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물놀이가 끝났을 때 대공이 먼저 자리를 뜨더니 척척하게 달라붙는 옷을 갈아입으며 모닥불을 확인했다.
뒤따라 언덕에 오른 제이논이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에드도 땅에 팔을 짚고 지친 몸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물을 잔뜩 먹은 옷 때문에 휘청거렸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오직 로넨만이 아직 쌩쌩하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도련님, 이제 그만 나오십시오. 너무 오래 물에 있었습니다.”
“어, 알았……어?”
땅에 올라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던 에드는 물기슭에서 노는 로넨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미에 의아함이 붙은 로넨의 대답에 시선을 들었을 때 수면에서 보글보글, 물보라가 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물속에서 소용돌이가 생기는 게 보였다.
그게 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보글보글보글.
쿠구구쿵.
낮고 기분 나쁘게 귀를 울리는 소리가 마치 숲 전체를 울리는 진동처럼 느껴졌다.
뭐야?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에드는 물로 뛰어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로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로넨이 땅 쪽으로 헤엄치려고 했지만 소용돌이치는 물의 힘에 자꾸만 물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빠르게 헤엄친 에드는 로넨이 아직 작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삼켜지기 전에 팔을 잡고 힘껏 잡아끌었다.
그리고 소용돌이 밖으로 끄집어낸 로넨을 온몸의 기력을 모두 쏟아 내 뒤로 있는 힘껏 밀었다. 뒤를 따라 헤엄친 제이논을 향해 던지듯이 넘겼다.
“에드!”
물을 잔뜩 먹은 무거운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에드는 제이논이 로넨을 받아 챙기는 것을 보며 직감했다.
‘아, 나는 이 소용돌이에 집어삼켜지겠구나.’
점점 더 크기를 더해 가는 소용돌이의 끄트머리에 오른손이 걸려든 것을 느꼈을 때, 에드는 자신을 향해 제이논이 손을 쭉 뻗는 걸 보았다.
“에드! 내 손을 잡아!”
에드는 왼팔을 쭈욱 뻗었다. 소용돌이에 끌려들어 가려는 몸을 앞으로 당기며 제이논의 손을 마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맞닿을 뻔했던 손이 이내 떨어지고, 꼬르륵. 눈앞에 어둠이 닥쳐드는 것과 동시에 에드는 물속으로 삼켜졌다.
퉁, 퉁, 투우웅.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가듯이 빙글빙글 아래로 미끄러지던 몸이 울퉁불퉁한 벽체에 몇 번 부딪혔다. 에드는 팔과 다리, 발목에 약한 통증을 느끼며 털썩, 바닥에 떨어져 엎어졌다.
“……아.”
이질적인 공간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온 에드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켜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속으로 삼켜졌는데 발이 닿는 곳은 좁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곳이었다.
에드가 떨어진 구멍은 벌써 막혀 버리고 없었다.
에드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 벽에 붙은 포도 넝쿨 같은 것이 손에 닿았다. 차갑고 음침한 느낌에 몸을 흠칫 떤 에드는 그제야 시선을 내려 주변을 살폈다.
“…….”
눈앞에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어찌나 무섭게 생겼는지 보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커다란 뿔이 우뚝 솟은 악마 같은 형상을 한 거대한 돌조각은 입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었는데, 그때마다 몸을 한 차례씩 떨며 쿠웅, 쿠우웅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몸에서 자잘한 검은 모래가 떨어지며 허공을 떠다녔다.
에드는 이곳이 어딘지 깨닫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균열의 틈.’
원작에서 균열의 틈이나 마물의 둥지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다른 소설에서 던전이나 게이트로 칭해지는 곳과 비슷했다. 마치 씽크홀처럼 예상치 못하게 구멍이 생기며 사람들을 빨아들이거나 마물이 튀어나왔다.
원래라면 마물들은 세상과 단절된 틈에서 서식했는데 가끔 사람들이 사는 곳에 흘러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자연재해와 같은 현상이었으나 때로는 누군가가 억지로 틈에 균열을 만들어 그것들을 소환할 때도 있었다.
특히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균열의 틈이 생겨 마물이 튀어나올 때가 많았는데 큰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대공이 워낙 쉽고 빠르게 대처하며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설로 볼 때는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마물이나 몬스터를 처음 접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항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던데…… 에드,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주한 마물은 거대하고 위압감이 느껴져 에드는 그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한참이나 들어야 보이는 석상 마물이 저를 발견해 고개를 숙이는데도 에드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에드는 알지 못했지만 이 석상 마물이 흘리는 검은 모래가루에 닿으면 사람의 불안한 마음을 파고들어 두려움을 커지게 하는 저주의 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에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 앞으로 금빛 테두리가 있는 결계가 둥글게 반짝이고 있는 것을.
