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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3화 (3/198)

Chapter 3

헤린스 백작 부부는 야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어젯밤 백작 저를 떠났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로넨을 감금한 사람은 네이센 소백작이었다.

네이센은 로넨의 의붓형으로 로넨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정신연령은 미취학 아동 수준이라 감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다행히 그는 지금 백작 저에 없었다. 백작 부부가 집을 비운 사이에 딩가딩가 도박으로 돈을 날리러 아침 일찍 백작 저를 나섰다.

‘로넨이 아니더라도 헤린스 백작가는 그 도박 때문에 언제고 망할 터.’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의 기척을 빠르게 살핀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위에는 작은 동산처럼 이불이 볼록 솟아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로넨이 작은 애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고 외부 세계와 차단을 시도하고 있었다.

“로넨 도련님.”

에드의 목소리에 이불 안의 로넨이 꿈틀, 하더니 작게 꼬물꼬물 움직였다. 침대 안쪽으로 붙으려고 용을 썼다.

에드는 마음을 몹시 다쳤을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거리를 좁혔다.

“오, 오지 마, 에드.”

“로넨 도련님.”

“형님께서 반성하라면서 문을 잠갔는데 방에 들어오면 에, 에드가 혼나잖아. 얼, 얼른 나가.”

“로넨 도련님, 소백작님께서 왜 반성을 하라고 하셨는데요?”

“……그, 그게.”

“네, 그게요.”

“별, 별일 아니었어.”

로넨이 한 번 더 강조했다.

“정, 정말로 별일 아니었어.”

들키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었지만 울먹울먹한 목소리를 감출 순 없었다. 저 작은 공간에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로넨이 안타까웠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에드는 침대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 후 턱을 괸 채 고민했다.

‘이불에 실례를 했다고 생각해서 멘탈이 박박 갈렸을 로넨의 다친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서 준비한 게 있긴 한데.’

……이거, 잘 먹히겠지?

동그랗게 오른 이불 동산을 힐끗 바라본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제가 도련님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시간을 지체해 봐야 로넨의 마음에 새겨진 멍울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부딪혀 보자고 생각하면서.

* * *

방에서 나온 에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잽싸게 계단을 내려와 정원을 달렸다. 목적지는 별채의 자기 방이었다.

방에 도착한 에드는 주전자와 투명한 찻잔들, 병에 담긴 찻잎을 챙겼다. 그가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산 귀중한 도구들이었다.

원작에서 로넨이 이런 식으로 모욕을 몇 번이나 당했기에 혹시 몰라 미리 마련해 둔 것이었다. 빙의 전 카페에서 일했던 짬으로 생각해 둔 방법이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살금살금 숨어든 에드는 레몬도 하나 챙겼다.

백작 부부를 비롯하여 소백작까지 저택을 비우니 덩달아 사용인들도 자리를 뜨기가 일쑤였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별채로 돌아온 에드는 1층 창고에서 침대에 까는 새 이불을 꺼냈다. 멀쩡한 이불에 물병을 기울여 물을 졸졸 따랐다.

‘너무 많이 따르면 티가 나니까.’

적당히 이불을 축축하게 만든 그는 이불과 주전자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관은 로넨이 혼자 지내는 외딴 건물이었다. 입양은 했지만 가족으로 들이기엔 급이 떨어진다는 백작의 판단으로 그랬는데 오히려 그 점이 에드에겐 더 좋았다. 남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기에 편했으니까.

두 손 가득히 짐을 든 에드는 로넨의 방문을 열었다.

‘…….’

그러자 침대 위의 이불 더미가 또 한 번 꿈틀하더니 벽 쪽으로 꼬물꼬물 움직였다.

‘……저런다고 마음에 입은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닌데.’

에드는 마룻바닥에 이불을 쫙 펼쳤다.

“로넨 도련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바닥에 앉은 에드는 레몬을 투명한 유리잔에 즙을 꾹꾹 짜 내렸다.

“보세요, 도련님. 이건 블루 멜로우라는 신비한 차인데요.”

레몬즙을 어느 정도 짠 에드는 병에 든 찻잎을 꺼내 들었다.

이불 속의 도련님은 아직까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에드는 알았다. 이불 안의 고치가 틈 사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난로에 주전자를 올린 에드는 투명한 유리잔에 블루 멜로우 찻잎을 듬뿍 넣었다.

‘거금을 들여서 산 찻잎이지만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게 대수일까.’

다행히 이곳에도 블루 멜로우 차가 있었다. 아무래도 기호품이기 때문에 눈물 나게 비싼 게 흠이었지만.

삐이익.

불에 달아오른 주전자가 휘파람을 불자 에드는 블루 멜로우가 듬뿍 담긴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아름다운 푸른색 찻물이 금세 우러났다.

