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그래?”
네이센은 에드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식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친 채 와인을 즐기는 것이 다행히 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답을 마친 에드는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하며 식당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소백작님.”
“왜? 물 마신다며?”
그러나 네이센의 말이 뒤로 빠지려는 에드의 발목을 콱, 움켜잡았다.
“아닙니다. 뒤뜰에 가서 물을 뜨겠습니다.”
“에드.”
“네, 소백작님.”
“내가 오늘 얼마를 땄는지 알아?”
네이센이 잔에 와인을 따르며 웃었다.
“돈이 돈을 낳고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딱 맞아. 10번을 잃어도 돈만 있으면 11번째 기회가 생기거든. 나는 놓치지 않고 그걸 잡았단 말이지.”
“…….”
“그런데 에드, 너는 그 기회를 누구 덕분에 잡았지?”
에드는 시선을 내리깔고 네이센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식탁에 엉덩이를 걸쳤던 소백작이 일어나 점점 가까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간 네가 입은 옷, 네가 쓰는 방, 네가 드나드는 식당, 네 입으로 들어가는 물. 그중의 하나라도 백작가의 것이 아닌 게 있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북부 대공의 힘까지 얻어 훨씬 더 강력해진 백작가에서 너에게 들이는 시간, 돈, 정성…… 네가 뭘 했다고 그걸 누리고 있는 거지? 로넨을 데려와 키운 건 우리 부모님이고 철없는 동생에게 공을 들인 건 나인데?”
“…….”
“우리 백작가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가도 북부 대공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을 네가 대체 뭘 했다고 병간호를 받고 식사 자리에 함께하지?”
네이센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그만큼 더 뒤로 물러나던 에드는 어느새 식당 밖 복도로 밀려 나와 있었다.
“그런데 감사해하는 것도 없이 이제는 감히 내 그림자까지 밟으려고 들어?”
어느새 에드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죽이던 에드는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건방진 새끼.”
네이센이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집어던졌다. 에드를 향해 날아온 투명한 잔이 퍽, 벽에 부딪히며 깨지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
벽에 부딪힌 유리 조각이 스쳤는지 뺨으로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것 같으면 법은 왜 있고 벌은 왜 있겠어?”
“…….”
“안 그래? 에드? 그러니 정신 차리고 잘해야지? 대공이 머물러 봐야 백작가에 얼마나 머무르겠어? 너를 평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분위기를 잘 살펴서 줄을 제대로 서라는 말이었다.
에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네, 소백작님.”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이 정도로만 하고 아침에 보자고, 에드.”
비죽이 웃은 네이센이 와인과 새 잔을 챙기기 위해 식당으로 돌아갔다.
벽에 몸을 기댄 에드는 네이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붕 떴어.’
대공을 만났다는 생각에.
깨진 컵에서 흐른 와인이 붉은 카펫을 적셔 어둡게 물들였다. 몸을 굽힌 에드는 깨진 유리 조각을 정리했다.
* * *
그날 이른 아침이었다.
“야, 일어나.”
새벽에 잠을 설쳐 늦게 잠이 든 에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두껍게 쳐진 커튼 틈으로 아침 햇살이 여리게 들어왔다.
그 순간, 그가 덮고 있는 이불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묵직한 나무상자가 뚝, 떨어졌다.
그 바람에 입을 떡 벌린 나무상자에서 금 단추며 은 단추가 통통 튀어나와 데굴데굴 굴렀다.
“변명해야지? 별채의 네 방에서 나온 것들인데.”
머리맡에선 팔짱을 낀 네이센이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에드는 긴 한숨을 집어삼켰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불 위를 구르는 보석들은 헤린스 백작가 문장이 세공된 장신구들이었다.
지난밤 소백작의 행동을 보고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짐작은 했다.
네이센이 보기에 자신은 그냥 우연히 백작가에서 일한 덕에 북부 대공이 나눠 주는 달콤한 과실을 뺏어 먹는 기생충에 불과했으니.
‘내가 대공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몰랐고, 로넨을 돌본 거야 하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라 생각할 테니까.’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아서, 어쩌다 로넨의 하인이 되어 북부 대공의 눈에 띈 것이라 생각할 테니 얼마나 눈꼴이 시릴까?
