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5화 (25/198)

Chapter 25

“이것도 멋있고.”

“…….”

“저것도 괜찮고.”

구두를 다 고르고 났을 땐 당이 떨어져 눈앞이 노랗고 손이 덜덜 떨렸다. 로넨이 에드 몰래 구두 한 켤레를 더 맞췄지만 에드는 그걸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빨리 백작가에 가서 당을 충전해야겠어.’

그 생각만 간절했다.

하지만 하루는 길었고 갈 곳은 많았다.

“백작 저로 가는 길에 호수가 하나 있던데.”

구두 가게에서 나왔을 때 대공이 운을 떼자 제이논이 바로 받았다.

“베이 호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더니 바다와 맞닿은 작은 석호인데 너비가 얼마고 깊이는 얼마며 무슨 전설이 내려온다는 둥 지식을 늘어놓았다.

“그럼 이왕 이렇게 나온 김에 가 볼까?”

“정말이십니까?”

“설마 거기서 갑자기 훈련을 실시한다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제이논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묻자 대공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

“진심으로 믿습니다, 대공 전하.”

“와,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냐고!”

대공의 제안에 이르텔과 제이논이 정말 좋아했다. 지칠 대로 지친 에드는 손이 다 떨렸지만, 피로함을 드러내지 않으며 옅게 웃었다.

‘다들 성실하고 근엄해 보여도 놀기 좋아하는구나.’

마차가 부드럽게 달리자 열어 놓은 마차 창문으로 따스한 바람이 들어왔다.

마차를 타고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매일 보던 풍경인데, 하던 에드의 감상이 바뀌었다.

따스한 햇살이 각양각색의 나뭇잎에 내려앉아 반짝반짝 빛났다.

새순이 돋아나는 여린 이파리들이 빠끔 내민 고개는 아주 작은 들꽃이라도 절로 눈길이 갔다.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는 정겨웠고, 깊은 숲의 향기는 달콤하고 상쾌했다.

그 순간, 덜컹 마차가 작게 들썩였다. 작은 돌을 밟은 탓이었다. 그 바람에 작게 엉덩이를 통, 들썩인 에드는 창틀에 얼굴을 박았다. 창밖을 내다보느라 고개를 빼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윽…… 어?”

아니, 박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언제 끼어든 건지 대공의 손바닥이 에드의 얼굴과 창틀 사이를 막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아픔에 대비했던 에드는 어? 하며 눈을 떴다.

“헉,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에드는 대공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괜찮습니다.”

아니다. 안 괜찮았다.

대공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에드의 얼굴을 감쌌던 대공의 손바닥과 창틀에 쓸린 손등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에드는 대공의 손을 부여잡고 이외에도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의 손을 집중해 내려다보던 에드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위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

“…….”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제이논은 한여름의 외나무다리에서 딱 들러붙어 있는 한 쌍의 커플을 맞닥뜨린 것 같이 표정이 썩어 있었다.

마차 밖에서 말을 몰던 이르텔은 뭘 이런 걸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이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대공이 미미하게 웃고 있었는데 에드는 아…… 이, 이게 아니구나 싶어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얼른 대공의 손을 내려놓았다.

멋쩍음에 괜스레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에드는 물었다.

“호, 호수는 아직 멀었습니까?”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르텔이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텐스, 마차 조심히 몰아.”

“예이, 대장.”

* * *

‘아니, 그런데 아무리 대공이라 해도 아픔을 못 느끼는 건 아니지 않나?’

에드는 마차에서 내리는 대공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차가 호수에 도착하자 로넨이 먼저 폴짝 뛰어내렸고 그 뒤를 제이논이 따라 내렸다. 작은 폭포가 내리 떨어지는 호수를 향해 둘이 우당탕 달려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우당탕 달려왔다. 신난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봄볕에 수면 위로 금실과 은실이 수놓아진 것 같았다.

텐스는 훈련 때 막사로 쓰던 너른 천을 바닥에 깔았다. 밝은 색감은 아니었지만 파릇파릇한 봄기운과 만나니 그 또한 그럴싸한 그림이 되었다.

육포와 샌드위치, 음료와 케이크를 준비한 건 이르텔이었다.

훈련과 전쟁으로 막사 하나를 뚝딱뚝딱 짓고 부수는 생활을 얼마나 많이 했던 건지 둘 다 뭐 하나를 해도 금방금방 해냈다.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신 에드는 뭐라도 도우려고 이르텔과 텐스 곁에서 알짱거렸다.

하지만 손발이 딱딱 맞는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손을 거들 일이 마땅치 않아 나중에는 차 맛 감별사 역할만 하게 됐다.