“보세요, 도련님. 블루 멜로우 차는 물에 우리면 푸른색이 도는데요.”

레몬즙을 챙긴 에드는 침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색 블루 멜로우 차에 레몬즙을 똑, 똑 떨어뜨렸다.

“어?”

이불 더미가 크게 놀랐다.

방금 전까지 선명한 푸른색을 띠던 유리잔 속의 찻물이 레몬즙과 만나자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신기함과 이상함에 화들짝 놀란 로넨이 이불 밖으로 통, 튀어나왔다가 슬금슬금 에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도로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아기 소라게가 따로 없었다.

에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셨죠? 도련님. 블루 멜로우는 투명한 물과 만나면 푸른색을 띠지만요, 노란색 물과 만나면 이렇게.”

“…….”

에드는 아기 소라게 앞에서 유리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요.”

정확히는 색이 아니라 산성에 반응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그런 과학적인 말은 필요 없었다. 상처 난 로넨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만 있다면 마법과 같은 일이라고 퉁 치면 그만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에드는 바닥에 널어놓은 이불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 이불은요.”

“…….”

“오늘 아침 로넨 도련님의 침대에서 벗겨 낸 이불인데요.”

뻥이었다. 에드가 물을 촉촉하게 부은 새 이불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악당같이 느껴지지?’

에드는 호기심에 찬 로넨이 이불 틈 사이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다.

“저는 이 이불에 블루 멜로우 차를 뿌려 볼까 합니다.”

“아, 안 돼! 그, 그러지 마!”

동시에 로넨이 이불 밖으로 통,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에드를 말렸다.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그, 그러니까 에드. 오, 오늘 아침에 내가 혼, 혼이 난 건 말이야.”

“네, 도련님이 혼이 난 것은 말입니다……?”

“어, 그, 그게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고…… 흐윽, 그게 내가 자다가 실례를 해서…… 혼이 났는데 거기다가 블, 블루 멜로우 찻물을 부으면 분명히 붉게 변할 테니까…… 허억!”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로넨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지?

에드는 로넨이 말하는 도중에 주전자에 넣어 끓여 새파랗게 우러나온 블루 멜로우 찻물을 이불에 줄줄 부었다.

로넨이 양 뺨에 손을 얹고 으아아아, 절규를 했다. 자다가 실례를 했으니 분명히 이불이 붉게 변할 거라고 비통해하면서.

“…….”

“…….”

“어?”

로넨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에드가 찻물을 줄줄 붓는데도 이불이 옅은 푸른색으로 젖어 들어갈 뿐 다른 색은 보이지 않자 로넨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상하다. 왜 안 변하지?”

로넨이 안심하자 에드는 더 적극적으로 찻물을 부었다. 그가 물에 적신 새 이불을 가져왔으니 블루 멜로우가 아니라 블루 멜로우 할아버지가 나타나도 이불이 붉게 변하는 일을 없을 터.

“실례가 너무 적어서 그런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넨이 귀여웠다.

에드는 그 깜찍한 의문에 답했다.

“아뇨, 도련님. 도련님도 보셨죠? 블루 멜로우 차에 노란색이 한두 방울만 들어가도 색이 변하는 것을 말입니다.”

“으응, 나도 보긴 봤는데.”

“그래서 말인데요, 도련님. 도련님이 간밤에 실례를 하신 게 맞으십니까?”

“……어?”

“잘 생각해 보세요. 밤에 요의가 찾아와서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요.”

음, 하며 로넨이 눈을 깜빡였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이불이 젖어 있어서 세네르 경이 나를 엄청 혼냈어.”

“그렇습니까?”

주전자를 내려놓은 에드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에드의 뒤를 로넨이 졸졸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도련님. 하나, 간밤에 목이 마른 도련님께서 깨어나 잠결에 물을 마시다가 흘렸을 가능성.”

에드가 탐정 흉내를 내며 협탁에 놓인 컵을 요리조리 살피자 로넨도 까치발을 들고 그의 시선을 요리조리 따랐다.

“둘, 도련님께서 주무시다가 창가에 놓인 꽃병을 손이나 발로 쳐서 물을 쏟았을 가능성.”

이번엔 창가로 움직인 에드가 꽃병을 살피자 로넨도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세네르가 작업을 해 놓고 누명을 씌웠을 확률이 99%였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타인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로넨이 벌써부터 알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혹시나 로넨이 자다가 실수를 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로넨은 아직 어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성장 발달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고쳐 나가면 될 일이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범벅이 되게 혼을 낼 일이 아니라.

에드는 몸을 돌렸다. 그의 곁에 바짝 붙은 로넨과 시선을 맞췄다.

“어쨌든 확실한 건 도련님께서 간밤에 실수를 하지 않으셨다는 것.”

“…….”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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