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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4화 (14/198)

Chapter 14

다양한 색으로 꾸며진 선물을 에드는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응, 그리고 내가 에스코트해 줄게.”

“……네?”

“에드는 본관 대식당에 처음 가는 거잖아. 초행길을 안내할 때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르텔 경이 알려 줬어.”

“아…….”

로넨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길을 안내했다.

그 손이 가리키는 길에는 은은한 크리스털 램프가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붉은 카펫 위로는 경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양쪽으로 서서 검 끝을 맞대고 길을 만들고 있었다. 멋진 검의 길이었다.

에드가 본관 대식당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비싼 식기가 많았고 지체 높은 귀족들을 상대하기에는 그는 너무 말단 하인에 불과했다. 대식당은 그가 넘기에는 너무 높은 문턱이었고 그는 현관 벨보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

에드는 한 가지 사실 또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멋진 검의 길은 헤린스 백작 저의 대식당에 처음 들어서는 자신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귀족가의 식당은 은밀하고 내적인 공간이었다. 집안의 중요한 사업을 의논하거나 못마땅한 자식새끼를 꾹꾹 눌러 밟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밥을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헤린스 백작가에서는 식사를 할 때마다 로넨의 자존감을 꾹꾹 짓밟았다.

이건 분명 그를 파악한 대공이 로넨이 역전된 상황을 즐기라고 만든 자리였다. 이제껏 오기 괴로웠던 식당이 재미있는 자리로 느껴질 수 있도록.

에드는 살짝 허리를 숙였다.

“로넨 도련님.”

“어?”

“먼저 걸어가 보세요.”

“왜? 난 에드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러고 싶어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제는 처지와 형편이 달라졌다. 북부 대공의 동생과 말단 하인인 자신 사이에는 이제 잴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로넨은 더 이상 제가 돌봐야 할 아이가 아니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었고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했다. 북부 대공이 만들어 준 꽃길을 로넨과 함께 나눠 가질 순 없었다.

“그게요, 도련님. 어미 오리가 새끼 오리들에게 길을 안내할 때 먼저 앞서서 알려 주지 않습니까?”

“아! 그렇네.”

“네, 저는 이 길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니 도련님께서 앞서가시며 길을 안내해 주시면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어, 알았어. 에드.”

크게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듬직하게 앞서 걷자 창가로 내리쬐는 햇살이 반짝였다. 에드의 발치에 살랑살랑 스치는 봄바람이 가벼웠다.

기사들의 칼끝으로 핑그르르 모여든 빛은 눈이 부셨고, 잽싸게 앞으로 튀어나온 제이논은 해탈한 표정으로 꽃가루를 날렸다.

따스한 봄날의 아기자기한 행진이었다.

* * *

커다란 식당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에드는 직감했다.

‘……뭔가 위험한데.’

“형! 우리 왔어요.”

북부 대공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에드는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아졌다. 그것도 보통 심상치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심각해졌다.

대공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사탕 다발을 후두둑 떨어뜨리더니 온몸을 삐거덕거렸다.

이상했다. 귓가에선 ‘그럼, 한 번 더?’하는 대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손끝 발끝으로 피가 쏘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왜, 왜 이러지?’

만약 지금 에드의 머리 위로 상태 창이 떠오른다면 이렇게 나타날 게 분명했다.

[몸 상태 : 심장 발작, 심박수 증가, 두통 및 미열 발생, 다리에 힘이 풀리고 입이 바짝바짝 마르더니 이내 아랫도리로 뜨거운 열과 거대한 에너지 응축!

위험!

경고!

동공 지진과 함께 왼팔과 왼발이 같이 나가는 기현상 출현! 온몸에 걸린 과부하에 목이 삐걱삐걱, 급속한 혈관 확장으로 뺨으로 불타는 당근 같은 홍조 발생!

마음 상태 : 초조, 불안, 근심, 걱정, 긴장, 그리고 과도한 흥분 상태.

결론 : 자체진단 – 독의 후유증으로 인한 상태 이상. 부정맥 가능성 농후.

제삼자 진단 – 진단은 의사에게, 약은 약제사에게.]

‘아니, 그러니까 왜 대공의 붉은 입술이 이렇게 눈에 들어오는 건데?’

식당에 들어서던 에드는 도로 밖으로 나오려다가 등 뒤에서 쾅, 닫히는 문에 가슴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말라니까.’

독의 후유증이 아주 심각했다.

