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화 (1/198)

Chapter 1

에드는 아침 일찍부터 북부성 곳곳을 누볐다.

“마리, 만찬 때 쓸 은식기를 조금 더 넉넉하게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에드.”

“케이, 대공 전하와 로넨 도련님의 옷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하고.”

“네, 집사님.”

“그리고 화원에 연락해서 장미 화분을 추가한다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에드는 지금 며칠 뒤에 있을 북부 대공의 하나뿐인 동생 로넨케아즈의 생일 준비로 바빴다.

“집사님! 에드 집사님!”

3살 때 친형인 대공과 헤어졌다가 6년 만에 다시 만난 로넨이 북부성에 와서 처음 맞는 생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일 파티는 더 공을 들여서 준비해야 했다. 에드가 집사로 승진한 지 3개월 만에 맡은 큰 행사였다.

“진, 조심해. 넘어져.”

“흐아, 흐아아, 숨차. 그런데 집사님, 지금 딸기가 도착했는데요.”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 내쉬던 진이 허리를 폈다. 머리에 손가락으로 뿔을 만들며 말을 이었다.

“주방장님이 딸기 상태가 좋지 않다며 사기꾼과 거래했다고 이렇게 화가 나셨는데 어떡하죠?”

아, 북부성의 주방장은 다 좋은데 때때로 터지는 과한 의욕이 문제였다.

오늘은 로넨의 생일 케이크를 시험 삼아 만들어 본다고 했는데 거기에 들어갈 딸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머리를 짚은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주방에 내려가 볼게.”

빠르게 움직인 에드는 잽싸게 계단을 내려섰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요즘에 과로를 했나.’

왜 갑자기 현기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에드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주방장과의 면담 이후에도 할 일은 많았다. 연회장 점검, 게스트룸 단장, 창고 정리, 조명 정비…… 할 일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한가하게 현기증 타령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 신참 집사는 오늘도 바빴다.

탁, 탁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 에드는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날 밤 결국 대공의 손에 이끌린 그는 주치의에게 온몸 구석구석을 진찰받아야 했다.

연회장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것을 대공에게 걸렸기 때문이었다.

“임신입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네?”

“임신이라고?”

“네, 대공 전하. 이제 8, 9주 된 것 같은데요, 초기이니 특히 더 안정을 취하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만있어 봐, 임신이라니.

“그럼 아픈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던 게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네, 임신이라서 그랬던 겁니다. 대공 전하.”

에드는 눈앞이 노래졌다.

‘내가 북부 대공과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갑자기 임신이라니?

백작가의 일개 하인이었던 에드가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승진한 지 3개월, 그냥 좀 가늘고 길게 잘 먹고 잘 살고 싶었을 뿐이었던 그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풀기 위해선 시간을 조금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1년 전, 대한민국의 취준생이었던 이선유가 소설 속에 빙의해 북부 대공이 잃어버린 동생인 로넨의 하인으로 근무하던 그때로 말이다.

Chapter 1

3월 초.

헤린스 백작가에 꽃이 피었다.

따스한 봄 햇살, 달콤한 봄 내음, 살랑살랑 나부끼는 봄바람.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러니까 이선유가 밤새 읽느라 눈이 다 뻐근했던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빙의해 있다는 것만 뺀다면.

“네? 로넨 도련님의 방에 3일간 접근 금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집사가 별관으로 향하려던 자신을 불러 세운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래! 그러니 에드, 오늘은 작은 도련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마구간 일을 돕도록 해!”

‘아니, 착한 우리 로넨한테 또 무슨 짓을 한 건데?’

계란 바구니를 우득 움켜쥔 에드는 집사의 뒤를 졸졸 따랐다.

마음 같아서는 집사를 향해 계란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신선한 계란엔 죄가 없었다.

“오늘은 왜 또 감금되신 건데요?”

“뭐?”

자기 할 말만 하고 바람같이 사라지려던 집사가 휙, 돌아섰다. 얼마나 세차게 돌았는지 에드의 앞머리가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가 내려앉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드는 주눅 들지 않았다.

