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
“설마 그 쥐새끼가…….”
“네, 대공도 아시는 그 쥐새끼가 엉큼하게도 백작가 본관 방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불 위에 널린 게 그 쥐가 탐한 물건이란 말이군요?”
대공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물건들은 어디에서 찾으신 겁니까?”
“이전까지 쥐새끼가 지내던 별채의 방 마룻바닥에 숨겨 놓을 걸 발견했습니다.”
“별채의 방 마룻바닥이라.”
대공의 시선이 이불 위의 반짝이는 장신구로 향했다. 네이센은 잡힌 팔 때문에 입가가 바르르 떨렸지만 대공은 그의 손목을 잡은 힘을 풀지 않았다.
“이르텔.”
“네, 대공 전하.”
“이불에 놓인 장신구를 가져와.”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르텔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불에 널브러진 장신구를 챙겨 들자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타원형 금 단추와 붉은 루비, 그리고 황금 늑대가 어우러진 배지 두 가지.”
대공의 명에 따라 이르텔이 장신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움직여 대공의 눈앞에 손을 펼쳤다. 찬찬한 시선으로 장신구를 확인한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뭔가 잘못 안 것 같군요, 소백작.”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루비가 달린 배지는 내가 백작가에 찾아온 날 로넨이 입고 있던 옷에 달려 있던 장신구입니다. 푸른색 옷에 달렸던 장신구가 눈에 띄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
“듣기로는 가문의 상징이 루비인 셀튼 남작가와 가문의 문장이 황금 늑대인 헤린스 백작가의 결합을 뜻깊게 새긴 배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인지요?”
“그런데 그날 사고가 있지 않았습니까? 백작 부인은 절대 독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부인께 로넨이 입었던 옷을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혹시 독의 잔재가 튀어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하, 하지만 그 옷은.”
“네, 백작 부인이 느낌이 좋지 않은 옷 같아서 이미 태워 버렸다고 하더군요.”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던 네이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옷을 요구한 건 5일 전, 백작 부인이 옷을 태워 버렸다고 한 건 6일 전.”
“…….”
“그런데 그 기간 내내 병석에 누워 있던 에드가 언제 일어나 이 장신구들을 챙겼다는 건지 의아하군요, 소백작?”
“……그, 그러니까 그게.”
“에드가 누워 있던 내내 밖을 지킨 건 북부의 기사들이죠. 혹시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들이 장신구를 훔쳤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수 없어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건지 내가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명예로운 북부 기사들을 의심하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당연합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오, 오늘 새벽! 맞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북부 기사들이 방 앞에 없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옷은 태웠어도 보석이나 장신구는 따로 보관하기도 합니다. 그걸 안 에드가 방을 나서서 훔쳤을 게 틀림없습니다.”
대공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 말은 지난밤에 백작가에서 에드의 방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북부 기사들이 피곤할 것 같아 오늘은 백작가의 기사들이 에드의 방 앞을 호위하겠다면서 소백작이 먼저 제의했는데, 설마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까?”
“아, 아닙니다! 헤린스 백작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신의를 결코 가볍게 여기는 가문이 아닙니다! 분명히 저희는 에드의 방 앞을 지켰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나는 헤린스 백작가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에드가 아무도 몰래 방을 나선 건 아니겠군요. 에드가 방을 나서 장신구를 훔쳤다면 백작가 기사가 현장에서 잡았을 테니.”
“…….”
“그럼 아팠던 날 빼고, 지난밤을 빼면 에드가 언제 그걸 챙겼을까요?”
대공의 낮아지는 음성에 네이센이 침을 꼴깍 삼켰다.
대공이 말을 이었다.
“어제 낮엔 외출을 해서 에드가 백작저에 없었고, 저녁에는 나와 함께 식사를 했고, 그 후엔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백작가에서 호위를 했는데 그렇다면 대체 언제?”
“그, 그게.”
“그런데 사실관계를 잘 따지지도 않고 손부터 올리다니.”
대공의 눈이 가늘어지자 네이센이 펄쩍 뛰었다.
“손, 손을 올리다니요? 거짓말을 하며 뒤로 샐샐 빠지기에 그냥 앞으로 끌어오려고 했을 뿐입니다.”
대공에게 잡힌 팔을 부들부들 떨며 네이센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에드가 아팠던 건 4일째,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5일째, 방 밖으로 기어 나온 건 6일째, 오늘은 7일째.’
그사이에 비는 시간이…… 비는 시간이…… 내내 들러붙었던 대공의 붕어 똥들이 따라붙지 않고 에드 혼자 있을 수 있던 시간이…… 아!
네이센의 눈이 번쩍 떠졌다.
혼자 있을 만한 시간이 딱 한 번 있었다.
“그, 그날 밤! 왜 그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날 밤?”
“네! 에드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방에 불을 올렸던 밤! 말입니다. 방을 뜨겁게 데우고 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밖도 조용히 유지하라며 기사들도 물리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날 밤.”
“네! 그날 밤 말입니다! 그날 밤 자신이 혼자인 걸 알고 훔쳤을 게 틀림없습니다!”
대공이 잡고 있던 네이센의 팔을 탁, 떨쳐 냈다. 그리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안 그래도 가까웠던 서로의 거리가 더 붙었다. 그에 부담감을 느낀 네이센이 뒤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마치 아까 그가 에드의 이마를 손으로 꾹, 꾹 누르며 뒤로 밀어내던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네이센 소백작.”
“네, 네. 대공 전하.”
“북부는 추운 곳입니다.”
얼마나 뒤로 쭉쭉 밀렸는지 어느새 방을 가로지른 네이센의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그,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뜨거운 불로 방을 데워도 몸의 한기가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 그렇습니까?”
그,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왜 지금 하시는지?
네이센의 어벙한 표정에 대공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런 일이 종종 있기에 북부 사람들은 압니다. 밤새 장작을 때는 것보다, 혹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때로는 사람과 사람의 몸을 맞대는 것이 몸에 온기를 돌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몸을 맞대진 않습니다.”
네이센을 벽까지 쭉쭉 민 대공이 목까지 꼼꼼하게 채운 셔츠의 단추를 풀어 손가락으로 앞섶을 살짝 끌어내렸다.
그러자 목과 쇄골 부근에 붉게 물든 울혈들이 보였다. 몇 개나 되었다.
대공이 벽에 손을 짚었다. 고개를 숙여 네이센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그럴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사람하고만 체온을 맞대거든.”
낮은 목소리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았다.
대공이 뒤로 살짝 물러나자 네이센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것은 경고였다.
그날 밤 에드의 곁을 지킨 건 대공 자신이었고, 대공에게 에드는 하인 나부랭이가 아닌 스스로 몸을 맞대 체온을 끌어 올릴 만한 사람이었으며, 더 이상 에드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며 수작을 부리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 * *
“그런데 에드는 왜 아무것도 안 사?”
로넨의 말은 뜬금없었다.
“……네?”
대공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에드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지금 남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날벼락처럼 날아든 네이센 때문에 일진이 사납겠구나 했는데 대공 덕분에 지금 너무나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대공의 말을 다 듣지는 못했지만 얼추 내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방을 뜨겁게 데웠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게 설마 꿈이 아니었던 걸까?
벽난로의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던 그때의 꿈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자 밥이고 뭐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머리만 쥐어뜯고 싶어졌다.
도대체 대공과 소백작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네이센은 볼일이 있다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딱 봐도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아침 일로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대공과 대화를 마쳤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르륵 주저앉더니 영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르텔은 그런 네이센을 일으켜 데리고 나갔고, 대공은 에드의 손목을 잡고 서재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