* * *

식사 분위기는 좋았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다채로운 무늬가 수 놓인 식기들.

봄을 맞이해 싹 갈아치운 가구들과 최고급 카펫으로 주방 바닥을 채운 호화스러움.

화려하고 현란한 백작 부부의 옷과 최고급 음식들로 차려진 자리.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한껏 힘을 준 백작 부부 덕분에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웃음 또한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에드만 빼고.

후드득 떨어뜨린 사탕 꾸러미를 주운 에드는 삐걱삐걱 자리에 앉았다.

“형, 저는 에드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에 북부에 가고 싶어요.”

에드를 바라보며 로넨이 말했다. 해맑은 목소리였다.

아스넬 대공은 인자하게 웃었고, 에드의 뒤에 서서 물을 따르던 제이논은 크게 낙담했다. 백작 부부는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느라고 바빴다.

정작 이야기 당사자인 에드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모른 채 포크로 그릇만 찍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 내 맞은편에 대공이 앉아 있는 걸까?’

저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낮은 웃음을 흘리는 대공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발밑으로 툭,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서 혼자 밥을 먹을걸.’

어렵고 어색한 자리였다.

식사를 마친 후 에드는 대공을 만나기 위해 본관 3층으로 향했다.

제이논의 말이, 대공은 현재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낸다고 했다. 책 보관을 위해서 통풍이 잘되게 방의 구조를 짜 방 안에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게 마음에 든 듯했다.

똑, 똑.

제이논이 서재 문을 노크하는 동안, 에드는 조금 전 대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실 때 이르텔이 말했다.

〈로넨 도련님, 외출을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으러 가실까요?〉

그에 에드는 눈치를 챘다.

‘내 곁에서 로넨을 떨어뜨리는 걸 보니 대공이 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이르텔과 대식당을 나서는 로넨을 바라보던 에드도 대공과 할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제이논의 뒤를 따랐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작 부부를 적당히 털어 낸 대공이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살짝 이마를 짚었다가 뗐다.

대공은 아직 로넨에게 그간의 일들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그는 대식당에서 백작 부부에게 적의 대신 무한한 호의만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뒤로는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겠지…….’

……그리고 로넨이 학대를 당했다는 것도 접했을 테고.

“이쪽으로 앉아요, 에드.”

서재로 들어선 에드를 대공이 소파로 안내했다.

“아, 네.”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에드는 제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제이논을 조금 괴롭혀 볼까?’

찻물이 뜨겁다, 차갑다, 차를 너무 우렸다, 덜 우렸다…… 엄청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에드의 장난기를 알아챘는지 제이논이 제발, 지금은 참아 달라며 두 손을 마주한 채 가볍게 흔들었다.

에드는 불퉁하게 웃었다. 그러게 왜 편지를 감췄냐고요.

잠시 고민한 에드는 삐죽 솟은 장난기를 고이 접었다. 지금은 그런 소소한 자기만족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대공이 눈짓하자 살았나 싶었는지 제이논이 휴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덜미를 잡힐까 싶었는지 빠르게 방을 나섰다.

“에드가 로넨과 친하게 지냈다 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부리나케 사라지는 제이논의 등을 바라보던 에드는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에 앉은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대공 전하.”

“로넨이 헤린스 백작가에서 학대를 받았던 게 사실입니까?”

나지막한 음성이었으나 대공의 목소리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에드는 시선을 들었다.

“대공 전하, 대답하기에 앞서서 두 가지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게 저……하나는 말씀을 낮춰 주셨으면 하고요.”

“또 하나는 뭐죠?”

“또 다른 하나는 계약서를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약서라면 어떤 걸 말입니까?”

대공이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 대공 전하. 전하께 존댓말을 들으니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정말이었다. 대공에게 존댓말을 들을 때마다 발끝이 간질거렸다. 간밤의 꿈이 생각나서 정수리가 다 찌릿찌릿한 기분이었다. 심장에 쩍쩍 무리가 갔다.

“차차 노력해 보죠, 은인이신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으니. 그래서 계약서는 어떤 계약서를 말하는 겁니까?”

“……그게 백작가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발목을 잡을 만한 계약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백작가가 망하면 공동으로 빚을 지게 하는 조항이나, 북부의 외진 땅에 함께 밀어 넣을 수 있는 그런 조항이 있는 계약서로 말입니다.”

“계약서는 몇 장이나 필요합니까?”

“……최소 12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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