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화 (4/198)
  • Chapter 4

    로넨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정말?”

    “네, 저는 못 믿으셔도 블루 멜로우의 결과는 믿으셔도 됩니다. 꽃잎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아, 아니야!”

    로넨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에드를 못 믿은 적 없어!”

    음, 하며 에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었죠? 도련님과 제가 친해지려면 서로 간에 거짓과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으응.”

    “그런데 제가 아까 무슨 일로 반성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도련님은 별일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그건.”

    “하지만 이건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많이 마음 아파 했던 일이니까요.”

    “…….”

    “그래서 저는 도련님이 저를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해서 말씀을 안 하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아, 아니야.”

    에드의 말을 경청하던 로넨이 말허리를 뚝 잘라 냈다.

    “그, 그게 에드에게 오줌싸개 소릴 들으면 창, 창피하고 속상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건데.”

    흐려지는 말끝에 로넨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블루 멜로우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항상 준비해 둬야지.’

    비겁한 녀석들이 오줌싸개라고 누명을 씌우려고 할 때마다 로넨의 기를 팍팍 살려 주기 위해서.

    에드는 허리를 숙였다. 로넨과 눈높이를 맞췄다.

    “제가 왜 도련님께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절대 도련님께 그런 나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도련님과 친해지고 싶고, 도련님께 신뢰를 받고 싶으니까요.”

    “…….”

    “그런 나쁜 말을 하면 도련님과 친해질 수도, 도련님께 신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아니까요. 글을 모르고 똑똑하지 못해도요.”

    “아, 아니야. 에드가 왜 안 똑똑해? 나보다 훨씬 많이 아는데? 블루 멜로우가 마법 꽃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로넨 도련님은 그런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고 있으시죠.”

    로넨과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까? 고민하던 에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로넨에게 글을 배웠다. 글을 읽고 쓰는 건 저절로 깨우쳐졌지만 로넨과 거리를 좁히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도련님은 선생님.

    난 학생.

    로넨 도련님, 이거 너무 어렵습니다…… 하고 시무룩해하면 아, 이건 에드! 하면서 쑥쑥 자라는 로넨의 자존감이란.

    로넨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렇게 조금만 올려 쳐 주기를 해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짜 이렇게 귀여운 로넨을 대체 왜 그렇게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가지를 배워서 알게 되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과 제가 머리를 맞대면 오해로 묻힐 수 있었던 일이 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로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 약속해 주세요. 도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에게 바로 말씀해 주시기로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입니다.

    덧붙이는 에드의 말에 로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줌싸개의 오명에서 벗어난 것이 엄청 좋은 모양이었다.

    “응! 알았어, 에드.”

    “좋아요, 그럼 약속.”

    “응, 약속.”

    에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로넨이 새끼손가락을 걸어 왔다.

    처음 그와 약속했을 때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더니 엄청 재밌어하고 좋아했다. 그 후로 이 약속의 증표는 그들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

    로넨의 자존감을 쑥쑥 키운 에드는 이불을 둘둘 말았다. 어찌나 찻물을 많이 부었는지 이불이 축축 늘어지는 게 엄청 무거웠다.

    ‘세탁하려면 고생길이 훤하구나.’

    하지만 이걸로 로넨의 자존감은 살고, 자신의 사망 확률은 낮아졌으니 이 정도는 고생이랄 것도 없었다.

    방을 정리한 에드는 로넨과 블루 멜로우 차를 마셨다. 따뜻한 물에 우려서도 마셔 보고, 레몬즙과 섞어서도 마셔 보았다.

    아기자기한 티타임이었다.

    후에 집사에게 깨지고 이불을 빠느라 곤욕이었지만 로넨에게 신뢰감을 쌓았으니 남는 것이 더 많은 시간이었다.

    그건 분명 폐허 속에서 차를 나눠 마셨어도 웃음꽃이 피었을 시간이 분명했다.

    * * *

    하지만 평화로운 날도 잠시였다.

    “로넨! 로넨! 어디 있니?!”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백작 부인이 로넨을 찾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

    방문을 벌컥 연 백작 부인의 표정엔 설렘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엘리사 영애가 오늘 점심때 백작가에 방문을 하겠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어서 준비를 해야지!”

    오늘은 로넨과 엘리사 영애의 약혼식 일주일 전이었다.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일이 일어나는 건가.’

    로넨의 약혼자인 엘리사가 로넨에게 독을 먹이는 일이.

    한고비를 넘겼더니 또 한고비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하지?’

