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7화 (7/198)

Chapter 7

“…….”

“…….”

차가운 북부 대공은 등장도 평범하지 않았다.

헤린스 백작가에 도착한 그는 백작 부인을 모시고 오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을 집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우지끈, 뚝.

집사의 뒤를 밟아 덜 닫힌 방문 손잡이를 부수고 등장했다.

등장하자마자 존재감이 엄청났다.

실례를 범한 건데도 야만적으로 느껴지거나 무례해 보이지 않았다.

하얗고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끄럽고 청결한 얼굴.

날카로운 턱선.

시원하게 트인 눈매.

그 안에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

아름답고 수려하지만 냉엄한 인상은 말 한마디 함부로 건네기 힘들 것같이 날카로웠고, 철갑을 두른 너른 어깨는 우아한 금장이 박힌 외투에 감싸여 있어도 탄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백작 부인은 대공의 외모에 말을 잊었다. 대공을 빤히 올려다보면서.

네이센도 얼이 빠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백작 부인의 손을 꽉 부여잡으며.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스넬 린든 대공 전하.”

방 안을 훑던 대공의 시선이 백작 부인과 네이센에게 닿았다.

꼴깍.

꼴깍.

그리고 꼴깍.

백작 부인과 네이센의 목울대가 연달아 움직였다.

에드의 목울대도 덩달아 움직였다. 너무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공이라서 그런가. 오히려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저 얼굴은…… 뭐지?’

대공의 외모는 소설에서의 묘사보다 더 소설같이 비현실적이었다.

척박하고 차가운 북부성의 주인, 설원의 지배자, 제국의 찬연한 빛.

아스넬 린든 대공의 등장이었다.

* * *

제국의 선황제 제스윈에겐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멜라 네이트런, 아름답고 능력 있는 황녀였다.

그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선황제는 제국의 세력을 넓히는 데 공을 들였다.

멜라는 선황제의 훌륭한 조언자이자 보좌관이었다. 황제와 머리를 맞대고 대소사를 의논했고, 제국이 어려움에 처하면 주저 없이 말을 몰고 가 수세에 몰린 제국군을 구하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드디어 제국에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고 평화가 도래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에게 신하들의 상소가 쏟아졌다.

〈황녀 멜라 네이트런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 그것이 제국의 기강이 바로 서고 황제 폐하의 위엄이 바로 사는 일이옵니다.〉

황제는 그들과 말도 섞지 않았다. 손짓만으로 밖으로 내쳤다.

그러나 황태자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너무 물렀고 늙은 사자에 불과했다.

황태자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고모인 멜라부터 처리했다. 그녀를 제거해야 자신의 입지가 탄탄해질 것이라 생각하면서.

전쟁이 끝난 후에 멜라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정쟁과 담을 쌓았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북부로 터전을 옮겼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그 땅을 가꿔 나갔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어둡고 시린 겨울밤에 시작된 비극에 그들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황제가 북부성을 공격했을 때 멜라는 남편과 성을 지켰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대공은 동생을 안고 뒤로 빠졌다. 비밀통로를 빠져나가 차가운 북부산을 퇴로로 삼았다. 그리고 적이 턱 끝까지 따라붙자 유모에게 동생을 맡겼다.

〈여기서 갈라져야 해.〉

〈하, 하지만 도련님.〉

〈모두 살아서 꼭 다시 만날 거니까 울지 마, 유모.〉

산세를 빠르게 파악한 대공은 로넨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로넨케아즈, 꼭 다시 만나자.〉

그렇게 대공은 뒤로 돌아섰고, 자신에게 적들이 따라붙게 했다.

새벽이 붉게 타오르는 산 위에서 끝내 살아남은 대공은 로넨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유모의 발자국은 싸늘한 강풍에 휩쓸렸고 옅은 피 흔적은 차디찬 눈에 뒤덮였다.

그 피바람의 소용돌이에서 대공은 부모님을 잃었고, 동생을 놓쳤다.

그때 대공의 나이는 18살이었고, 로넨은 3살이었다.