“에드!”
에드가 소용돌이에 삼켜지기 직전 손목에 마법 실타래를 걸어 뒤따라 균열의 틈으로 들어온 대공은 마물에게 공격받기 직전인 에드를 불렀다.
그러나 마물에 압도되어 눈앞이 검게 물든 에드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거대한 마물의 발에 푸른 마법 체인을 칭칭 감아 움직임을 봉쇄한 대공이 단단한 동굴 벽과 벽 사이에 체인 끄트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마물을 훌쩍 뛰어넘었다. 지금 바로 마물을 깨부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석상에 눈길이 빼앗긴 에드의 앞에 섰다.
“에드.”
“…….”
“에드.”
대공은 거대한 마물에 압도되어 빛이 흐려진 눈동자에 자신이 들어찰 수 있게 에드에게 가까이 붙었다. 꿈결에 흐르는 밀어처럼 나지막한 음성으로 에드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
“내가 있잖아.”
저주의 힘에 누군가 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의 기운이었다.
대공은 고개를 숙여 에드의 하얗고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부드러운 입술이 따스한 이마에 조금 오랫동안 붙어 있었다.
“에드.”
그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에드를 불렀을 때, 에드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며 그가 갖고 있던 생기를 머금은 총기 가득한 눈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을 찬찬히 바라보던 대공은 소리 없이 웃었다. 동시에 에드가 눈을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맞추자 대공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그날 밤의 기분과 비슷했다.
에드가 독에 당해 온몸을 덜덜 떨며 아파했던 날, 그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이 닿자 괴로움에 흐려졌던 눈동자에 생기가 들어차는 걸 보며 느꼈던 뿌듯함과.
대공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마에 한 번 더 키스해도 됩니까?”
이렇게 조금 더 에드의 눈동자에 담기고 싶었다.
* * *
새까맣게 물들었던 눈앞이 언제부터 환해졌더라?
“……아.”
〈괜찮아, 에드.〉
〈내가 있잖아.〉
그 말에 긴장이 풀리며 온몸으로 잔뜩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어떻게든 로넨만큼은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며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에드의 세상에 다정한 위로가 되는 상냥한 말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혼자서 뭐든지 다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서 에드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압박감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토록이나 선명하게 닿은 온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흐늘흐늘 늘어지려는 몸을 억지로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마에 닿은 입술에 뭉근히 힘이 실리자 불안으로 꽁꽁 뭉쳤던 아랫배가 풀어졌다. 이마 위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타인의 감촉이 감미로웠다.
에드는 이마에 닿은 말랑하고 보드라운 그 입술을 기껍게 받아들이다가 입술이 떨어지려고 하자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따라붙었다.
하하.
바람결처럼 웃는 타인의 숨결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진동하자 에드의 목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뒤로 빠지려던 입술이 이마에 조금 더 머물렀다.
‘……아, 기분 좋아.’
쪼옥, 젖은 소리를 울리며 입술이 이마에서 떨어졌을 때 에드의 입가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마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느낌이었다.
금빛 테두리가 빛나는 결계 안에서 에드와 대공의 시선이 얽혔다. 고개를 숙여 에드와 눈높이를 맞춘 대공의 내리깐 속눈썹이 반짝였다.
“…….”
“…….”
에드의 눈으로 처음엔 내리깔린 대공의 속눈썹이 들어왔고, 그다음엔 제 코끝과 대공의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고개를 기울인 대공이 말했다.
“에드.”
“…….”
“이마에 한 번 더 키스해도 됩니까?”
동시에 에드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정신이 돌아왔다.
“……아.”
“…….”
“대, 대공 전하.”
“이제 내가 보입니까? 에드?”
그리고 바로 눈앞에 대공의 얼굴이 자리하니 잠깐만, 잠깐.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대, 대공 전하. 그, 그러니까 이, 이게…….”
“아직 안 보이는 모양이네.”
대공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에드의 이마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이번에 조금 더 길게.
에드는 뒤로 살짝 고개를 물렸으나 이마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에 다시 이끌리고 말았다.
가볍고 따스한 접점, 그 접점에서 몸 전체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에드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보드랍고 뜨거운 입술이 에드의 이마에 깊게 밀착되었다. 따스하게 시작했던 입맞춤에 감미로움이 서리자 어느새 대공의 팔뚝을 잡은 열 오른 손가락이 움찔움찔 떨렸다.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그런 에드의 반응에 대공의 입술로 호선이 그려졌다. 에드의 이마 위로 잔잔히 퍼져 나가는 미소였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보입니까, 에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