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네, 하인이란 모름지기 주인을 보좌하고 주인의 시중을 들며 명을 듣는 것이 의무입니다.”
로넨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에드는 내 친구인데.”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도련님.”
“…….”
“도련님께서 제 접시에 케이크를 덜어 주시는 것보다 말입니다.”
“…….”
“에드, 케이크를 덜어서 내 접시에 올려놔. 이렇게 명하시는 게 제 쓰임새에 맞는 일입니다.”
“하인은 주인을 보좌하고 주인의 시중을 들며 명을 듣는 존재니까?”
역시 머리가 좋았다.
로넨은 제가 한 말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에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창가로 비치는 햇살이 테이블로 길게 늘어졌다. 그 햇살을 따라 로넨의 그림자가 아롱아롱 어렸다.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는 게 맞았다. 서로가 서로의 위치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에드.”
잠시 후 로넨이 입을 열었다.
“네, 도련님.”
“고개를 들어.”
“…….”
“어서, 이게 내 첫 번째 명령이야.”
에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넨이 에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갛고 진중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내 뒤로 물러나지 마.”
“…….”
“이게 내 두 번째 명령이야.”
박력이 넘치는 언사였다. 로넨의 변화에 뿌듯해진 에드의 입가가 실룩였다.
‘아…… 로넨이 벌써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는 도련님이 되었구나.’
그러나 정작 그렇게 명령한 로넨은 에드와 달리 고개가 꺾인 꽃처럼 시들어 갔다.
할 거 다 해 놓고 시무룩해진 로넨을 에드는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 로넨이 생각했던 나와의 관계성이 달라서 그렇겠지만.’
에드는 첨언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았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로넨의 접시에 케이크를 덜어 주며 그렇게 답했을 뿐이었다.
* * *
케이크를 먹고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정수리를 내리쬐었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스한 봄기운이 흐르는 남부 제스티아의 평온한 한낮이었다.
“허어, 로넨 아니니? 맞지, 로넨?”
하지만 그런 상쾌한 기분은 잠시였다.
케이크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던 땅딸막한 남자가 로넨을 아는 척을 했다.
가게를 나서던 로넨이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보육원장님.”
보육원장?
로넨이 3살부터 6살까지 지낸 ‘카이블 보육원’의 원장?
“하하하! 참, 오랜만이구나! 로넨! 소식은 들었단다. 아주 좋은 집안의 친형을 만났다고? 대공 전하께서 고맙다며 후원도 해 주셨는데! 하하하! 그렇지, 그래! 로넨, 네가 이렇게 건강히 형을 만날 수 있던 건 내 덕분이다 이거지?!”
하하하! 웃는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귀가 다 아팠다.
에드는 반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넨의 시야에 보육원장의 시선이 걸리지 않게 살짝 막아섰다. 어릴 때 자신을 힘들게 했던 보육원장을 만나면 로넨이 위축되는 게 당연했다.
카이블 보육원의 원장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제국의 보조금과 귀족의 후원금을 받아먹기 위해 보육원을 세우고 자기 배만 불렸다.
그는 귀족가로 입양될 아이와 암시장에 거래할 아이를 나눠 키웠다. 나이가 점점 차 가는데도 입양이 되지 않으면 암시장으로 내몰았다.
보조금을 받는 인원과 실제 고아의 수가 맞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았다. 가출이라는 변명으로 서류를 휘갈기면 됐으니까.
당연히 원장은 보육원 운영엔 관심이 없었다. 식단은 엉망이었고 걸핏하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구박하기 일쑤였다.
에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제이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 앞으로 나와 섰다.
아스넬 대공은 카이블 보육원이 아이들을 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액을 후원했다. 그리고 그 돈의 흐름을 이용해 원장의 길고 긴 꼬리를 밟아 나갔다. 그렇게 해서 대공은 그가 암시장에 넘긴 아이들을 찾았다.
보육원장은 저 때문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암시장 거래 조직이 소탕당하고 그들과 거래한 계약서를 대공의 손에 직접 쥐여 준 걸 몰랐다.
‘어딜 가나 돈에 환장해서 짐승의 거죽을 덮어쓴 놈들이 넘친다니까.’
에드가 살짝 뒤로 물러나자 제이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쪽은 누구?”
“저는 로넨 도련님을 모시는 시종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카이블 보육원의 원장님이 맞으십니까?”
