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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화 (15/198)

Chapter 15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드가 말하는 계약서의 종류를 단번에 파악했다. 로넨을 괴롭혔던 이들의 발목을 붙잡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백작가에는 백작 부부와 소백작, 그리고 열두 명의 사용인이 있었다. 최소 12장의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들 중 서너 명만 빼고 로넨을 괴롭혔다는 뜻이 되었다.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군요.”

“잘 알고 있습니다, 대공 전하. 전하의 기분이 얼마나 참담하실지…… 하지만 그렇기에 참으셔야 합니다.”

“…….”

“한 번에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건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들을 해치면 속이 뻥 뚫릴 테고요.”

“그걸 안다면 대화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할까요?”

“하지만 로넨 도련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공 전하.”

톡, 톡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던 대공의 손가락이 멈췄다.

에드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용서하라거나 봐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로넨 도련님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

“그래야 진정한 복수를 하거나 용서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원작에서 친형을 다시 만났을 때 로넨은 백작가 사람들을 벌하지도, 용서를 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무시했을 뿐이었다.

흑화를 하기 전에는 대공이 그들을 손보려고 할 때도 무심하게 말했다.

〈손을 댈 가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에드도 마음 같아서는 대공 의견에 한 표 던지고 싶었지만, 이건 로넨이 끝맺어야 할 일이 맞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대공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

“로넨을 잘 보살펴 준 답례로 백작가에 후원을 하고 싶은데 세금 문제가 엮여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분노가 일렁이던 대공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셀튼 남작은…….”

대공의 말끝이 살짝 낮아졌다.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듯했다.

“참, 몸은 괜찮습니까?”

“네, 보시다시피 쌩쌩합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에드는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자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지닌 치유의 힘이 제법 괜찮은 건지 독이 든 쿠키를 쥐었던 손도 말끔히 나았고 속이 아프거나 괴로운 것도 없었다.

“최근에 헤린스 백작가와 셀튼 남작가의 교류가 깊어졌더군요. 친분도 그렇고 자금의 흐름도 그렇고.”

그러나 이상하게 에드는 대공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머리 한구석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백작가와 남작가의 결합으로 그렇다 쳐도 최근 남작의 움직임이 특이하더군요. 묘하게 백작가에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말입니다.”

“…….”

“왜 그럴까, 했더니 답이 나오더군요. 처음엔 우습게 알던 로넨이 나와 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

“에드 당신이 중독된 그 독이 로넨을 노린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 들어가더군요.”

대공이 도달한 정보에 더할 설명은 없었다.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작을 칠 수 있는 무기를 쥐여 줄 차례였다.

에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대공이 혹할만한 정보를 쥐여 주었다.

“셀튼 남작은 밀수와 동전을 제조할 때 청동의 함량을 낮추는 것으로 돈을 불린 자라고 합니다.”

이 정도 정보는 대공도 손에 쥐고 있을 터였다. 뒷골목의 정보상에게 은전 한 닢만 쥐여 줘도 나올 정보였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셀튼 남작과 헤린스 백작을 동시에 잡으려면 증거가 더 필요했다.

대공의 힘이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심증만으로 두 가문을 날려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대공의 가문을 주시하는 황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에드는 쥐고 있는 열쇠를 내보였다.

“그 사실이 담긴 비밀 장부가 남부 레드 구역 42번가 빵집 ‘행복 빵집’ 다락방에 숨겨져 있습니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거기까지 파악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이는 남작가를 탈탈 털기 전에는 잡기 어려운 증거였다.

“귀중한 정보 고맙습니다.”

에드가 이를 알게 된 건 원작에서 로넨이 흑화를 한 후 세상을 쓸어 버릴 때였다.

빵집으로 위장했지만 정보 길드의 아지트였던 곳에서 셀튼 남작의 비밀 장부를 발견했을 때 로넨이 피식 웃으며 불태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것 따윈 필요 없이 직접 손 볼 수 있다는 완벽한 강함이었다.

