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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7화 (27/198)
  • Chapter 27

    입술을 살짝 뗀 대공이 묻자 이마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감촉이 너무나 선명하여 에드는 정수리가 다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뒤로 고개를 뺐다.

    “……보, 보입니다! 대, 대공 전하.”

    에드는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답했다. 대공과 맞붙어 있던 동안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속에 고여 있던 숨결이 한꺼번에 다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정말입니까?”

    “정, 정말입니다! 아, 아스넬 대공 전하.”

    에드는 바로바로 반응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이마를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미 이마에서 시작된 열이 발끝까지 타고 내려가 온몸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올랐는데 여기서 한 번 더 이마를 내준다면 몹시 곤란해질 게 뻔했다. 아주 큰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마치 시뻘겋게 타오르는 석탄을 싣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일이…… 에드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대공은 웃었다.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에드를 내려다보면서 잔잔히 웃었다. 농익은 과실처럼 윤이 나고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었다.

    “좋아요, 에드.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까 이젠 여길 정리하고 나가죠.”

    두 눈 가득히 담겼던 대공에게서 시선을 돌린 에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맞다. 여기 균열의 틈이었지.’

    거대한 석상이 움트고 있는.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 온몸을 짓눌렀던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증발하고 눈앞에 서 있는 대공에게 온 정신을 빼앗겼다. 뺨에서는 열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벽에 등을 기대며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가 생생했던 감각이 죽지 않은 이마가 느껴지자 얼른 손을 뗐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대공의 시선이 느껴져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대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에드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에드의 머리 위로 펼쳐진 결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에드. 이 결계의 시전자는 나지만 결계를 유지하는 데 에드의 힘이 필요합니다. 에드의 마음이 무너지면 결계가 흔들릴 수 있는데 그 무너진 틈으로 마물이나 마물의 저주가 침입할 수 있거든요.”

    투명하지만 대공의 손에 걸리는 유리 장막 같은 결계를 두드리자 에드는 산만했던 머릿속을 수습했다. 이내 작게 호흡을 정리하며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공 전하.”

    균열의 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마물을 죽이거나 세계와 이어진 길을 찾아 건너가야 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든 시간이 필요했다.

    에드는 이를 악물었다. 대공의 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발목을 잡을 순 없었다. 내가 약하니 지켜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 내 한 몸은 내가 지켜야 했다.

    대공은 이를 악무느라 단단해지는 에드의 턱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차려 말개진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올곧고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러니까 에드.”

    “네, 무슨 명이든 내리십시오. 대공 전하.”

    대공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계를 무너뜨리면 키스하러 올 겁니다.”

    에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대공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을 몰랐다.

    “이번엔 입술에.”

    “……느에?”

    대공은 단단하게 굳었던 얼굴이 무방비하게 풀어지는 것을 보며 웃었다. 에드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가볍게 긴장을 풀듯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결계를 빠져나와 마물이 흩뿌리는 검은 모래가 버석하게 휘날리는 대지 위에서 벽에 박은 체인을 풀려고 용을 쓰는 마물과 마주했다.

    듬직한 그 등을 바라보며 에드는 뒤늦게 대답했다.

    “……절,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겠습니다.”

    * * *

    척박하고 차가운 북부 성의 주인, 설원의 지배자이자 제국의 찬연한 빛.

    로넨이 검의 귀재였다면 대공은 검뿐만 아니라 마법 역시 귀재였다. 그 증거로 대공은 이미 젊은 나이에 수많은 마법을 마스터했고 그중 가장 어렵다는 소환 마법의 대가였다.

    묶어 놓은 석상 앞으로 다가선 대공은 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등 위로 은빛 물결이 솟구치듯이 일렁이더니 날카로운 화살촉 같은 빛 덩어리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터지자 어두운 동굴 바닥으로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그 소환진 위로 나타난 은빛 늑대가 기지개를 켜듯이 온몸을 부르르 털자 대공은 늑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크아아.

    입을 쩍 벌린 늑대가 포효하자 석상이 흘려 허공을 부유하던 검은 모래가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대공은 허공에 미리 띄워 놓았던 빛이 나는 마법구를 늑대의 입에 물려 주었다.

    “가, 아란.”

    탁, 탁, 탁 동굴 벽을 가볍게 타고 오른 늑대가 하늘을 박차 오르듯이 튀어 올랐다. 입에 문 마법구를 으득, 씹어 터뜨렸다. 그러자 별처럼 쏟아지는 빛 무리가 어둡고 좁은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추며 길을 밝혔다.