“차 맛이 어떻습니까? 너무 우려 떫은가요?”

“아뇨, 텐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치즈케이크와 한 번 먹어 보십시오. 맛이 잘 어울리는지.”

“아, 네. 잠시만요.”

말린 오렌지가 동동 뜬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치즈케이크를 신중하게 맛보던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맞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럼 이 쿠키와는 어떤지 맛보세요.”

“네, 텐스.”

모닥불을 피우던 대공이 그 모습을 보고 옅게 웃었다.

이후에도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에드가 텐스의 노련한 리드에 먹어 치운 케이크와 샌드위치만 해도 어느덧 세 조각이 넘어갔다.

따뜻한 홍차로 몸을 데우고 달콤한 디저트로 배를 채우니 긴장이 풀리는지 에드의 어색하고 뻣뻣해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몸이 뒤로 늘어지는 게 보였다.

돗자리로 삼은 천에 몸을 쭉 펴고 앉아 발끝을 까딱이는 에드를 보노라니 대공은 한가로운 낮에 나들이를 나온 보람을 느꼈다.

“에드! 에드도 거기 있지만 말고 들어와!”

“네, 도련님.”

로넨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처음엔 허리 위로 올라오는 물에 발만 조심스레 담가 보더니 한 번 풍덩 빠지고 나자 금세 물속을 휘젓고 다니며 즐거워했다. 곁에서 제이논이 수영을 가르쳐 주자 신이 나는지 활기차게 손발을 움직였다.

쿠키를 입에 문 에드는 바지 밑단을 둘둘 접어 올렸다. 이르텔이 커다란 수건을 챙겨 주자 들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게 이제 몸에 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구두를 고를 때는 대체 이거 언제 끝나는 건데? 하고 맥없이 눈동자만 굴리기에 바쁘더니 지금은 딴판이었다. 에드의 몸에 생기가 돌았다.

물가에 도착한 에드는 발끝을 물에 담가 보았다. 적당히 시원하고 부드러운 물이 발을 감싸는 기분에 입가가 절로 풀렸다.

작은 호수에서 부지런히 헤엄을 치던 로넨이 물가의 둔덕진 턱에 앉아 물에 발을 담근 에드 곁으로 다가왔다.

“시원하지?”

“네, 도련님.”

“진짜 기분 좋아.”

에드 주위를 맴돌며 씨익 웃는 로넨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어느새 로넨 곁으로 다가온 제이논이 로넨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둘이 눈을 마주치더니 에드의 발목을 잡고 쭈욱 끌어당겼다.

“으헛.”

양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거침 없는 손길에 에드가 물속으로 쏘옥 빨려 들어갔다. 가슴께까지 닿는 물에 팔다리를 몇 번 허우적거리다가 깊지 않았던 것이 기억나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서니 허리 위에서 물이 찰랑였다.

“하하하, 정말 시원하지?”

에드는 온 세상이 다 울리도록 웃는 로넨을 바라보았다. 물에 푹 젖은 옷이 무겁고 축축 늘어졌지만 불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피식 웃은 에드는 제이논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아, 아니! 왜 나한테만 공격을 하는 건데?!”

“도련님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요.”

뚱하게 답한 에드가 공격을 멈추지 않자 제이논이 손으로 물을 막으며 움직였다. 에드의 등 뒤로 움직이더니 그의 목을 감고 서서 오른쪽 발목에 제 발목을 걸었다.

‘밭다리 걸기인가.’

날쌔게 움직여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제이논에 에드는 버티고 섰으나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조금씩 큰 그의 힘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물속으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어엇.”

제이논이 억눌린 비명을 토하면서 풍덩 소리와 함께 물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넘어지려는 에드의 허리를 손 하나가 감싸 안았다.

어느새 물속으로 들어온 대공이 제이논을 밀어내고 에드를 구한 것이었다. 대공이 에드를 잡아 등 뒤로 물리자 얕은 수심을 박차고 올라온 제이논이 외쳤다.

“반칙! 대공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반칙입니다!”

대공의 등 뒤에서 빠끔 얼굴을 내민 에드가 지지 않고 외쳤다.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제이논은 저한테 말하고 물에 패대기를 쳤습니까?!”

모두가 여러 가지 이유로 분주한 가운데 그중에서 가장 바쁜 건 대공이었다.

그의 다리를 꽉 잡고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운 로넨을 매달고, 어떻게든 에드를 밖으로 나오게 유도하려는 제이논도 막았다.

그리고 제이논을 도발하느라 자꾸만 튀어 나가려는 에드를 등 뒤로 숨기며 대공은 제이논의 얼굴에 물세례를 날렸다.

유치했지만 치열했고,

그래서 더 즐거운 물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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