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1화 (21/198)

Chapter 21

〈꼼꼼하게 살펴봐.〉

북부의 주치의까지 불러 샅샅이 살피라 하더니 뺨에 난 상처에는 직접 연고를 발라 주었다.

지난밤 깨진 와인 잔에 살짝 긁힌 자국이었는데 그게 무슨 큰 상처라도 되는 것처럼 신중을 기했다.

그 분위기가 자못 날카로워 에드는 말을 아꼈다. 밥 생각이 없었지만 대공이 이끄는 대로 식당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로넨의 말은 그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나랑 안나, 벤스는 옷을 맞췄고 지오는 마도구를 선물 받았는데 에드는 왜 아무것도 안 사?”

에드는 물을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는 필요한 게 다 있습니다, 도련님. 더 이상 사는 건 사치입니다.”

“왜 필요한 게 다 있어? 에드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찻잎을 사고 실험 도구를 사느라 힘들잖아.”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도련님?’

제 월급이 쥐꼬리만 하긴 했지만 나름 투자를 해서 불렸고요, 받은 게 없긴 왜 없습니까? 제 명의로 세운 건 아니지만 약초 협회 설립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고,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서 맛있는 식사도 하는데.

에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말을 골랐다.

“쥐꼬리는 맞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도련님.”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대공이 옅게 웃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발을 동동거리는 로넨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티 없이 자란 게 감동인지 대공은 로넨이 무슨 말을 해도 웃었다.

대공이 고개를 까딱이자 이르텔의 품속에서 금화 주머니가 나왔다.

“그래요, 에드. 오늘은 로넨과 나가서 마음껏 쇼핑을 해요.”

언제 어디서든 대공의 말 한마디에 금화 주머니가 툭, 툭 튀어나오는 것에 백작 부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드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는 원칙을 세웠다. 약초 연구를 위한 자금 외에는 대공에게 후원을 받지 않기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공돈은 부담스러웠다.

“감사합니다, 아스넬 형.”

그런데 이런 건 또 언제 배운 거지?

손을 내젓는 에드 대신에 로넨이 빠르게 금화 주머니를 챙기며 웃었다.

에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대공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럼 로넨은 오늘 에드와 함께 밖에서 즐겁게 놀다 오고.”

“네!”

시선을 돌린 대공은 백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헤린스 백작 부부는 사업 투자금을 늘려 달라고 하신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니 차를 마시며 그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정중한 대공의 말에 백작 부부의 얼굴이 환하게 달아올랐다.

* * *

‘마운틴스 케이크점’

그렇게 로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에드는 현재 번화가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 앞에 있었다.

가게 입구는 놀이동산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고 마차를 주차 시키기 위한 직원도 따로 있었다.

질 좋은 차와 빵으로 유명해서 남부에서 나는 밀가루와 우유의 반이 이 가게로 오는 것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가게 안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씁쓰레한 원두 향과 달콤한 크림 냄새가 진동했다.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신이 났는지 마차에서 내린 로넨이 쏜살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입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 로넨! 정말 오랜만이에요.”

가게 앞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붙잡힌 탓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표정을 보니 저희 이름을 잊어버리셨군요?”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웃으며 말을 붙이는 걸 보니 어린데도 정치 내공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저는 헤란 후작가의 작은 영식 이드레안입니다. 지난 가을 에센 경마장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었죠.”

“아,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저는 테리아 남작가의 막내 여식 니아입니다. 여름밤 고대 시 낭독회에서 처음 뵈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그 뒤로 자주 뵙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답니다.”

이렇게 로넨과 한두 번 만난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건넨다는 것은 소문이 잘 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북부 대공의 잃어버린 어린 동생이 로넨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원작에서 로넨은 어느 자리에 참석을 해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헤린스 백작 부부가 로넨을 소개를 할 때 ‘부족한 이 아이가 헤린스 백작가에서 입양한 아이랍니다.’ 이딴 식으로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시도 때도 없이 로넨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고아라는 선입견을 심어 줬다.

하지만 보라. 헤린스 백작 부부의 심통을 벗어나 홀로 선 로넨은 멋있었고, 잘생겼고, 귀여웠다.