그 운이란 것도 우리 부모님이 로넨을 입양해서 잘 키운 덕이었는데 도대체 저놈의 말단 하인은 뭘 잘했다고 대공의 관심을 받는 건지 의아해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에드, 너는 그 기회를 누구 덕분에 잡았지?〉
새벽에 네이센이 한 말도 결국 그 생각을 담고 있었다. 도대체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에드는 시선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그러니 내 평판을 떨어뜨리고 로넨과 대공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로넨의 옷에 달렸던 장신구로 공격할 줄이야.’
안 좋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에드는 그 단추들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집사 케릴이 다람쥐처럼 모아 둔 장신구를 내던지는 걸 보니 어제 제이논이 아이들을 통해 퍼뜨린 노래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노래를 들었다면 아무리 소백작이라도 헤린스 백작가의 집사와 이자르 의상실에서 맺은 모종의 관계를 눈치챌 수 있을 터.
도박장에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소문이 빨랐다.
‘그런 소문을 들어서 네이센이 돈을 따고도 기분이 좋지 않았구나.’
아마 이 물건들은 그 뒤로도 화가 풀리지 않은 소백작이 집사에게로 가 그간 챙긴 물건들을 내놓으면 봐준다 하고 들고 온 장신구들이겠지. 저에게 죄다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이센이 에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꾹 밀었다. 그 힘에 몸이 툭, 툭 뒤로 밀렸다.
어느새 등이 벽에 닿은 에드는 몸에 힘을 뺐다.
오늘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뺨 한두 대는 내줘야 네이센의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보는 눈이 있으니 그도 필요 이상으로 요란하게 굴지는 않을 테지만 적당히 소동을 벌일 게 보였다. 북부 대공의 눈과 귀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일부러 방문을 열어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북부 대공, 이 말단 하인이 뒤로 뭘 챙기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앞에서는 알랑방귀를 뀌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이놈을.’
그러니 그렇게 공을 들일 새끼가 아니란 말이지.
이를 알리려는 목적일 게 뻔했다.
어차피 아니라고 말해 봐야 들어 먹히지도 않을 테고, 거짓 증인들도 이미 준비해 놓았을 터.
‘……대공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무작정 쫓아내진 않겠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지은 에드는 몸에 힘을 뺐다.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내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 봐야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란으로 자신과 시선을 맞추며 느른하게 웃던 대공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다시 신뢰를 쌓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
다크 초콜릿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입 안이 씁쓸해졌다.
‘차라리 낫자마자 북부로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에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제 말 한마디에 대공이 북부로 떠날 리 없었다. 황제가 로넨을 찾은 대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파티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도는 마당에 북부는 무슨 북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황실의 대접에 답례를 할 준비도 해야 했다.
그러니 이건 백작 저에 있는 한 늦든 빠르든 어차피 닥칠 일이었다. 적당히 맞고 끝내자.
에드는 네이센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며 눈을 감았다.
“…….”
어,
음,
……으응?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감은 눈앞으로 그림자가 어룽져 금방이라도 타격이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머리, 어깨, 무릎, 발 어디에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시원한 바람결도 느껴졌다.
‘이상하네. 이쯤이면 정강이를 까여도 두 번은 까이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고개를 갸웃한 에드는 실눈을 떴다.
그러자 곧고 너른 등이 눈앞에 보였다. 번쩍 들어 올린 네이센의 팔은 커다랗고 단단한 손에 붙들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 아스넬 대공 전하.”
네이센이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난 대공이 에드의 앞을 지켜 주고 있었다.
“네이센 소백작, 이른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언, 언제 방에 들어오신 거지?’
에드는 작게 숨을 삼켰다.
“그, 그게 말입니다, 대공 전하. 헤린스 백작가에 귀한 양식을 갉아먹는 쥐가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침부터 그 쥐새끼를 잡으려니 조금 소란스러워진 모양입니다.”
‘그 쥐새끼를 가리키는 건 당연히 나겠지.’
너른 등은 미동이 없었으나 대공의 얼굴은 분명 찌푸려져 있을 게 틀림없었다.
“설마 그 쥐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