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1화 (31/198)

Chapter 31

어느새 초봄의 문턱을 완전히 넘은 남부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따스해졌다.

“……제국은 말입니다, 도련님.”

‘그리고 나는 왜 주말 오전부터 재미없는 수업을 듣고 있는 걸까?’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로넨이 수업을 같이 듣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가정교사인 펠릭은 현재 로넨의 방에서 칠판에 지도와 모형을 갖다 놓고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있었다.

‘평소엔 책이나 던져 주며 읽으라 하고 딴짓을 했을 텐데.’

걸핏하면 수업을 미루기 일쑤였고 진도는 숙제로 빼려고 꼼수를 부렸다. 아니, 그럴 거면 가정교사를 왜 두겠는가? 독학을 하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르텔이나 제이논에게 말해 창밖에 매달아 버리고 싶었지만 로넨이 너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수업을 듣고 있었다. 며칠 후면 헤린스 백작가를 떠나 황실로 가게 되어 저택 전체가 어수선한데 공부를 하는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시선을 내린 에드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노트를 적어 나갔다.

헤린스 백작 부부 – ○ △

헤린스 소백작 네이센 – ○ △

엘리사 셀튼 – ○ △

이자르 의상실 부부 – ○

집사 케릴 – ○

입주 가정교사 펠릭 – ○

검술 기사 세네르 – ○

세네르 부하1 아슬러 – ○

세네르 부하2 텔론 – ○

주방장 지멘스 – ○

하인 벤스 – ○

하녀 안나 – ○

마부 메튜 – ○@

보육원 원장 – ○@

로넨 도련님께 호의적이었던 사람 :

하녀 – 세나

주방 보조 – 에린

정원사 – 지오

기사 단장 – 테일러 (그냥 관심이 없음.)

“수업 재미없어? 뭘 그렇게 열심히 그려?”

에드가 한글로 적은 노트를 내려다보며 로넨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에드가 노트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답하자 로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겨우면 그만할까?”

“아닙니다. 진도 나가야죠.”

평일엔 평일이라서 주말이면 주말이라서 강의를 내팽개쳤던 펠릭이었으니 수업 진도가 주말의 대한민국 고속 도로처럼 꽉 막혀 있을 터였다.

“그럼 다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쉬기로 했는지 물을 마시며 책장을 넘기던 펠릭이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에드는 턱을 괸 채 다시 생각했다.

△는 대공이 투자를 마쳤다는 뜻이었고 ○는 계약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이름에 밑줄을 친 이들은 적당히 손봐 줬다는 뜻이었고.

‘집사는 버티고 버티다가 맨 마지막에 사인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이논이 쉽게 계약서를 따왔다. 소백작에게 걸린 장신구와 노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주방에 내려가서 주방장을 적당히 손봐 줄까?’

여전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에드는 노트에 낙서를 끄적였다.

그때 똑, 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목청을 높이며 열띤 강의를 하던 펠릭이 미간을 찌푸렸고 에드는 뭔가 싶어서 목을 뺐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제이논이었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펠릭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께 중요한 내용의 편지가 온 것 같아서요.”

“뭔데 그러십니까?”

제이논에게서 받은 흰 봉투에 붉은 인장이 찍힌 편지를 펠릭이 그 자리에서 확인하더니 표정이 쩍, 굳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트를 앞으로 넘긴 에드는 펠릭의 이름에 밑줄을 쫙 그었다.

논문 표절 관련 이슈가 있으니 소명하라는 편지일 터였다.

“펠릭 선생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표정이 안 좋던데.”

주방으로 내려가는 동안 로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펠릭을 걱정했다.

“그러게요, 도련님.”

남부 중소 상단의 차남으로 태어난 펠릭은 노력보다는 꼼수로, 실력보다는 돈으로 학위를 땄다. 박사 학위를 딸 때는 표절도 했다.

원작의 짧은 외전에서 나온 내용이라서 에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상단을 통해 구한 고대 책자를 그대로 베껴서 학위를 딴 것이었다. 그러니 그 책만 찾으면 되었는데…… 짤막하게 나온 책의 제목까지 기억할 리가 있나.

그래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표지에 붙은 청박 문양의 설명을 들은 제이논이 아! 하며 책의 제목을 기억해 냈다. 북부 제3 서고 2층 고대 연구 부문 오른쪽 책장 5번째 선반에 꽂혀 있는 남자주색 표지라면서.

‘뭐, 뭐지? 너무 무서운데?’

그 책의 어떤 부분이 궁금하냐며 말갛게 웃는 제이논을 보며 입을 꾹 다문 에드는 생각했다. 다시는 제이논을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책의 제목을 알아낸 에드는 아카데미에 편지를 보냈다. 고대의 연구 기록이 담긴 책 제목과 펠릭의 논문에 표절에 대한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내면서도 시일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최근에 대학자들의 논문 표절이나 제자들의 성과를 훔쳤다는 보도가 있어서 그런지 조치가 빨랐다.