도대체 어디가 부족한 건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뒤로 성큼 물러난 에드는 고개를 숙인 채 로넨과 지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기사와 하인, 그리고 하녀가 일제히 로넨의 뒤로 물러나 기다리자 로넨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로넨의 존재감이 이 정도지.’

그동안 헤린스 백작가의 만행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지 그런 방해만 없다면 햇살 한 스푼, 물 한 모금만 받아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얼떨떨하게 인사를 하는 로넨을 보며 에드는 옅게 웃었다.

* * *

가게 안으로 들어선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종업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은 후 로넨이 주문을 하자 금방 케이크가 나왔다.

초콜릿 범벅인 케이크, 생크림으로 뒤덮인 케이크, 블루베리 잼이 흘러내리는 케이크…… 테이블 위를 갖가지 케이크가 점령해 나갔다.

‘주문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닐까?’

에드가 케이크들을 심란하게 내려다보며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로넨이 딸기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에드 앞으로 밀었다.

“에드, 먹어 봐.”

“아, 아닙니다. 도련님 먼저 드십시오.”

“에드가 먼저 먹어.”

서로 먼저 먹으라며 옥신각신하다가 로넨이 케이크를 한 입 먹고 나서야 에드도 포크를 들었다. 하나하나가 침샘을 절로 자극하는 비주얼이었다.

입 안에 떠 넣은 케이크가 사르르 녹자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케이크 시트와 달면서도 탱글탱글한 딸기 과육, 입에 착 감기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생크림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었다.

‘이래서 번화가에서 제일 유명한 가게구나.’

이르텔과 제이논을 비롯한 기사들도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케이크를 먹는데 심취해 있었다.

“맛있어? 에드?”

“네, 맛있습니다. 도련님.”

“진짜?”

“네.”

이번엔 초콜릿 케이크를 에드 앞으로 밀어 주며 로넨이 웃었다.

에드는 그런 로넨을 잠시 바라보다 말없이 케이크를 먹었다. 그러자 로넨도 안심하고 케이크를 먹는 데 집중했다.

로넨이 갖가지 케이크를 음미한 뒤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에드는 물었다.

“로넨 도련님, 맛있게 드셨습니까?”

“어, 에드는?”

“저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에드가 답하자 로넨이 웃었다. 기분 좋은 미소였다. 에드는 기분이 좋아진 로넨을 살피다가 운을 뗐다. 아까부터 미뤄 뒀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저, 그런데 도련님.”

“어, 에드.”

“아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습니까?”

로넨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대답을 회피했다.

말은 안 했지만, 행동에서는 다 티가 났다.

가게 앞에서 지인들을 만났을 때 대화가 길어지자 표정이 불퉁하게 변했고 지금도 별로 그 이야기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아 했다.

에드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기분이 왜 안 좋으셨습니까, 도련님? 영애와 영식들이 말을 걸어서요?”

“…….”

로넨이 대답을 하지 않고 뚱하게 에드를 바라봤다.

“그런데 영애와 영식들은 로넨 도련님과 친해지고 싶으셔서 말을 거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도련님, 조금만 마음을 여시면 분명 좋은 친구가…….”

그러더니 에드의 말을 톡 잘랐다.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닌데?”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왜 기분이 언짢으셨습니까?”

“에드.”

“네, 도련님.”

“나랑 있는 게 창피해?”

아니, 또 이건 무슨 소리랍니까? 도련님?

“아까 에드가 뒤로 물러났잖아. 영식과 영애가 아는 척을 하자.”

“그거야.”

“그거야?”

“……그거야 저는 하인이지 않습니까.”

로넨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저는 헤린스 백작가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지만 하인의 의무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인의 의무?”

어쩌면 잘된 일인지 몰랐다. 이런 주제로 로넨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에드는 이번 기회에 로넨과의 사이를 적당히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로넨과 친밀하게 지내는 건 좋았지만 그건 대공이 등장하기 전까지였다. 로넨이 헤린스 백작가에서 학대를 받고 고립된 생활을 벗어난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게 지내면 안 되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고 북부에 가서는 또 북부만의 생활 방식이 있을 것이었다.

로넨은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테고 많은 부분이 변할 터였다. 그러니 이제부터 귀족과 귀족이 아닌 사람들을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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