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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6화 (16/198)

Chapter 16

독에 당해 앓아누웠을 때도 그랬다.

얼마나 독한 독이었는지 물 한 모금, 약 한 방울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끙끙거리면서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통을 삭이는 모습은 유약할 거라고 생각한 그의 첫인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확 올랐던 체온이 갑자기 떨어져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아 내는 모습에 아스넬은 좀처럼 에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랬겠지.

방에 불을 활활 피워도 쉽게 오르지 않는 체온에 그를 다독이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붙여 기운을 불어 넣어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낫길 바란 것은.

다음 날 새벽,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에드가 말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볼 때 아스넬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어둑한 여명의 그늘에서 가슴을 관통하는 묘한 벅참을 느꼈다.

그리고 맥없이 스르륵, 다시 감기는 눈꺼풀에 대공은 에드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병간호를 하겠다며 내내 붙어 있던 로넨이 잠든 새에 다른 방에 데려다 놓고 곁을 지킨 하룻밤이었지만, 그 짧은 밤에 아스넬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드는 그날 밤의 일을 홀라당 까먹은 듯했다. 아니면 민망해서 까먹은 척을 하거나.

자신만 보면 쭈뼛쭈뼛, 북부성에 맺히는 고드름처럼 뻣뻣하게 얼어붙긴 했지만 그걸 기억한다면 에드의 성격상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잊어버렸을 확률이 더 높았다. 하긴 고된 시간이었으니 기억이 온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나도 그에 맞춰 적당히 넘어가 주는 게 맞긴 한데…… 아스넬은 입술을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그래도 콕, 콕 찌르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지.’

춥다고 척 들러붙다가 목 부근을 잘근잘근 씹어 물기까지 했는데, 그것도 잊은 걸까? 아니면 잊은 척을 하는 걸까?

아스넬은 목까지 단추를 꼼꼼히 채워 올린 셔츠 깃을 정리했다.

요 며칠 머리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목덜미가 땅기고 두통이 일었는데 에드를 볼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먹구름을 밀어내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마치 밝은 햇살에 노출된 것 같았다.

콩, 콩.

밖에서는 정신을 차리겠다며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쓰는 건지 유쾌하지 못한 소리가 울렸다. 아스넬은 웃음기가 달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렇게 요령 없이 박으면 아프기만 할 텐데.’

삐걱, 소리를 울리며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 * *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에드는 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대리석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억울했다. 진짜로 아니었다. 대공과 눈이 마주치면 긴장이 되어서 시선을 내리깔았을 뿐인데 그런 혼선을 불러일으키다니? 하아아.

그러나 오해는 깊었고 달아오른 에드의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에드는 문에 이마를 콩, 콩 박았다. 얼른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그런데 어째 눈앞에 별만 보이고 정신이 더 사나워졌다. 자꾸만 눈앞에 대공의 붉은 입술만 동동 떠다녔다.

그에 고개를 뒤로 더 뺀 에드는 호기로운 양처럼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대공과 대화의 끝을 맺어야 했다.

“……어?”

그런데 이마에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딱딱한 나무 촉감이 아니었다. 단단했지만 부드럽게 이마를 감싸는 듯한 예상치 못한 감각에 에드는 눈을 깜빡였다.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확 뺐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대공이 문과 에드의 얼굴 사이를 손바닥으로 막고 있었다.

‘아, 아니. 언제 나오셔서 앞발을 들이대신 거지?’

“헉, 대,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에드, 괜찮습니까?”

옅게 웃는 얼굴 사이로 드러난 어이없다는 표정에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그렇게 자학하지 않아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테니까.”

“자, 자학까지는 아니고요.”

대공이 더 말해 보라며 빤히 바라보기에 에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손목을 잡아 서재 안으로 이끄는 대공의 손길에 반항하지 않고 끌려갔다. 아까 앉았던 소파에 도로 앉혀지자 발끝이 꼼질거렸다.

볕을 받아 황금색 밀밭같이 반짝이는 에드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준 대공이 나지막이 말했다.

“제이논.”