대공은 생각했다.

‘금방 찾을 수 있어.’

그러나 1년, 2년, 3년…… 동생을 찾지 못하는 세월이 길어지자 대공도 사람인지라 지쳐 갔다.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쩌면 냉혹한 겨울바람이 연약한 동생의 숨을 앗아 갔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황군의 잔혹한 군홧발이 어린 동생의 생을 짓밟았을지도 모르고…… 매일 밤 찾아드는 파리한 절망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로넨의 손을 놓지 말고 죽더라도 끝까지 함께할걸.’

그런 생각과 함께 길어지는 불면의 나날을 보냈다.

원작에서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15년 만에 로넨을 만났지만 자신이 있는 이상 그런 허송세월은 필요 없었다.

에드는 그 세월을 반으로 줄이기 위해 대공의 귀에 로넨의 존재가 닿게 머리를 굴렸다.

문을 열고 등장한 대공의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스넬 린든 대공 전하.”

방 안을 훑던 대공의 시선이 백작 부인과 네이센에게 닿자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헤린스 백작 부인.”

“아, 아닙니다. 아스넬 린든 대공 전하.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대공이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에드에게 닿았다가 그의 곁에 선 로넨에게서 멈췄다.

“헤린스 백작가에서 황가의 핏줄을 빼돌렸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결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습니다. 파손된 문은 합당한 값을 치르겠습니다.”

“황, 황가의 핏줄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저, 저희 백작가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습니다!”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했다. 잘못하면 황족 은닉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 있는 일이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실한 헤린스 백작가에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나와 백작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그런 정보를 흘렸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물, 물론입니다!”

백작 부인이 대공에게 크게 동조했다.

“하지만 정보를 접한 이상 확인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백작 부인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공이 고개를 까딱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그를 받아 든 백작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는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서 대공은 황실에서 죽으라고 내보내는 전쟁터에도 나가고 뒷골목의 쓰레기통도 뒤졌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니 저 서류에는 백작가를 옭아맬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백작가에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로넨을 입양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테고.

결국에는 극적인 화해의 제스처가 따라오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 틈을 이용해 대공은 로넨과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고.

“잠, 잠시 서류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응접실로 안내하겠으니 차를 한 잔 드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대공 전하.”

서류를 확인하는 백작 부인 대신 네이센이 말했다. 간곡한 요청 같았지만 따져 보면 대공은 이만 밖으로 나가 달라는 축객이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슬슬 움직여 보는 게 좋을 것 같지?’

“으으.”

에드는 신음을 흘리며 존재감을 알렸다. 아까부터 눈을 뜨고 있었지만 워낙 존재감이 미미해서 이렇게 해야 간신히 자신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에, 에드! 괜찮니?”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항상 자신을 업신여기던 네이센이 달려들었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누워 있는 자신을 안으려고 했다.

에드는 최선을 다해 몸을 틀며 격한 네이센의 포옹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고 아파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얄팍한 수작이었다. 헤린스 백작가는 하인도 가족처럼 대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그런 행동을 보여 줌으로써 입양한 로넨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처럼 지냈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네이센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에드의 곁에 서 있던 로넨만 고생이었다. 네이센의 큰 움직임에 덜렁 떨려 나며 뒤로 밀렸다.

동시에 대공이 네이센의 뒷덜미를 확 낚아챘는데…… 보고도 믿기가 어려운 속도였다. 에드가 네이센을 피하자 허공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중심을 잡으려던 네이센이 엉거주춤하던 그 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아악!”

그 바람에 발이 꼬인 네이센이 침대맡의 나무 테두리에 코를 박았다.

퍼억.

보고 있던 사람도 윽,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큰소리가 났다.

“저런.”

대공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에드는 봤다. 분명히 봤다.

네이센의 뒷덜미를 들어 올리던 척을 하던 대공이 지그시, 아주 지그시 그의 얼굴을 침대에 눌러 버리는 것을. 평온한 얼굴로 힘을 들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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