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9화 (29/198)

Chapter 29

‘편지라 함은 내가 보육원의 인장을 찍어서 보낸 편지를 말하는 것이겠지?’

에드는 제이논을 바라보았다.

“대공께서 동생을 찾는다는 소식은 너무 널리 퍼져 있고, 그래서 하루에 들어오는 소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되었죠.”

“…….”

“후원을 바라는 보육원에서도 검은 머리카락 아이가 있다며 연락하고, 깊은 산골에 사는 약초꾼도 대공의 동생을 본 게 틀림없다며 대필로 편지를 하루에 몇 통씩 보내기도 했죠.”

“…….”

“그런데 그중에서 로넨 도련님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황족의 진명은 다른 이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으니까. 로넨 도련님도 그랬죠.”

에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이들의 진명은 함부로 발설되지 않았다. 안다고 해도 아무나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성인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가족과 믿을 수 있는 주변인들 외에는 알지 못했고 비밀처럼 다뤄지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황실의 농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도련님의 본명을 정확히 내세우는 이가 없었기에 도련님의 진명을 아는 황실에서 대공과 비슷한 아이를 데려다 놓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

대공을 향한 황실의 열등감과 치사한 짓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공의 약점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치욕을 안겨 주고 싶어 했으니까.

“제가 편지를 보낸 보육원에 연락해서 알아봤을 때도 그랬거든요. 보육원의 인장은 맞지만 원장이 보낸 게 아니라 개인이 보낸 거라고…… 그래서 누군가가 장난을 칠 목적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이논이 머리를 깊게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에드.”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아니, 뭐 제이논의 입장에서는 의문이 들 수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일찍 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자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되었고…… 에드는 아무 말 없이 와인 병을 들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텁텁한 분위기를 푸는데 소맥만 한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련하기 어려웠으니 에드는 잔에 와인을 콸콸 따라 부었다.

“한 번에 마시는 겁니다.”

“이 많은 걸 한 번에 마신다고요?”

“이럴 때는 원래 이렇게 해야 해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그리고 한 번에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에드는 제이논의 잔에 잔을 맞댔다. 잔과 잔이 맞닿아 울리는 소리가 청량했다.

에드와 제이논은 제법 빠른 속도로 와인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달고 씁쓰름했다.

에드는 자신과 제이논의 빈 잔에 와인을 다시 따랐다. 또다시 잔과 잔을 맞대고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짠, 짠 잔이 맞닿는 소리가 분위기를 돋웠다. 와인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와인이 다시 잔에 채워지는 것도, 와인 잔이 비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둘은 그걸로 만취 상태가 되었다.

제이논은 원래부터 술이 약했고 에드는 빙의해서 처음 입에 대는 술이라 에드 본인이 가진 주량을 알지 못했다. 몸이 많이 피곤하기도 했고.

“……그런데 저, 제이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에드의 눈이 풀리고 목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졌다.

“네, 에드.”

제이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공께서 균열의 틈에서 전투를 하실 때요.”

“아, 네에에. 카리스마가 넘치시죠?”

“아, 네. 그것도 그건데 좀…….”

“……조옴?”

“네, 좀 말랑말랑해지시는 게…….”

“네? 말랑말랑해지신다고요?”

제이논이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열이 흐트러지면 바로 호통이 날아오고 정신을 못 차리면 정강이가 까여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균열의 틈인데 말랑해지신다니, 그건 어느 나라의 대공이 그런 짓을 한답니까? 저는 듣도 보도 못 했는데요?”

열변을 토하는 제이논을 보자 갈증이 인 에드는 또다시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거기서 패닉에 빠지니까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마법을 걸던데…….

원래 대공이 그런 식으로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지 물어보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제이논이 간신히 말을 멈추고 에드와 다시 잔을 맞댔다.

“그런데, 에드.”

“네, 제이논.”

풀린 눈으로 물기가 촉촉하게 밴 제이논의 눈가가 반질거렸다. 약간 뜸을 들이는 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술김에 내뱉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진짜 첩자가 아닌 게 맞는 거죠?”

“첩자는 무슨 첩자…….”

“그렇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탁월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어느 부분은 또 너무 허술하고…….”

‘이건 내가 놓았던 수들이 별로였다고 돌려 까는 거지?’

에드도 반성을 하고 있었다. 대공을 만났다는 기쁨에 겨워 과속을 한 부분이 있었다. 헤린스 백작가와 연관된 일들을 빨리 정리하고 뜨고 싶었던 건지 대공과 발을 맞추며 천천히 돌아갔어야 할 일에도 그랬다. 충분히 의심을 살 만했다.