“네, 대공 전하.”

열린 문틈으로 제이논이 빠끔 고개를 들이밀었다. 문에 냅다 머리를 박는 에드의 터프함에 아직 적응이 덜 되었는지 멀찍이 서서 분위기를 살폈다.

“계약서를 준비해. 불공정 계약이지만 알아차리기 힘들게.”

“오늘 저녁 안으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제이드 공작과 자리를 마련해 보고.”

“네, 알겠습니다.”

멀찍이 물러나 있긴 했어도 들을 건 다 들은 건지 제이논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계획은 이미 다 머릿속에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에드는 똑똑하고 잔머리도 잘 굴리는 제이논을 믿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 오늘 로넨과 의상실에 가기로 했죠?”

“네, 대공 전하.”

“그래요, 에드. 즐겁게 다녀오고 로넨을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대공 전하.”

가볍게 고개를 숙인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했던 바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나자 긴장이 풀렸다. 다리에 힘이 쪼옥 빠진 느낌이었다.

“아, 그런데 에드.”

어렵고 어색한 자리였다. 더 이상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에드는 빨리 서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대공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에드는 뒤로 돌았다.

“네, 대공 전하.”

“로넨의 본명이 로넨케아즈 린든인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 그건 말입니다.”

에드는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두었다. 소설에서 봤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3살 때 가족과 헤어진 로넨은 당연히 자신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는 건 로넨, 로넨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가족의 목소리뿐이었다.

보육원에선 로넨이 자신을 로넨이라고 말하는 걸 알고도 장부에 다른 이름으로 작성했다. 이 때문에 대공이 로넨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로넨 도련님께서 잠꼬대로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걸 몇 번 들었습니다. 아마 가족이 다정하게 불러 주는 이름이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고마워요, 에드.”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 로넨 도련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로넨 도련님께서는 가족의 사랑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에드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대공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맑은 미소였다.

“이런 환경에서 로넨이 어떻게 밝게 자랄 수 있었을까, 의아했는데.”

“…….”

“정말 고마워요, 에드.”

로넨과 함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극찬은 과했다.

원래 천성이 밝고 착한 로넨이었다. 그렇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자신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대공을 만났을 때에도 로넨은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을 만끽했지, 자신이 힘들었던 점이나 구박한 사람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괴롭힘을 괴롭힘으로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본바탕이 워낙 순수하고 상냥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로넨이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명제가 붙긴 했지만.’

그 전에 못된 놈들을 조금은 굴려도 괜찮겠지.

에드는 로넨을 꾹꾹 밟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인물들을 떠올렸다.

“……저, 그런데 대공 전하.”

“네, 에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헤린스 소백작과 세네르 경은 한 번쯤 꽉꽉 밟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온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더는 없습니까?”

“음, 세네르 경의 부하들까지는 물리력을 행사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세네르와 함께 로넨을 구박하는데 스스럼이 없었으니.

거기까지 말한 에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긴장이 풀려 부드럽게 풀어진 그의 어깨로 따스한 바람이 내려앉았다.

* * *

백작가 본관을 나온 에드는 서쪽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로넨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며칠 전 대공이 동생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한 황실에서 축하연을 준비하겠다는 연락을 했다. 그에 로넨의 옷을 맞추러 의상실에 가는 날이었다.

마차 곁에는 로넨과 이르텔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마부인 메튜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흠.’

에드는 가늘어진 눈으로 마차 앞에 놓인 휴대용 발판을 내려다보았다.

‘높이가 높은 마차를 오르고 내릴 때 필요한 발판이었지만 메튜는 평소에 그런 걸 준비해 두지 않았단 말이지.’

아직 어린 로넨이 마차에 달린 발판만 밟고 힘겹게 마차에 오르곤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멀뚱멀뚱 서서 마차에 오르는 로넨을 비웃었다. 에드가 휴대용 나무 발판을 만들어 내려놓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로 뻥, 뻥 차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마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떡하라고 아무거나 들이대!〉

손으로 에드의 이마를 꾹꾹 밀면서 화를 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확 달라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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