    대공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나 차가운 심해 속 같은 빛과 온기가 없는 곳에서도 쉽게 싸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에드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환한 빛을 피워 올렸다.

    대공을 바라보던 에드가 그 빛 무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에드의 푸른 눈동자가 늑대가 깨트린 빛에 노출되어 환하게 물들었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결계에 통, 통, 통 치받히는 빛의 잔해가 마치 통통 튀는 별사탕 같았다.

    뒤로 물러나 있던 에드는 어느새 앞쪽으로 나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균열의 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처음이 무섭고 음울한 것이 아니라 밝고 환하고 조금은 들뜨게 기억되길 바라며 대공은 한 번 더 은빛 늑대의 입에 빛을 내뿜는 마법구를 물렸다.

    허리에 찼던 검을 뺀 대공이 땅에 박아 기운을 흘리자 금색 아지랑이가 부유하듯이 떠올랐다. 끊어진 다리가 이어지듯이 한데 어울려 떠오른 아지랑이가 어둠에 묻힌 공간으로 모여들더니 팍 터지자 좁디좁은 동굴 안이 순식간에 확 넓어졌다.

    좁은 공간에서 마물과 마주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축되고 만다.

    이미 수차례 전투를 벌였던 대공은 상관없었으나 균열의 틈을 처음 접한 에드가 이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대공은 자신의 힘으로 마물의 둥지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벽 틈에 박아 두었던 체인을 잡아 석상을 뒤로 끌어당겼다.

    결전의 시간이었다.

    * * *

    제국의 탄생 비화는 어느 한 용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심해 깊은 곳에서 지내다 악으로 고통받던 생명체들을 구원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왔다고 전해지는 이 용은 악하고 삿된 것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내 그 힘을 이용해 지상 위의 모든 사악한 존재들을 세상과 단절된 틈으로 몰아낸 용은 그 땅 위에 나라를 세운 뒤 오랜 시간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용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 제국의 황족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검과 마법으로 마물을 상대하고 적을 물리치는 아스넬 린든은 역대 황족 중에서 가장 용의 힘을 깊게 물려받았다고 칭송을 받았다.

    이런 묘사를 글로 접했을 때는 뭐, 그래. 그렇구나 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에드는 소설이 너무 대충 묘사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탁, 탁, 탁. 다시 벽을 박차고 오른 은빛 늑대가 떠올라 빛을 산란시켰다. 동굴 전체를 채울 빛을 뿜고 있어서 마치 태양을 삼킨 늑대가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대공에게 거치적거리지 않기 위해 결계 안에서 숨을 죽이던 에드는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결계에 바짝 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색색의 별이 흩뿌려지듯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까만 밤 위로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 같았다.

    에드는 손을 내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결계에 통, 통, 통 부딪히는 별똥별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결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싶어 꾸욱 참았다.

    그 순간, 앞쪽에서 환한 빛이 확 터지며 거대한 바람이 일었다.

    ‘무슨 일이지? 대공께 무슨 일이 생겼나?’

    모랫바닥을 뒤집으며 팍 인 거친 바람이 결계에 팍팍팍 부딪혔다가 결계 아래로 갈라지듯이 흩어지자 에드는 어느새 결계에 이마와 손바닥을 붙이고 밖을 살폈다.

    “……아.”

    동굴 안이 크고 넓어져 있었다. 좁디좁아 조금만 움직여도 마물의 시선을 빼앗고 대공의 신경을 자극할 것 같아 숨을 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던 작은 공간이 확 트여 있었다.

    허공에 머리카락이 부웅 뜬 채 떠 있던 대공은 어느새 은빛 늑대가 건네준 체인을 들고 마물의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대공이 체인을 팔목에 걸고 실타래를 감듯이 감아 당기자 거대한 석상이 뒤로 질질 끌리며 대공에게 가까워져 갔다. 석상을 칭칭 둘러 감은 가느다란 체인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당겨질수록 석상이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다.

    쿠오오.

    거대한 석상이 입을 쩍 벌려 굉음을 토하자 돌풍이 일며 대여섯 개의 돌개바람이 생성되었다.

    탁, 탁, 탁 은빛 늑대가 거대한 석상을 밟고 오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휘이잉 휘몰아치는 돌개바람을 앞발로 차고 팔랑이는 꼬리로 때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쾅, 쾅,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아란, 살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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