에드는 이마를 긁적이며 피식 웃었다. 새삼 느꼈다. 백작가에서 지냈던 날들이 생각보다 힘들었었나 보다, 하고.

“그런데 뭐 첩자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술에 취한 제이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빈 잔에 와인을 콸콸 따르는 제이논의 손이 살살 떨렸다.

“황실에서 뭘 얼마나 주고 뭘 손에 쥐여 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더 세고 훨씬 더 잘해 줄 테니까 첩자라 해도 전향만 하면 상관 없……아얏!”

그때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꼬리를 살랑이던 제이논의 정수리로 손날이 떨어졌다. 아픈 정수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술에 취한 제이논의 눈동자로 대공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대공 전하.”

에드와 제이논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할 때 조용히 방으로 들어온 대공과 이르텔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깜빡이던 제이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대공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아, 서재에서 멀지 않은 방이었지.’

에드는 어째 목이 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이젠 헤어질 시간이라며 제이논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이르텔에게 팔이 잡혀 질질 끌려 나가고 있었다.

에드는 손에 든 술잔이 흔들리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건지 눈이 감겼다. 잔을 내려놓고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아니,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대공이 흔들리는 몸을 부축해 안는 게 더 빨랐다. 얼마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대공은 에드를 안아서 침대로 옮겼다.

“……저 걸을 수 있는데요.”

“응, 그래.”

말끝이 늘어지는 에드를 침대에 눕히자 대공의 몸에 가볍게 스치는 피부 결에 밴 옅은 포도 향이 코를 간질였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베개를 매만져 에드의 머리에 대 준 대공은 에드를 내려다보았다. 베개를 베어 주면 베어 주는 대로 이불을 덮어 주면 덮어 주는 대로 잠자코 따르던 에드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많이 졸린 모양이었다.

대공은 푸른 눈동자가 무거운 눈꺼풀에 덮이는 걸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에드가 깊은 잠에 빠지는 걸 보고 방에서 나설 생각이었다.

그때 에드의 눈꺼풀이 도로 올라갔다. 대공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램프의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푸른색 눈동자와 붉은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눈길로 대공을 덧그려 보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키스해 줄까? 하고 물으십니까? 이마이긴 하지만 그래도…….”

뚱하고 술김이 어린 목소리에 대공은 낮게 웃었다.

“에드가 가르쳐 줬는데.”

“……제, 제가요?”

“응, 에드가.”

“제, 제가 언제요?”

절대 그런 적 없다고 에드가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에드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꼼꼼히 덮어 주었다.

너와 함께했던 그날 밤, 추운지 곁에 있는 나를 자꾸 잡아끌던 그날 밤.

비록 입술에 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네가 내게 닿으면 내 속에 잔뜩 뭉치고 응어리진 한기가 밀려난다는 것을 알려 준 밤이었지.

에드, 너를 의심했던 날도 있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대하며 너의 뒤를 밟았지.

정중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빈틈이 많아 보이면 많아 보일수록 상대방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는 걸 알고 그렇게 네 앞에 선 적이 있었지.

그런데 이젠 아무 상관 없어졌어, 에드.

그래, 정말로 아무 상관 없어졌어. 에드.

네가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너를 너로서 직시하게 되었으니.

에드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걸 바라보며 대공은 옅게 웃었다.

와인을 잔에 콸콸 따라 한입에 털어 넣는 이상한 방법으로 술을 마시던데 이런 행동들을 보면 보기보다 터프한 구석이 있었다.

질문을 툭 던져 놓고 무해한 얼굴로 잠에 빠진 에드를 대공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게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깊이 잠든 하얀 얼굴로 커튼 틈으로 비치는 옅은 달빛이 내려앉았다.

대공은 침대 위의 캐노피를 내려 정리했다. 아주 옅은 달빛의 시샘이라도 그의 단잠을 방해하게 둘 순 없었다.

잘 정리한 베개와 이불 속으로 쏘옥 집어넣은 에드가 이불을 휙 걷어차자 대공은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고 도로 휙 걷어차자 다시 덮어 주었다.

그러다 이불을 차는 것도 모자라 데굴데굴 굴러 침대 매트리스에 앉아 있는 제 허벅지까지 굴러오자 작게 웃고 말았다.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가만히 에드를 내려다보던 대공은 그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겼다.

오늘 밤은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단잠에 빠져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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