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화 (18/198)

Chapter 18

“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계약서를 읽던 안나와 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그런 내용이네요.”

사실 눈앞에 놓인 계약서에는 어려운 단어가 많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벤스와 안나는 그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에드의 눈치를 봤다. 에드의 방에 책자가 보이면 글도 못 읽는 게 허세를 떤다며 에드의 머리를 책자로 툭, 툭 때리며 무시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 에드 앞에서 글을 잘못 읽고 더듬대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확인하셨으면 사인하시면 됩니다. 대공께서 백작가를 후원하는데 세금 문제가 끼어 있어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거든요.”

계약서의 윗줄도 다 읽지 못한 안나와 벤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저, 그런데 이거 사인을 꼭 지금 바로 해야 합니까?”

“아…….”

말끝을 살짝 늘인 이르텔이 친절하게 답했다.

“물론 나중에 계약서를 작성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맞춘 옷은 한 벌도 남김없이 취소하셔야 합니다.”

“네? 취소요?”

“모, 모두 다요?”

벤스와 안나가 연달아 말했다.

“네, 정말 유감스럽지만 후원에는 세금 문제가 엮여 있거든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제가 계약을 취소하고 오겠습니다. 기회는 다음에도 있을 테니…….”

“아, 아뇨!”

벤스가 다급히 외쳤다.

“여, 여기에 하면 됩니까?”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그가 계약서에 빠르게 사인을 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안나도 얼른 깃펜을 손에 쥐었다.

“여기에 하시면 됩니다.”

계약서를 손수 넘겨 주며 이르텔이 손가락으로 짚어 주자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듯이 사인을 했다. 진하고 힘이 넘치는 서체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옷에 박힌 보석들을 들고튀기만 해도 남는 장사라고 그들은 생각하겠지만 그건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쌍방의 계약 관계는 한쪽이 끊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었으니.

뭐 대공이 쉽게 놓아줄 리도 없고.

“수고하셨습니다.”

계약서를 갈무리한 이르텔이 말하자 안나와 벤스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이 계약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로넨 도련님을 잘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만 진행되는 후원이니 말입니다.”

아무나 하는 계약이 아니라는 것처럼 은밀하게 속삭이는 이르텔의 말을 안나와 벤스가 경청했다.

“혹시라도 계약 내용이 새어 나가면 다른 곳에서 후원해 달라고 손을 뻗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들을 위한 후원이 줄어들게 되니 꼭 함구해 주십시오.”

자신들이 받을 후원이 줄어든다는 말에 벤스와 안나가 힘차게 끄덕였다.

그 비밀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결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 * *

안나와 벤스가 사인한 계약서에는 헤린스 백작가가 대공에게 빚을 지면 그들이 함께 갚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보증과 비슷했다.

물론, 그럴 때 북부 성을 찾아오면 성심성의껏 돕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제이논이 뚝딱뚝딱 만든 계약서는 빈틈이 없었다.

“뭐가 이렇게 많지?”

몸 치수를 다 잰 로넨은 옷을 장식할 장신구를 고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옅게 웃은 에드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 후, 나선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의상실 밖으로 나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제이논이 망토를 벗으며 머리를 가볍게 털어 내고 있었다. 안나와 벤스를 호위한 제이논은 의상실에 들어오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에드가 한 부탁 때문이었다.

에드와 눈이 마주치자 제이논이 가지고 놀던 금화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받으며 웃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잘하고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것쯤이야.”

제이논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렇습니까?”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헤이 백작가 집사랑 이자르 옷가게 사장이랑 얼레리 꼴레리, 옷가게 사장은 금 단추를 꿀꺽하고 백작가 집사는 은식기를 품에 넣었네.”

‘……음, 이게 이렇게나 음울한 노래였던가?’

제이논은 다른 건 잘해도 노래 실력은 조금 아쉬운 것 같았다.

백작가를 나서기 전에 에드는 제이논과 머리를 맞댔다.

