다.

“아! 그게요. 도련님. 헤린스 백작가에는 훈련장으로 쓸 만한 곳이 없다고 동쪽 정원을 밀어 버리더라고요?”

“훈련장?”

“네, 훈련을 안 하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한지 북부 기사들이 어제부터 땅을 파고 다지고 흙을 퍼 나르나 했더니 오늘은 입구에 커다란 막사가 떡하니 올라가더라고요. 지금까지 보여 준 힘과 속도를 보면 산 하나도 뚝딱 만들겠던데요?”

음, 막사라면 세네르와 그의 부하들에게 북부의 쓴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시동을 거는 모양이었다.

지오는 에드가 헤린스 백작가에 취업하기 전부터 별관에서 지내는 로넨에게 큰 힘이 된 사람이었다.

로넨이 감금당했을 때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 물과 음식을 창턱에 놓아두었다. 혼이 나 풀이 죽었을 땐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네이센이나 집사에게 걸리면 혼이 나곤 했다. 하지만 지오는 혼이 난 뒤에도 자신의 방식으로 로넨을 보살폈다.

그건 지오의 용기와 소신이었다.

그리고 세나의 용기와 소신이, 에린의 용기와 소신이 지금의 로넨이 있을 수 있게 한 힘이었다.

‘그러니 나도 더 노력해야지. 내 위치에서 알맞게.’

에드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로넨이 생크림이 듬뿍 든 슈를 에드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지오에게 건넸다.

따사로운 햇살이 로넨과 지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 *

“어서 오십시오, 락 무기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검은 용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가게 앞으로 들어서자 무기점에서 직원이 나와 인사를 했다.

“여기가 남부에서 가장 큰 무기점인가?”

“네, 그렇습니다.”

마차에서 나온 이르텔이 묻자 그의 뒤를 따라 내리던 세네르가 답했다.

남부 무기 상점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큰 가게였다. 수련용 목검에서부터 희귀한 마정석이 달린 무기까지 취급하는 종류가 다양했고 폭도 넓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르텔이 움직이자 세네르가 빠른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굳게 닫힌 무기점의 4층을 북부 대공의 권위로 올라갈 수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귀족 중에서도 명망 있는 귀족이나 이름값 높은 기사의 방문이 아니라면 쉽게 문이 열리지 않는 락 무기점의 4층이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아래층들과 달리 입구 경비부터 삼엄했다.

“세네르 대장, 락 무기점의 4층은 이렇게 생겼었군요?”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아무리 아래층에서 기웃거려 봐도 4층 문조차 엿보기가 어려웠는데 이렇게 들어와 무기를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은데요?”

소곤거리며 즐거워하는 부하들의 목소리에 세네르는 벽에 걸린 무기들로 시선을 줬다.

‘하여튼 시끄럽다니까.’

복작복작하게 무기가 진열되어 있는 아래층들과 달리 무기점 4층은 공간 사이를 널찍하게 유지했다. 귀족들을 위한 장식용 무구도 많았기에 언뜻 보기에 무기를 모아놓은 게 아니라 예술품을 전시한 것 같기도 했다.

락 무기점에서 고객들이 무기를 직접 손에 쥐어 보며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대장, 진짜 미쳤는데요? 이건 핑크 다이아몬드 아닙니까? 다이아몬드를 이런 단검에 박아 넣다니 이게 무슨 지랄이래요?”

세네르의 부하인 아슬러와 텔론은 세네르의 뒤에 졸졸 따라붙으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세네르는 속으로 웃었다.

가세가 기울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헤린스 백작가의 기사로 입단했을 때부터, 그는 별 기대가 없었다.

기사단을 운영할 자금이 모자라 기사단이 반으로 줄고 다시 반으로 주는 과정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호위의 명분만 남아 서너 명으로 굴러가는 것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호위대장을 맡게 되었을 때도 이 작은 규모로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으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백작이 사내아이까지 입양하니 세네르는 이맛살을 구겼다.

그 돈으로 기사단이나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데 돈을 쓰는 게 우스웠다.

잿빛 머리카락에 남보라색 눈동자.

로넨을 처음 보았을 때 재투성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 첫인상과 달리 뽀얀 얼굴과 생기가 도는 눈동자는 세상의 때를 타지 않아 맑고 순했지만. 천진하다 못해 순진한 성격은 독기가 없어 말랑말랑하기만 했다.

네이센 소백작은 글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는 로넨이 백작저에 들어서자마자 심술을 부렸다. 머리에 묻은 구정물이 지워지지 않았다며 목욕탕에 데려가 씻기고 소독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가 좋아하는 게 있기는 하던가. 돈을 제외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만인 것을.

처음엔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했던 세네르도 네이센이 로넨을 대하는 태도에 점차 동조했다.

헤린스 백작 부부는 로넨에게 관심이 없었고 세상 물정에 무지했다.

그들은 멍청하게도 기사단에서 급료가 높은 기사단원부터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충 경력만 채운 이들이 자리를 차지한, 명맥도 실력도 완전히 무너진 기사단에서 헤린스 백작가의 호위를 맡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로넨의 검술 교육까지 맡으라 하는 상황이 세네르는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곤히 잠든 로넨의 이불에 물을 붓고 조금만 잘못해도 질타한 것은.

아이가 무서워 벌벌 떨며 울기를 바랐다. 작은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기를 원했다. 백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지내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남들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로넨을 입양한 백작이 파양을 고려할 게 분명했다.

물론, 헤린스 백작은 다른 귀족들이 하는 일에 제가 빠질 순 없었으니 다시 입양을 추진할 게 뻔했고. 그럼 이번엔 여자애를 데려오라고 조언하면 좋을 터였다. 손이 덜 가고 검술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으니.

명망 없는 백작가에서 몇 년을 일하는 동안 세네르가 이직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미한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집을 떠날 때만 해도 검으로 세상을 호령하며 이름을 드날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고 능력 있는 기사들은 많았다. 제 검술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었으나 남들 눈에 띌 만큼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러니 헤린스 백작가에서 적당히 일하며 돈이나 받을 생각이었단 말이지.’

헤린스 백작가를 빈틈없이 지키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늙다리 단장만 해도 정원에 나와 햇볕을 쬐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월급을 받아 가지 않던가.

‘……그런데 로넨이 북부 대공인 아스넬 린든의 동생이었을 줄이야.’

북부 대공이 친동생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북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린 동생과 헤어졌다던데 이름도, 진명도, 생김새도, 특이사항도 사람마다 다 말이 다르고 이리저리 뒤섞여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로넨이라는 이름도 드물지 않았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대공과 완전히 달라 생각지도 못했건만 그런 대어였을 줄이야.’

로넨에겐 관심이 없어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백작가의 호적에도 올리지 않은 헤린스 백작 부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공과 로넨의 사이가 밝혀졌을 때 세네르는 숨을 죽이며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로넨에게 잘해 준 것 없이 부아만 터뜨렸으니 제 발이 저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이 가고 또 가도 대공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라앉는 일이 없는 걸 확인한 세네르는 비죽이 웃었다.

‘순하고 말갛다 못해 어벙하더니.’

로넨은 제가 괴롭혔다는 것도 잊어 먹은 것 같았다.

하긴 뭐, 다 저 잘되라고 한 말이고 행동이었다.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살아 봐야 타인에게 뒤통수나 맞기에 좋을 뿐.

혹여 대공의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할 말이 있었다.

척박한 북부에서 기반을 다지고 반석을 세운 대공이니 기사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완력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로넨에게 했던 일들도 그를 알려 주려는 의도였다고 잘 버무리면 큰 탈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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