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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0화 (30/198)

Chapter 30

에드가 눈을 뜬 것은 해가 환하게 떠오른 아침이었다. 푹 자고 일어나 머리가 맑았다. 와인을 마시고 자서 숙취가 있을 줄 알았는데 부드럽게 올라가는 눈꺼풀에 기분이 좋아진 에드는 누운 채로 몸을 길게 펴 보았다.

온몸이 가벼워 폭신폭신한 구름에 누운 기분이었다.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에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끝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헉, 뭐, 뭐지?’

단단하면서 딱딱한 이 느낌은?

백작가 본관 3층 방의 너른 침대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에드는 끼이익, 녹슨 로봇처럼 고개를 돌렸다. 침대 구석에서 자고 있던지라 누군가가 곁에 있을 거라 예상치 못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뭐, 뭐야?’

대공이 왜 여, 여기에서 자고 있어?

깜짝 놀란 에드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언뜻 보면 침대를 반으로 똑 갈라 오른쪽은 대공이, 왼쪽은 에드가 나눠 쓰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이불이며 베개며 다 대공 쪽으로 날아가 있었다. 대공은 최대한 에드에게 붙지 않으려는 것처럼 널따란 침대 끄트머리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불편하지 않으신가?’

제가 부산스럽게 굴다가 피곤한 대공을 깨우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혹시라도 잠에서 덜 깬 그가 침대 밑으로 툭, 떨어져서도 곤란했고.

에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를 빙 돌아 대공이 누워 있는 자리 쪽으로 갔다. 끄으응, 팔짱을 낀 채 고민이 깊어졌다.

‘대공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깊게 잠든 대공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며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어제 제이논과 술을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났다. 소리소문없이 들어와 있던 대공이 제이논의 정수리로 손날을 내리찍은 것까지도 기억이 났다.

그다음이 좀 긴가민가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발로 침대에 온 것 같은데 대공은 대체 언제 내 옆에서 잠든 걸까?

제이논과 술잔을 맞대던 중반부까지는 괜찮았는데 막판에는 완전히 취했다.

‘빙의를 한 후 처음으로 입에 댄 술이라 좋다고 너무 마시긴 했어.’

에드는 깊이 반성했다. 다시는 절대 그렇게 마시지 말아야지.

그 순간 대공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맑고 청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에드에게로 향했다. 혹시라도 대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어쩔까 싶어 온 신경을 쏟아붓던 에드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잤어요? 에드?”

“……아, 네. 대공 전하.”

“그래요?”

그렇게 묻는 대공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호선을 그렸다.

“나는 잘 못 잤는데.”

그러더니 곁에 있던 에드의 허리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방금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이었다. 그 힘에 버틸 새도 없이 딸려간 에드는 으헉, 대공의 몸을 가로질러 엎어졌다.

대공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에드는 당연히 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바동거렸다. 그러나 강한 힘으로 에드를 침대 위로 끌어 올린 대공은 이불로 그를 돌돌 감쌌다.

“그러니까 자꾸 이불 차지 말고.”

잠결이 스민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대공의 말끝이 살짝 늘어졌다.

“조금 더 자자.”

그리고 에드의 정수리에 턱을 괴며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대공의 바디 필로우가 된 에드는 숨을 죽였다. 정수리에 닿은 대공의 턱이 말도 못 하게 생생하고 딱딱했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로도, 숙취도 없었으나 불면에 빠진 밤처럼 에드의 이마로 열이 올랐다. 대공의 보드라운 숨결이 머리에서 느껴지자 에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꿈같은 환한 날이었다.

“에드, 재미없어?”

테이블 앞에 서서 멍하니 있던 에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로넨 도련님.”

에드가 현재 있는 곳은 정원 한구석에 만들어진 야외 주방이었다. 텐스가 로넨을 위해서 만든 자리였다.

에드가 독에 중독된 이후 로넨은 틈틈이 주방에 내려가서 음식이 조리되는 과정을 살폈다. 이것도 궁금해하고 저것도 간섭하며 주방을 떠날 줄을 몰랐다.

