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4화 (24/198)

Chapter 24

원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는 따스한 김이 오르는 차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대공이 앉아 있었다.

“그, 그게 저 오, 오늘 일은…….”

메마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원장이 입을 떼자 대공이 찻잔을 들었다.

“그래, 오늘 일은 로넨이 흥분해 생긴 일 같은데 한창 자라고 호기로워질 때니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 주면 좋겠군. 오늘은 다른 일로 방문한 것이기도 하고.”

원장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로넨이 흥분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팔아 치운 에이를 찾는 놈 때문에 번진 일이었지.

‘그러게 그놈은 왜 에이를 찾아서 이 사달을 내고 난리야.’

그래서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대공이 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를 마시며 저리 무심하게 구는 걸 보니 그 속내가 빤했다.

원장이 비죽이 웃었다.

‘하긴 귀족 놈들이란 그렇지.’

밖으로는 우아한 척, 고상한 척 온갖 가식을 다 떨어 대며 제 손에는 더러운 오물 하나 묻히려 하지 않는 족속들이지 않던가.

제 눈앞에 있는 대공도 다른 귀족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밖으로는 아이들을 위하는 척, 정의로운 척을 한다지만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 온 귀족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분명히 에이의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저 관심 없는 태도라니.’

어쩌면 친동생을 찾는 데 물불을 안 가린다는 소문도 거짓일지 몰랐다. 아니면 자기가 낸 소문이거나.

저 심드렁한 표정만 봐도 그랬다. 그렇게나 찾고 싶어 하던 동생의 머리를 쥐어뜯은 나와 대면하면서도 저리 잠잠한 모습이라니?

동생을 잃어버린 대공의 과거사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것도 다 귀족적인 움직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귀족들이란 남의 시선과 관심을 받는 것에 환장한 놈들 아니었던가.

친동생을 찾는다고 타인의 시선과 연민을 잡아 끌어놓고 막상 찾으니 귀찮아진 것인지도…….

원장은 속으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씀하십니까?”

대공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로넨을 산에서 주웠다고 했지? 원장이 직접.”

“네, 그렇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수레를 멈추고 찾아봤더니 나무 덤불에 엉켜 넘어져 있었습니다. 정말로 추운 날이었죠.”

“그에 대해선 정말로 감사를 전하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요.”

“그럼 그때 로넨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보지 못했나?”

원장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목, 목걸이요?”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인데.”

봤다, 봤어. 작은 아이의 목에 걸려 있던 붉은 목걸이를.

그날 밤 원장은 짐수레를 끌고 배달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척박한 북부 근처까지 일을 맡긴 놈 때문에 시근덕거리며 차가운 코를 옷소매로 훔쳤다.

그런데 그때, 그러잖아도 추워 뒈질 것 같은데 풀숲에서 웬 여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여자를 칠 뻔한 원장은 재수가 없으려니 하고 투덜대며 퉤, 침을 뱉고 그냥 가려다가 여자의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는 아이를 보았다. 목에 걸린 보석 목걸이도.

그래서 데려왔다. 이미 숨이 거의 넘어간 여자를 수레에 태워 오다가 중간에 버리고 아이의 목걸이는 적당한 곳에 팔았다.

사연이 있어 보였기에 이리저리 길을 돌고 돌아 북부와 한참 떨어진 서부 근처에서 팔았다. 후려치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가격 역시 큰 금액이다.

원장은 그 돈을 들고 지원금을 많이 준다는 남부로 내려와 보육원을 세웠다.

목걸이를 판 뒤 아이도 적당히 버리려 했으나 머릿수가 곧 돈이니 로넨을 데리고 와 보육원 장부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원장, 자신뿐이었다.

‘뭐,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 새삼 밝혀지기도 어려울 거란 말이지.’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자를 봤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아이도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넘어가고 있었던 게 아무래도 습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대공이 차를 마시며 아쉬움을 표했다. 내리깐 눈꺼풀 안으로 깊은 회한이 들어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께서 결혼을 하실 때 아버지께 받은 선물이었는데.”

그것참 안타깝군.

흩어지는 바람결 같은 목소리에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 * *

원장실 밖으로 나온 대공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원장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황실에서 내 행보를 주시하고 있을 테니 보육원에도 찾아오겠지.’

