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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8화 (28/198)
  • Chapter 28

    “아란, 살살 하자.”

    대공의 나지막한 음성에 바닥에 내려선 은빛 늑대가 꼬리를 살랑이며 대공의 곁을 맴돌았다. 대공의 다리에 등을 비비다 캬아아, 입에서 불을 내뿜자 대공의 손끝에 걸린 체인에 불이 옮겨붙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에 위협을 느낀 마물이 움찔움찔 떨었다.

    마물을 처치하는 방법은 마물에 깃든 심장부인 핵을 파괴해야 했다. 사슬에 담긴 불길이 자신의 핵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마물의 저항이 심해졌다.

    그때 석상의 발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몸체로 금이 쩍쩍 갔다. 석상의 발밑부터 파사삭 부서져 단단한 몸체가 순식간에 모래알처럼 변했다.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마물은 스르륵, 땅 위를 기듯이 움직이며 진흙처럼 뭉쳐져 형상을 변화시켰다.

    몸을 칭칭 둘러싼 대공의 체인을 힘으로 끊어 낼 방법이 없으니 마물이 형태를 변화시킨 것이었다. 알알이 모여들어 뭉친 모래알들이 비행하는 벌떼처럼 솟구치자 탁한 바람이 일며 둥둥 뜬 먼지구름이 허공을 어둡게 물들였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난잡한 움직임에 대공이 시선을 들었다.

    마물은 박쥐와 같은 모양으로 형상화하며 윙윙거렸다.

    대공은 석상이 모래알로 변할 때 마물의 왼쪽 팔 안쪽에 있던 핵을 발견했다. 녹슨 철처럼 검붉고 탁한 연기가 새어 나오는 핵이었다.

    그걸 보호하기 위해서 덩치를 한껏 부풀렸다가 웅크리는 마물을 보며 대공은 검을 들었다. 손바닥으로 검을 쓸어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기운을 불어 넣은 검을 허공으로 향하자 검 끝에서 화악 불길이 치솟았다.

    타앙, 탕, 탕, 타아앙.

    검 끝에서 생성된 크고 작은 화염구들이 하늘에 떠 있는 마물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 끝에서 쏘아지는 힘의 반동에 대공의 몸이 작게 들썩거렸다.

    화염구가 튀어 오른 방향을 올려다보며 대공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화염구가 박쥐 형상의 마물에게 닿아 터지자 검은 모래가 둥그렇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뭉쳐진 모래알들이 퍼질 때마다 자잘한 돌이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찾았다.”

    이번엔 마물의 오른쪽 날개 아래에 숨겨진 핵을 확인한 대공이 검 끝으로 다시 화염구를 생성해 조준했다.

    치명적인 약점을 들킨 마물이 모래를 뭉쳐 긴 창같이 만들어 대공을 노렸다. 긴 창으로 바닥을 쿵, 쿵 내리찍고 대공을 향해 붕붕 휘두르는데 검으로 막는 것도 아니고 몸을 슬쩍슬쩍 움직이는 것으로 공격을 피한 대공이 타앙, 타아앙 연달아 화염구를 쏘아 올렸다.

    마물을 일제히 덮치듯이 포물선을 그리며 화염구가 발사되자 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물 앞으로 2중, 3중으로 벽을 치듯이 검은 모래가 모여들며 오른쪽 날개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 순간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은빛 늑대가 검은 모래의 응집을 흐트러뜨렸다. 그 뒤를 바로 덮친 화염구들이 마물의 오른쪽 날개에 명중했다.

    콰아앙.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대기가 응축되었다가 확 풀어졌다. 이 때문에 인 바람이 모래 폭풍처럼 퍼지며 공간을 덮쳐눌렀다.

    구멍이 뻥뻥 뚫려 흩어지는 마물의 모래알들 틈으로 핵을 발견한 대공이 체인을 날렸다.

    핵을 콱 움켜쥔 체인에 힘이 실렸다. 그대로 핵을 터뜨리려고 하자 검은 모래알갱이들이 체인으로 날아들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체인을 휘감으며 전진하는 마물에 체인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리며 팽팽하게 당겨지며 어떻게든 대공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공은 당황하지 않았다. 체인에 손을 얹어 다시 한번 화염을 피워 올렸다. 순식간에 불이 체인을 타고 오르며 검은 모래알들이 타르처럼 진득진득하게 녹아내렸다. 그 불길에 핵이 팍 터지며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하…… 끝났다.”

    결계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던 에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가볍게 떨렸다. 압도적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대공이 그 생각을 말끔하게 깨뜨려 주었다.

    “아란, 수고했어.”