논문을 다시 확인하겠다는 내용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반려 당하면 북부에 가서 책을 필사해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런 수고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펠릭은 이를 소명하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터였다. 학위 취소의 가능성도 높았고.

소설 원작을 보면 학위를 따는 게 쉽지 않았다. 돈을 쏟아부어도 적어도 5년 이상 교수들의 노예……나 다름없는 수족이 되어서 굴려진다고 했으니.

‘자업자득이란 게 이런 거구나.’

에드는 로넨과 주방에 들어섰다.

주방은 점심시간이 코앞이라 그런지 바빴다.

“아, 로넨 도련님! 에드! 안녕하세요. 공부 열심히 하셨어요?”

북부 성의 주방장인 쿠안이 로넨을 발견하자마자 인사를 했다. 그러자 주방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도 로넨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좋은 주말입니다! 로넨 도련님! 에드!”

넓은 주방이 각자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원래 헤린스 백작저의 주방은 주방장 지멘스와 주방 보조인 에린 이 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부족한 인력은 하인과 하녀들이 돌아가면서 메웠기 때문에 주방은 항상 허술하고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대공이 데리고 온 북부의 주방 인력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자 그들 중심으로 지휘 계층이 재정립되었다.

“수리 부주방장님, 이 잼은 그만 졸여도 될까요? 주걱에 이 정도로 묻어나는데요?”

“아니야, 에린. 푸른 산딸기는 뜨거울 때 오히려 굳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덩어리가 질 정도로 졸여야 해.”

“아, 그렇군요.”

백작가의 주방 보조였던 에린은 북부의 부주방장에게 딱 붙어 조언을 들으며 노트에 레시피를 꼼꼼히 적었다.

지멘스가 주방을 호령했을 땐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물론, 주방은 바쁘고 일손은 부족하고 할 일이 많아서 정신을 차리라고 호되게 굴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멘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지멘스는 주방 사정보다는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빴으니까.

그는 주로 질 좋은 식료품을 싼 식료품으로 바꿔 수익을 챙겼는데, 제 곁에 착 달라붙어서 질문을 하는 에린이 오고부터 그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그 때문에 에린을 괴롭히면서 일을 그만두길 원했지만,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 뚝심 있게 버텼다.

아니, 주눅 들긴커녕 되레 로넨의 음식에 장난치는 지멘스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건 상했으니 폐기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치즈처럼 쓰는 건가요? 음식에 넣는 건가요? 아니면 장식을 하려고 쓰는 건가요?〉

그러면 지멘스는 슬그머니 상한 재료를 폐기하고 자리를 떴다.

로넨이 감금당할 때마다 주방 구석 테이블에 먹을 것을 올려 두는 것도 에린이었다. 덕분에 에드는 어렵지 않게 음식을 챙겨서 로넨에게 가져갈 수 있었다.

에드는 주방 한구석에서 매운 고추를 다듬는 지멘스를 바라보았다.

지맨스는 백작가에 들어온 북부 주방장을 이겨 보겠다고 악착같이 달려들다가 화롯불에 기름을 쏟은 이후로 주방 보조로 지위가 하락한 상태였다.

‘자존심상 사표를 쓰고 싶겠지만 그러긴 어렵겠지.’

대공이 내민 계약서의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았으니. 주방에 붙어 있기만 하면 받던 월급의 10배를 준다고 했다.

에드는 주방에 다 들리게 외쳤다.

“쿠안 주방장님.”

빵 만드는 걸 보여 주려고 로넨을 이끌던 북부 주방장이 뒤로 돌았다.

“오늘 저녁엔 양파 수프와 양파 튀김, 양파 절임과 양파 볶음을 먹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에드의 입에서 양파, 소리가 나오자마자 지멘스가 에드를 노려보았다.

그에 쿠안 주방장의 시선이 주방 한구석으로 닿자 에드를 노려보던 지멘스의 시선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동시에 양파를 든 듬직한 이들이 나타났다.

지멘스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매운 고추를 손질하느라 눈이 맵고 손이 홧홧할 텐데 양파 더미까지 추가라니 당장 사표를 쓰고 싶으리라.

이곳의 양파는 손질이 까다로웠다. 물에 적신다 해도 맵고 껍질을 까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익히면 한국의 양파보다 속살은 엄청 부드럽고 달콤하니 맛이 좋았다.

“에취, 에취, 에 에취.”

지멘스가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

“힘들면 그만둬도 되는데.”

양파 부대를 이끈 부주방장이 그를 보며 말하자 지멘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북부에서 온 인력들이 여기에 더 있어 봤자 며칠 내외, 겨우 이런 일에 사표를 낼 순 없었다.

고급 식재료를 빼돌리기에 헤린스 백작가만큼 좋은 곳이 없었고 조금만 버티면 대공이 약속한 돈도 받을 수 있었다. 자존심이 뭐 별거라고?

지멘스가 양파를 끌어다가 손질을 시작했다. 에취, 에취 기침을 하면서.

“그럼, 갈까요? 도련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최근에 부드러운 빵 반죽을 눌러 보는데 재미를 붙인 로넨을 앞세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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