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2화 (2/198)

Chapter 2

〈도련님.〉

〈으……응.〉

〈로넨 도련님.〉

꾸벅꾸벅 졸던 그가 이름이 불리자 번쩍 눈을 떴다.

이름이 불리면 얼마나 긴장을 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의자 앞에 선 에드는 말했다.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 아니야. 나 안 잤어.〉

〈저녁 식사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낮잠을 주무셔도 됩니다.〉

로넨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엄청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정말?〉

〈그럼요, 제가 깨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안, 안 돼. 에드가 힘들게 이불을 갈았는데 더럽히면 안 되잖아.〉

뭐, 뭐지? 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움이 넘치는 배려심은?

에드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로넨과 눈높이를 맞췄다. 어차피 사표를 쓸 예정이었으니 조금이나마 그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졸리면 주무세요, 도련님. 그 정도로 이불이 더러워지지는 않으니까요.〉

〈……하, 하지만.〉

〈그리고 이불이 더러워지면 다시 갈아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에, 에드.〉

〈네, 도련님.〉

〈오늘은 바쁘지 않아?〉

그렇게 묻는 로넨의 남보라색 눈동자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네?〉

〈일이 너무 바빠서 나랑은 대화를 할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

〈백작가는 크고 넓고, 에드는 할 일이 많아서 내 칭얼거림을 받아 줄 수 없다고…… 아, 에드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 이제는 말을 시켜도 되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서 묻는 건데…… 하면서 작아지는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아, 로넨. 왜 이렇게 처연한 거니?

에드, 너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어느새 사망 플래그를 콱 꽂은 거고?

‘……내가 에드로 깨어난 시점은 백작가에 취업한 지 보름밖에 안 된 때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벌써 이 손으로 관짝을 짰을 줄이야.

에드의 등 뒤로 식은땀이 다 솟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튀었다가는 목숨이 위태해질 것 같았다.

로넨의 뒤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길었고, 복수를 향한 집착은 그야말로 찐광기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복수할 때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몹시 처절하고 피폐하게 죽였다.

그렇다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는 자신에게 꽂힌 사망 각을 없애고 백작가를 나서야 했다. 무조건 그래야 했다.

‘……그,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갈 곳을 잃은 에드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무조건 빌고 보는 거지.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보는 거야.

소설 속에서 눈치만 기가 막히게 빨랐던 에드는 인생 투자를 잘못해서 쫄딱 망했다.

헤린스 백작가에는 그가 취업했을 때부터 로넨을 깔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운이 좋아서 백작가에 입양된 고아 새끼라며 얕보았다.

그런 백작가의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한 에드는 약빠르게 움직였다. 로넨을 괴롭히는 이들과 손발을 맞추며 그를 곤궁에 빠뜨렸다.

집사나 검술 스승인 세네르와 짜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로넨이 주방의 빵을 훔치는 걸 봤다며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처럼 로넨이 간밤에 이불에 실례를 했다며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

그러니 에드는 당연히 로넨의 살생부에 올랐다. 한 짓이 너무 많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결국 복수심을 불태우며 돌아온 로넨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니 우선은 진심이 담긴 사과부터 하자.

〈죄송해요, 로넨 도련님. 제가 그런 말을 했다니…… 처음인 하인 일에 적응하는 게 힘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래도 그런 나쁜 말을 하다니 정말로 죄송합니다, 도련님.〉

로넨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에드가 왜 죄송해? 내가 귀찮게 해서 힘들었던 건데.〉

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이 제게 너무 잘해 주셔서 일주일 만에 백작가에 적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 정말이야?〉

〈그럼요.〉

에드의 말에 로넨의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워낙 칭찬을 받는 일이 없다 보니 이런 말에도 행복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바르게 앉은 로넨의 다리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귀여웠다. 짠하기도 했고.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얼마나 괴롭혔길래 그런 폭군이…… 아니, 그만 생각하자.’

이제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꽂힌 사망 플래그를 제거하고 가늘고 길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었으니.

에드는 로넨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 이제부턴 로넨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도련님은 어떠세요? 혹시 싫으십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에 로넨이 의자에서 통, 튀어 오르듯이 몸을 들썩였다. 침을 꼴딱 삼켰다.