    셀튼 남작가의 장녀인 엘리사 셀튼은 로넨의 약혼녀였다. 12살이었고,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로넨에게 독을 먹였다. 약혼식 일주일 전 오후의 일이었다.

    좋아하는 남자는 따로 있고, 부모님의 눈 밖에는 나기 싫고, 약혼식을 무를 힘은 없으니 로넨을 노렸다. 로넨에게 줄 쿠키에 독을 넣은 것이다.

    엘리사가 쓴 독은 무색, 무취, 무미였다. 완성된 쿠키 위에 톡, 톡 떨어뜨린 독으로 따뜻한 물에 닿으면 독성이 활성화되었다.

    로넨이 쿠키를 따뜻한 차에 담갔다 먹는 습관이 있는 것을 알고 쓴 방법이었다.

    그 버릇은 백작 부부가 가르친 방식이었다. 그들은 로넨에게 쿠키 하나를 먹는 방식까지도 간섭했다.

    〈네 출신이 천하니 어쩔 수 없잖니? 이렇게 일일이 가르쳐야 그나마 귀족다운 꼴을 하니. 쿠키를 먹다가 사레라도 들리면 얼마나 천박해 보일지, 쯧쯧.〉

    거기까지 소설 속의 내용을 회상한 에드는 창가를 서성였다.

    백작 부인이 로넨의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에드와 로넨은 카펫에 엎드려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넨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 가며 에드에게 주간지를 읽어 줬고, 에드는 빵과 과일을 로넨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에드.〉

    〈네, 로넨 도련님.〉

    〈에드는 북부의 아스넬 린든 대공 전하를 좋아하지?〉

    로넨이 발을 까딱이며 물었다.

    〈네?〉

    〈아스넬 대공 전하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서…… 아, 누가 온다. 일어나자, 에드.〉

    흑화한 후에 검으로 세계를 평정하는 로넨은 새싹부터 달랐다. 그는 백작 부인이 별관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엎드려 까딱이던 발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에드는 로넨을 따라서 빠르게 일어나 먼지떨이를 들었다. 로넨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척을 했다.

    〈엘리사 영애가 오늘 점심때 백작가에 방문을 하겠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어서 준비를 해야지!〉

    그렇게 오늘의 힐링 시간이 종료되었다.

    엘리사가 방문할 때 에드는 로넨의 곁에 머물기가 어려웠다. 잘 차려입은 하인 벤스와 하녀 안나가 로넨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남들 눈에 없어 보이지 않으니까.

    헤린스 백작가는 백작 부부와 소백작의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백작가의 명예로운 작위는 선대부터 빠진 도박에 허울뿐인 장식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였다. 빚으로 날린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영지 관리도 개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 부부의 허영심은 하늘을 찔렀다. 작위에 맞춰서 콧대를 높일 방법만 고심했다.

    헤린스 백작이 로넨을 입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귀족들 사이에선 고아를 양자로 거두어 잘 키워서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귀족의 고결한 품위를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로 여겼다.

    헤린스 백작도 유행에 발맞춰서 로넨을 입양했다.

    로넨과 함께할 일이 생기면 때를 빼고 광을 내느라 부산스러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방치했다.

    로넨이 뭔가를 잘하면 그래, 그럭저럭 봐 줄 만하구나…… 이 정도가 최대의 칭찬이다. 잘못하면 불호령은 기본이요, 감금은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2달 전, 셀튼 남작가에서 로넨과의 혼인을 제의했다.

    백작은 감히, 남작 따위가!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셀튼 남작은 차와 포도주, 약초를 밀수하여 사업을 크게 키웠다. 그렇게 번 돈으로 지금은 광산과 광물에 투자했다. 남부의 동전 주조권도 따냈다.

    항상 돈이 부족한 헤린스 백작가에서 돈이 넘쳐나는 사돈이 나쁠 건 없었다. 남작가라 비록 가문의 격이 떨어지더라도.

    돈이 넘쳐나는 셀튼 남작가에서도 백작가 사돈이 나쁠 것은 없었다. 이제는 겉치레밖에 안 남은 헤린스 백작가였지만 과시용으로도 좋았고 사업용으로도 쓸 만했으니.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사정이었다. 로넨은 불과 며칠 사이에 휙휙 돌아가는 일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사이에 엘리사는 이 약혼을 파투 내기 위해서 계략을 짰다. 가장 공략하기 쉬운 로넨에게 독을 먹이기로.

    ‘……그나저나 오늘도 소식이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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