……비록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어젯밤에는 시 암송을 잘하셔서 백작님께 칭찬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감금을 당하신 겁니까?”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하면 9살짜리 아이를 감금하는 거냐고?!

집사의 시선이 새치름해졌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자넨 어제 분명히 휴가였는데?”

어떻게 듣긴? 백작가 정원을 걸어 들어오는 동안 들었다.

백작가에서 일어난 일을 입에 절대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라도 로넨의 일이라면 함부로 입방아를 찧어 대곤 했으니.

집사, 당신이 당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이에.

에드는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큰 집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다는 뜻이었다.

“간밤에 이불에 실례를 하셨다, 왜? 듣고 나니 속이 시원해?”

“……이불에 실례를 하셨단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당장 마구간으로 가!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귀찮게 내 뒤를 졸졸 따라붙지 말고!”

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런. 내가 없는 새에 로넨이 또 누명을 썼구나!’

* * *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면, 에드는 원래 폭군이 될 도련님을 모시는 말단 하인으로 살다가 살해당하는 인물이었다.

‘폭군의 그늘 아래에서.’

이 작품은 어릴 때 백작가에 입양되어 학대받던 남주가 황제가 되는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하나뿐인 형의 손마저 놓친 남주는 홀로 수많은 역경을 이겨 내고 황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혔던 이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거침없이 휘두른다.

19금 피폐 고수위 하드 판타지 로맨스 소설답게 복수는 시원시원하면서도 잔인한 부분이 있었다.

어쩌다 그 소설을 읽게 된 이선유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소설 속 인물에게 빙의해 있었다.

취준생인 그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자취방에 누웠다가 눈을 뜨자 낯선 방, 낯선 침대, 낯선 얼굴…….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줄행랑을 치기로 다짐했다. 이대로 소설의 주인공인 로넨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폭군의 그늘 아래에서’의 남자 주인공인 로넨은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이들을 모두 찾아 죽인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 목록에는 자신을 입양해 학대했던 헤린스 백작 부부와 그들의 아들인 소백작을 비롯해 집사와 하인, 마구간 지기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로넨이 백작가에 입양되고 3년이 지났을 때 새로 들어온 하인인 에드……로 빙의했다는 건데.’

로넨의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등장인물이었다.

……그것도 곱게 안 죽는.

몹시 피폐하게 죽는…….

작가 후기를 보면 살짝 미친 로넨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데 이게 어딜 어떻게 보면 살짝 미친 건데? 완전히 미친 거지?

에드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표를 쓸 생각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헤린스 백작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품에 넣어 둔 사표를 힘차게 투척하려는데 집사가 방이나 치우라며 제 엉덩이를 뻥, 걷어차는 게 아니겠는가.

하는 수 없이 에드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로넨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와 마주치기 싫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방만 치우고 나면 사표를 내겠다고 생각하며 에드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짠하냐.’

방을 치우는 동안 의자에 앉은 로넨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졸리기도 하겠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계속 움직였으니. 검술 스승에게 혼나고 양부모에게 혼나면서.

〈아직도 주무시는 겁니까, 로넨 도련님? 백작가의 양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도련님의 검술 스승이라는 놈은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말이나 하며 자빠졌을 것이고.

〈집사! 하는 일도 없이 밥값만 축내는 놈의 빵과 고기가 뭐 이렇게 커?! 당장 반으로 줄여!〉

식당에 들어선 도련님의 양부라는 놈은 이런 말이나 지껄였겠지.

〈어머, 얘야. 비싼 옷을 맞춰도 어쩜 이렇게 빈티가 나는지…… 정말이지 너에겐 돈을 쓰는 보람이 없구나.〉

부채를 살랑이며 도련님의 양모라는 이는 이런 감상이나 내뱉었으니 짠해도 너무 짠했다.

〈…….〉

그래서 빗자루를 들고 잠시 망설였던 에드는 로넨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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