〈진, 진짜?〉

〈네, 그렇습니다.〉

〈정말로 나랑 친해지고 싶어?〉

〈네, 정말로 친해지고 싶습니다.〉

그 말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로넨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촉촉해지려는 눈가를 말렸다.

백작가에 입양된 지 3년째라면 로넨의 나이는 9살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눈물을 참아 내기 위해서 애를 쓰다니…… 착잡했다. 친해지자는 말을 물리기라도 할까 봐 그런지 그가 빠르게 답했다.

〈응, 응. 나도 친해지고 싶어.〉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요. 그러니 침대에 누워 보세요, 도련님. 제가 새로 갈아 드린 이불이 마음에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로넨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이미 정해진 답을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에드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그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졸음기 다분한 얼굴로 그래 봐야 표정에서 들통이 났다. 그러나 에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불을 팡팡 두드렸다.

〈마음에 든다면 한 번 누워 보세요.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거라면 저는 몹시 슬플 겁니다. 친한 사이라면 비밀과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아,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로넨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에드는 옅게 웃었다.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

〈…….〉

로넨의 시선이 의자에 앉는 에드를 따라왔다.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졸음기 그득한 눈으로 그를 봤다.

〈이불은 어떠세요? 괜찮으십니까?〉

〈으응, 진짜 포근포근하고 좋아.〉

정말 따스하고 좋아.

잠결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보드레한 봄날의 오후처럼 늘어졌다. 많이 졸린 듯했다.

〈그럼 이제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세요. 몸이 한결 가벼워지실 겁니다.〉

〈으……응.〉

대답은 잘하면서 로넨이 자꾸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

그리고 에드를 보고 또 봤다.

〈로넨 도련님.〉

〈……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부담 없이 하셔도 됩니다, 도련님. 그래야 제가 도련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으니까요.〉

또르르 눈알을 굴리던 로넨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하, 하지만 스승님이나 형님은 물론 하인들까지 나보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음, 그 사람들이 도련님과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했었습니까?〉

로넨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게 그 사람들과 저의 다른 점입니다. 저는 도련님과 친해지고 싶으니까 지금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해요. 그래서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에드의 말을 경청하던 로넨이 말했다.

〈……응, 그럼 에드.〉

〈네, 도련님.〉

〈어…… 그러니까 내가 일어날 때까지 정말 여기에 있을 거지?〉

로넨이 얼른 말을 이었다.

〈물, 물론 바쁘면 다른 일을 하러 갈 수 있지만 안 바쁘면 진, 진짜로 여기에 있을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저렇게 뜸을 들이나 했더니……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이 눈을 뜰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이 자리에 있겠습니다.〉

그제야 로넨이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원작 소설에서 로넨은 3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고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로 백작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외롭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빙의를 하기 전 이선유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보육원에 맡겨졌기에, 그런 기분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할 일이 있었으나 약속대로 로넨의 곁을 지켰다.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은 온유했고, 방 안의 분위기는 따스했다.

그리고 로넨을 내려다보던 에드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에드, 이제 일어나야 해.〉

오히려 로넨이 자신을 깨워서 엄청 민망했다.

눈가를 긁적이며 에드가 몹시 멋쩍어하자 로넨이 옅게 웃었다.

로넨이 처음으로 에드를 향해 구김살 없이 웃었던 순간이었다.

* * *

그 이후로 에드는 우리 도련님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하며 로넨을 귀중품 다루듯이 귀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그런데 누구야. 누구? 내가 휴가를 떠난 그새를 못 참고 또 로넨의 기를 팍 죽인 사람이?’

에드는 빠르게 별관으로 움직였다.

“에드! 마구간으로 바로 가! 딴 데로 새지 말고!!”

“네, 집사님.”

대답만 씩씩하게 한 에드는 주방으로 가는 척을 하다가 방향을 틀어 별관으로 내달렸다.

‘네, 페이크랍니다. 집사님.’

빠르게 별관 계단을 오른 에드는 휴가를 나간 날 몰래 복사한 열쇠로 로넨의 방문을 땄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방 안의 기척을 살폈다.

“…….”

오줌싸개의 누명을 쓰고 땅을 푹푹 파고 있을 로넨을 건져 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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