    마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낸 것을 확인한 대공이 곁에 선 늑대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란을 다시 소환진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결계로 발걸음을 옮긴 대공이 에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끝이 검게 물든 걸 알아챈 대공이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종종 마법을 과용하면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부작용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손끝과 발끝이 검게 물들면서 저리는 건 약과였다. 어쩔 땐 온몸이 타들어 가듯이 아플 때도 있었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때 마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폭주까지 일어났다.

    ‘이런 모습은 처음 봤을 테니 당혹스러울 거야…….’

    마물도, 균열의 틈도, 마법의 힘도 낯설어하는 에드였으니 검게 물든 이 손을 봐 봐야 두려움만 느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공은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러나 에드의 생각은 달랐다.

    원작을 보면 대공의 손끝이 검게 물들 때는 항상 마물에게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쓸 때였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에도 부작용에 대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텐데 제가 걱정할까 봐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드는 대공의 검게 물든 손이 두렵지 않았다.

    에드는 손을 내밀었다. 굳게 움켜쥔 대공의 주먹을 손으로 감쌌다. 주먹을 보자기로 쥔 것 같은 이상한 모양새였지만 에드도, 대공도 달리 말은 없었다.

    에드가 살포시 손을 얹어 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옅게 웃으며 말했다.

    “불안하면 다시 키스해 줄까, 에드?”

    에드는 펄쩍 뛰었다.

    “결, 결계 안 무너뜨리고 잘 지켰는데요?”

    하하하 웃는 대공의 웃음소리가 맑고 청아했다.

    대공은 균열의 틈에 수없이 들어오고 무수히 마물과 싸워 사람들을 구해 왔지만, 이번처럼 전투를 끝내고 즐겁게 웃은 건 처음이었다.

    대공이 손을 활짝 폈다. 여전히 손을 물들이는 검은 흔적이 존재했지만 그에 잠식되지 않은 대공이 에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작고 하얀 손이 한 품에 들어오듯 쏘옥 들어왔다.

    그리고 에드와 함께 빛나기 시작하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 * *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각 에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그가 누워 있는 곳은 백작 저 본관 3층에 있는 방이었다.

    어제 네이센의 불건전한 방문 이후에 대공은 에드의 방을 백작 저 본관 3층으로 옮겼다. 대공이 지내는 서재와 멀지 않은 방이었다.

    ‘……그리고.’

    에드는 심장이 톡, 톡 튀는 가슴을 손으로 눌러 보았다. 따뜻한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술렁거림이 온몸을 가로질러 퍼지며 번져 나갔다.

    “…….”

    어제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네이센의 함정, 마운틴스 디저트 가게, 보육원 방문, 구두 맞춤, 베이 호수…… 하지만 어떤 것도 대공과 균열의 틈에 들어간 일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종내에는 환상 같았던 전투 때문인지 에드는 대공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로넨이 달려들었고, 이르텔과 제이논이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손길에 에드는 정말로 현실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러고 백작가로 돌아와서는 따스한 수프를 먹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

    그러나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누웠어도 에드는 균열에 틈에서 봤던 빛의 잔해와 마물을 물리치는 대공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장악했다.

    엎치락뒤치락, 이불을 덮었다 찼다 다시 덮으며 에드는 뒤척거렸다.

    똑, 똑.

    그때 방문을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불을 돌돌 감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해 끙끙거리던 에드는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에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사람은 제이논이었다. 한 손엔 과일이 든 쟁반을 들고 한 손엔 와인을 들고 들어왔다.

    “아, 네.”

    에드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제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잠이 잘 오지 않죠?”

    “……네, 뭐.”

    “그럼 한잔할까요?”

    제이논이 벽난로 곁으로 테이블을 옮기며 말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에드는 이대로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난로 위 램프를 켜며 제이논이 만든 자리에 앉자 그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차를 건넸다. 에드가 받아 마시자 제이논이 잔에 와인을 따랐다.

    “저도 처음 균열의 틈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잠이 잘 오지 않더라고요.”

    에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은 무섭고, 균열의 틈은 어둡고 춥고,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똑같은 감상이었다. 그래서 에드는 옅게 웃을 수 있었다.

    ‘성실하고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 같은 제이논이 이렇게 말하는 것 보니 내가 오늘 밥값을 못 한 정도는 아니려나?’

    에드는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 감미로운 술이 부드럽게 입 안으로 넘어가는 것이 기분 좋았다.

    어느새 빈 잔에 제이논이 다시 와인을 따랐다. 마치 에드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에드.”

    “네.”

    “정말 죄송했습니다.”

    와인 병을 내려놓으며 제이논이 말했다.

    “사실…… 그 편지를 믿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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