대공의 수하들이라면 그 장부를 회수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였다.

‘내가 손에 쥔 패를 너무 드러낸 것 같지만 대공이 내 뒤를 파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 정보는 흘려도 괜찮을 거야.’

원작에서 에드는 헤린스 백작가에 들어오기 전에 하급 정보상의 말단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경력을 토대로 정보를 취했을 거라 생각한다면, 제가 준 정보를 거짓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으리라.

다행히 대공은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 장부를 회수하고 나서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대공의 반응을 살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에드는 원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그런데 대공 전하, 송구스럽게도 또 부탁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대공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송구스럽다니요, 어떤 부탁입니까?”

“그게 저…… 약초 협회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설립 주체는 대공 전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믿을 만한 사람으로요.”

대공이 고개를 기울였다.

“더 자세히 말해 보세요.”

“제가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헤린스 백작가와 셀튼 남작가가 명성을 잃는 데, 북부의 힘이 들어갔다는 게 밝혀져서 좋을 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살짝 내리깐 에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약초 협회에서 셀튼 남작의 탈세를 고발하면 어떨까 합니다. 남부의 맹주인 제이드 공작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상금을 협회의 기부금으로 받으면 어떨까 합니다.”

제이드 공작은 남부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가문이었고, 대공에게 우호적이었다.

영지민들의 세금을 빼돌린 자들을 관청에 신고하면 포상금을 받는다. 가끔은 황실에서 하사금을 내리기도 했다.

‘……포상금이 아깝긴 하지만.’

북부의 주인인 아스넬 대공이 남부의 귀족가를 건드렸다거나 힘도 없는 하인 나부랭이가 귀족을 신고했다는 이야기가 돌아서 좋을 것은 없었다.

비밀 장부만 손에 얻으면 셀튼 남작이 토해 내야 할 벌금만으로도 사실상 파산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셀튼 남작가에서 자금을 투자받는 백작가도 휘청휘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약초 협회를 설립하는 것이 헤린스 백작과 셀튼 남작을 파산에 이르게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아스넬 대공이 누명을 쓴 이유는 북부를 공격한 마물을 상대하다가 폭주를 한 후에 생긴 전염병 때문이었으니까.’

에드는 이 약초 협회를 이용해 대공을 살릴 예정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모래 위를 걷는 것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푹푹 파이고 흔들리던 발밑이 단단한 땅으로 다져진 것 같았다.

대공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찬찬한 시선이었다.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에드,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네, 대공 전하.”

“내 입술이 그렇게 맛있어 보입니까?”

불투명한 미래에 비로소 선명한 밑그림을 그린 것 같아 입가가 헤실 풀어졌던 에드가 쩍, 굳었다.

“……네?”

“너무 집요하게 빨아먹고 싶다는 듯이 보니까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대공의 말에 안 그래도 붉게 보이던 입술이 새빨갛게 빛나는 효과가 나타나자 에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잠, 잠시 바,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금, 금방이면 됩니다.

으어어,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하며 에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런 모습을 보면 아직 어리고 어리숙한 하인이 맞는데.’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성숙하고 노련하다 못해 노회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장에라도 로넨을 괴롭힌 놈들을 날려 버리려는 자신을 막을 때도 그랬고 셀튼 남작의 치부인 장부를 어떻게 이용하는 게 좋을지 말할 때도 그랬다.

송구스럽다며 에드가 부탁이 있다고 했을 때 아스넬은 이것과 다른 걸 요구할 줄 알았다.

‘내 힘으로 셀튼 남작가를 쳐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겐 힘이 있었고, 그는 로넨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줬으니 이 정도 요구를 하면 적당히 주고받기라고 생각해 바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겨우 약초 협회 설립이라니…… 그것도 놀라운데 복수마저도 자신이 아니라 남부 공작의 힘을 빌려 우회적으로 하겠다니.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제가 생각했던 간단하고 시원한 결말을 놔두고 다른 길을 파는 걸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차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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