〈발 빠르게 몇 가지 소문을 내 줄 수 있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죠. 마을 아이들과 신문 배달부와 구두닦이, 꽃을 파는 친구들을 동원하면 소문을 퍼뜨리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아, 하며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량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면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노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건 노래에 재능이 없는 이들도 금세 따라 부를 수 있는 쉽고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그간 헤린스 백작가의 집사 케릴은 백작가 창고에서 포도주를 빼내거나 은식기를 날름하는 방법으로 야금야금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

또한, 이자르 의상실과 결탁해 수수료를 받았다. 백작 부부나 사용인의 새 옷을 맞출 때 이자르 의상실을 추천하고 맡겼다. 헌 옷을 처분할 때 옷에 달린 장신구를 품 안에 몰래 넣기도 했다.

이자르 의상실이 유명해진 데에는 이런 식의 귀족가의 집사들과의 결탁이 컸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집사에게 떼어 주는 수수료에서 발생하는 손해를 메꾸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품의 질이 떨어졌다.

갑옷을 생산할 때도 그랬다. 겉만 멀쩡해 보이는 저품질의 갑옷을 입소문으로 부풀리며 사업체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 거품은 의상실에 불이 났을 때 확 꺼진다.

원작에서 로넨이 독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 머지않은 미래였다.

작은 불이었기에 이자르 의상실이 완전히 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작은 불 때문에 의상실에 장식되어 있었던 갑옷이 녹아내리자 현장을 수습하던 남부 중앙 치안대장이 수상하게 여긴다.

다른 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쳐도 갑옷은 그럴 수 없었다.

갑옷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필수품이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신경을 썼다. 그 때문에 지방마다 최소한의 품질 규정이 있었다.

이 사실은 치안대장을 통해 상부의 귀에 들어가게 됐고, 이 때문에 그간의 만행이 밝혀진 이자르 의상실 주인 부부는 호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식품’이라 그랬다고 항변했지만 수사가 진행되니 이중장부며 뇌물 장부며 있는 대로 튀어나와 매만 더 벌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알음알음 번지던 ‘의상실과 결탁했던 집사들의 소문’이 양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산불처럼 크고 빠르게 번지는 소문이었다.

에드는 그 일이 생기기 전에 소문을 낼 예정이었다. 헤린스 백작가 집사와 이자르 의상실에서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다는 노래를 통해서.

그럼 일이 터진 후에 제일 먼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사람은 케릴이었다.

헤린스 백작가는 이자르 의상실의 단골이었고, 원래 처음 매를 맞는 놈이 제일 아프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러면 설사 대공의 행보가 이상하다고 의심을 하더라도 케릴이 백작가에서 발을 빼기는 쉽지 않게 된다. 재취업이 어려울 테니.

‘이자르 의상실은 계약으로, 안나와 벤스는 후원으로, 케릴 집사는 미래를 담보로 잡아 발을 묶었고…… 그럼 다음은…….’

에드는 느릿하게 머리를 굴렸다.

금빛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였다.

* * *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에드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어둠이 깃든 푸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진 방은 어둡고 조용했다.

‘아, 목이 마르네.’

혼몽한 정신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에드는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기 귀찮아 그냥 자고 싶었는데 한 번 인식된 갈증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낮에 부지런히 움직인 탓일까?

피로함에 일찍 잠들었는데 그 바람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손을 더듬거리며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들자 아…… 이런. 물이 없었다.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응,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낸 에드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어둑한 불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선 에드는 작게 하품을 하며 식당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환한 불빛이 눈동자를 찔렀다.

‘……아.’

에드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뭐야? 에드? 이런 새벽에 쥐새끼처럼 뭐라도 훔쳐 먹으려고 나왔어?”

요 며칠 편하게 지냈다고 해이해졌지. 긴장이 완전히 풀려 가지고. 뒤뜰에 가서 물을 떠도 되건만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다니, 잠결이라 치더라도 정신머리가 너무 느슨해졌잖아.

에드는 식당 안으로 들였던 발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습니다, 소백작님.”

먼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있던 네이센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에드를 올려다보았다. 입가에는 비뚜름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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