이미 접촉이 있을지도 몰랐고.

원장에게 로넨이 목에 걸고 있던 보석에 대해 이야기를 흘렸으니 황실에도 적당히 들어갈 테지.

‘너를 살려 두는 것은 황실의 끄나풀 역할을 하기 위해서니, 열심히 움직이라고.’

답례로 보육원에 일손이 부족한 것 같아 믿음직한 일꾼을 몇 두고 가겠다 하니 해쓱해지는 원장의 얼굴이란.

작게 한숨을 내쉰 대공은 걸음을 옮겼다. 그늘이 깊게 진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반짝반짝한 볕을 받아 싱그러운 로넨과 에드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았다.

“아스넬 형!”

“대공 전하.”

대공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별거 아니었는데,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는데,

그 장면이 바로 그가 그렇게나 꿈꾸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 * *

“어떤 구두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에드는 눈앞에 늘어선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곁을 맴도는 구두 가게 주인이 온갖 구두를 내려놓느라고 바빴다.

각양각색의 구두가 에드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적어도 20켤레는 신어 본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구두가 눈앞에 있으니 오히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지경이었다.

에드는 오른손을 들어 목덜미를 주물렀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에드는 보육원에서 나왔을 때 마차가 바로 백작가로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공의 마차는 신발 가게에 도착했고, 대공의 곁을 맴도는 로넨은 에드 앞에 구두를 내려놓으며 감상을 날리느라 바빴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멋진데요.”

“역시 도련님의 안목은 정말 탁월하십니다. 이 녹색 구두는 양가죽으로 만든 구두로 이 옆을 보시면요, 과감하게 라인을 파서…….”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제게 구두를 신겨 보고 좋아하는 로넨이 귀엽다는 인상만 남았다.

“에드는 어때?”

“네, 엄청 좋습니다.”

“그럼 이건?”

“그것도 좋습니다.”

“음, 그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에드의 발에 다 맞춰 주세요!”

아니, 도련님!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금화 주머니를 내던지지 마십시오!

에드는 로넨을 말렸다.

“아, 아닙니다. 도련님. 그렇게 많이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 좋다고 했잖아.”

그거야 로넨이 아무래도 발 페티시…… 아, 아니. 아직 어린 애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구두를 너무 좋아라 해서 그랬다. 구두 가게 사장의 설명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는 그에게 훼방을 놓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물욕에 잠시 눈이 어두워서 다 좋다고 한 것 같습니다.”

“물욕이 있는 게 뭐가 나빠? 에드는 이 구두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걸?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싹 다…….”

또다시 대범하게 금화 주머니를 투척하려는 로넨을 에드가 뜯어말렸다.

“하지만 도련님! 그렇게 계획 없이 다 사면 안 됩니다.”

“형이 사고 싶은 건 사라고 했는데 안 되는 거야?”

이렇게 금화가 있는데?

로넨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로넨이 앞으로 지닐 돈이야 3대가 뭐야. 10대가 놀고먹고 펑펑 써도 남아돌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렇게 갑자기 돈이 생겼다고 펑펑 쓰는 건 로넨의 경제관념에도 좋지 못했다.

“그렇게 돈과 장인의 노동력을 쏟아부었는데 만약 신지 못하는 구두가 생기면 어떡하겠습니까? 신지도 못하고 묵히면 구두가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하나씩 신으면 2달도 안 걸릴 테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말리라는 로넨은 안 말리고 장작을 쑤셔 넣는 대공 때문에 에드는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구두는 일회용이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러니까 오늘은 두 켤레만 사겠습니다. 새 신발은 또 나오니까요.”

“다섯 켤레.”

“두 켤레요.”

“그럼 열 켤레.”

“두 켤레만 사면됩니다.”

“그럼, 여기서 여기까지 다…….”

아, 대공과 로넨이 돌아가며 펀치를 날리니 에드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네 켤레로 하겠습니다, 네 켤레. 이 정도면 정말 충분합니다.”

그러자 대공이 더 힘내기를 바라며 응원하던 로넨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에드.”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에드는 로넨과 머리를 맞대고 수많은 구두들 중에서 네 켤레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건 생각보다 험난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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