“에헴, 그렇소만.”
“아, 그러십니까?”
제이논이 화사하게 웃었다.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께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래! 말씀 많이 들었겠지! 나 아니었으면 로넨이 어떻게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 하하하!”
‘저놈의 하하하! 좀 안 하면 안 되나. 완전 소음 공해인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원장이 다시 하하하하! 웃기 시작하자 에드는 절망했다.
“하하하하! 그 추운 겨울날 핏덩이 같은 녀석을 안아 드는데 느낌이 딱 왔다니까?! 이 녀석은 크게 되겠구나! 하하하하하!”
산속에 있던 핏덩이 같은 로넨이 걱정되어서 끌어안은 게 아니라 돈이 될 법하니까 주웠겠지. 그 옆에서 목숨이 위태로웠던 유모를 버리고.
“마침 잘되었습니다, 어르신. 그러잖아도 오늘 어르신을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선물을 잔뜩 싣고요.”
“선, 선무울?!”
“네, 어르신.”
제이논의 대답에 이르텔이 케이크와 마카롱이 듬뿍 담긴 마차 문을 열었다. 백작 저에 가져가겠다며 로넨이 듬뿍 지른 것이었다.
그걸 금은보화가 든 선물로 착각이라도 한 건지 마차에 그득 담긴 선물상자에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르텔이 천천히 마차 문을 닫자 원장의 눈이 팽팽 돌아가고 목울대가 꿀꺽꿀꺽 움직였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어? 어어.”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원장이 대충 대답했다.
“그럼 아쉽지만 볼일이 있다고 하시니 다음에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아, 아닐세! 아,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보러 나온 건데 그, 그건 내일 봐도 되니까! 하하하!”
제이논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저희가 보육원을 방문하는 걸 허락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제이논의 말에 이르텔이 마차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한 둘이라서 그런지 손발이 짝짝 맞았다.
“마차 한번 더럽게 좋네.”
원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비죽이 웃었다. 마차 문을 잡은 제이논이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안내하자 에헴, 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사이에 에드는 살짝 무릎을 굽혀 로넨과 시선을 맞췄다.
“로넨 도련님, 보육원에 가기 싫으시면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저도 일을 마치는 대로 바로 가겠습니다.”
카이블 보육원은 로넨에게 좋은 기억이 남은 장소가 아니었다. 원장은 악질이었고, 부원장은 그런 원장의 끄나풀이었다. 그 때문에 방은 초라했고, 식사 환경은 열악했다.
로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갈래.”
에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등을 곧게 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같이 가시죠.”
에드는 제 손을 잡아 오는 로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직 작고 여렸지만 따스한 그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 * *
보육원에 도착한 로넨이 마차에서 내리자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가왔다.
“좋은 냄새!”
“반짝반짝 빛도 나!”
“완전 예쁘게 생겼어!”
“마, 마차에서 내린 걸 보니 왕자님인가 봐! 말 탄 기사들도 있고!”
삼삼오오 모여든 아이들이 로넨에게 관심을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재잘재잘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는 원장이 입을 열자 단숨에 묻혔다.
“인사 안 하고 예의 없이 뭐 하는 거지? 나는 그렇게 안 가르친 것 같은데?”
다른 마차에서 원장이 내리자 아이들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봤다.
자다 깼는지 뒷머리는 뜨고 목소리는 걸걸해진 원장은 제 딴에 최대한 다정한 척을 했지만 아이들은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보육원 밖에서 나와 노는 아이들이라면 원장이 귀족들에게 보이기 위해 신경을 썼을 텐데도 많이 마른 상태였다.
에드는 케이크 상자를 몇 개 챙겨서 마차에서 내렸다. 시선을 돌리자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랐던 제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작전 허락도 떨어졌고.’
에드는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에이가 누구니?”
“…….”
“여기에 없니? 에이가 보육원 명단에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와 있을 텐데. 선물을 주려면 명단 순서에 맞춰서 줘야 빠지는 사람이 없거든.”
에드가 아이들 사이에서 에이를 찾자 원장이 냉큼 에드 앞을 막아섰다. 짧고 뚱뚱한 덩치로 에드의 시선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하하하! 보육원 명단의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여기에 있는 애들만 챙겨 주면 되지, 크흐음.”
그리고 에드는 보았다. 원장의 이마로 또르륵 굴러떨어지는 식은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