그걸 안 텐스가 쿠키를 만들자면서 로넨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쿠키를 만드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텐스가 미리 반죽을 준비해 뒀고 로넨과 에드는 손만 움직이면 되었다.

그런데 그 쉬운 일을 하면서도 에드는 손을 멈추고 딴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아까 오전에 저를 끌어안고 잠이 든 대공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에드를 베개 삼아 잠이 든 대공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깊은 잠에 빠졌다. 에드는 그런 대공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대공은 어깨에 많은 짐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제는 전투도 있었다. 대공은 이 정도의 전투는 하나도 힘이 들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걸었으나 그의 손끝을 물들인 검은 흔적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대공에게도 휴식이 필요해.’

원작에서도, 이곳 백작 저에 와서도 대공이 그렇게 온몸을 편하게 늘어뜨리고 깊은 잠에 빠지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임을 멈춘 에드는 대공의 보드라운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일 때마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덜걱거렸다.

대공은 정오의 햇살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때에서야 눈을 떴다. 말갛고 청아한 눈동자가 얼마나 꿀 같은 단잠을 자고 일어났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대공에게 갇혔던 에드는 가뿐하게 일어났던 보람도 없이 목은 결리고 정신은 멍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에드를 끌어안고 잠들었던 대공은 반짝반짝한 미소를 흩뿌리며 에드와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마친 뒤에 차도 함께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온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나만 이렇게 대공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가.’

대공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일에.

쿠키 반죽을 주물럭거리는 에드의 고민이 깊어졌다.

“로넨 도련님! 이건 고양이 모양의 쿠키인가요?”

그리고 감정 묘사가 풍부한 텐스는 로넨의 자존감을 높이기에 최고였다.

“저번에 마차를 탔을 때 들고양이가 사사삭 지나갔다고 해서 상상으로 만들어 봤어.”

“너무 귀엽습니다!”

그리고 집중하지 못하는 에드의 산만한 정신머리를 잡기에도 좋았고.

텐스가 물개박수를 치며 칭찬을 쏟아 내자 로넨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쿠키 반죽을 만지작거리다가 또 고양이를 만들었다.

텐스의 활기찬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에드도 쿠키 만들기에 집중했다.

“와! 로넨 도련님! 이번엔 아기 고양인가요? 작으니까 더 귀엽네요!”

로넨이 또다시 쿠키 반죽을 만지작거렸다. 뺨과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였다.

금세 고양이 동산이 만들어졌다. 아빠 고양이, 엄마 고양이, 아기 고양이…… 에드의 쿠키 판까지 침범한 고양이 가족이었다.

* * *

백작가 서재는 활기차고 분주하게 돌아갔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일어난 대공이 보고나 빠른 일 처리를 요구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의 컨디션이 지나치게 좋아 보이자 그의 부하들이 알아서 일거리를 가져와 대공 앞에 모여들었다.

균열의 틈에서 힘을 쓰고 나면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기 마련인 대공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매끄러운 얼굴은 윤기가 흘렀고 붉은 눈동자에는 온화한 빛이 깃들었다. 차를 마시는 입가엔 미미한 미소가 흘렀고 부관을 바라보는 모습에는 인자함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일의 처리가 어수선하면 지체 없이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들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 건은 노아가 처리하고 대신 일정은 조금 더 앞당기도록 하지.”

말투는 둥글둥글했고 일을 처리해 가는 과정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이 앞다투어 대공에게 달려왔다. 이럴 때 일을 잘못해 혼이 나도 덜 아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온화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스넬 대공 전하. 황실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이르텔이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며 서재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서재 앞에 줄지어 있던 부하들을 내보낸 이르텔은 대공에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대공은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있을 축하연에 로넨 도련님이 친동생인 증거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대공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황실에서 당연히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격의 없이 술자리를 가지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예상 밖의 내용이라 이르텔을 올려다보았다.

“딱딱하고 지루한 황제와 신의 깊은 신하의 관계가 아닌 피를 나눈 사촌으로서, 친애하는 벗으로서 말입니다.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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