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문 하나만 열면 대표가 앉아 있는데, 표정이며 태도며 이게 저들 도와주는 선배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인가 싶었지만 은겸은 차라리 그래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선배고 대표고 안 따지고 편을 들어줄 것 같은 모양새여서. 그 모습에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은 은겸은 태오와 멤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했을 것이고 그때의 너나 쟤랑은 데뷔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절실했고 내 안전한 성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래서 사과할 생각은 없다.”
“압니다. 사과받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도 조금 후회는 되네….”
은겸이 처음으로 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자 태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한 번도 은겸을 비난한 적 없었다. 다만 멤버들이나 솔이 그로 인해 상처받을까 촉각을 곤두세웠을 뿐. 물론 그가 했던 행동으로 인해 제게 날아들었던 시선이 불편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은겸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덤덤히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오를 은겸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에게 닥쳤던 불행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태오는 누구보다 좋은 멤버가 되었을 것이었다. 은겸은 솔과 태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다른 멤버들을 쓱 훑어보았다. 만약 자신이 계속 저들과 함께했었다면 저기에 껴 있었을까? 솔과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아마 자신은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겠지만, 솔과 저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섯 남자의 모습과 조금도 의지할 수 없는 제 멤버들을 살짝 겹쳐 본 은겸은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있다가 부르면 들어와.”
“감사합니다.”
대표와 미리 약속을 잡아 둔 은겸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태오와 솔을 향해 말하자 태오는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은겸이 대표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기색과 동시에 불안함이 엿보이는 백의찬 대표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은겸아. 갑자기 왜 보자는 거야. 뭐 문제 있어?”
“장남 혼자 독박 쓰다가 늦은 반항기가 올 수 있어요. 대표님.”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정다감하지만 어딘지 서늘한, 그리고 장난기가 조금 묻어 나오는 은겸의 목소리에 백의찬 대표는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뒤 잠깐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는 듯하더니 이내 문 너머로 ‘들어와.’하는 은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솔과 눈을 마주치곤 앞장서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웃고 있는 은겸과 지금 벌어진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는 대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불렀어요. 이참에 지하에도 좀 내려가 보시고 그러세요. 맨날 여기에만 계시니까 애들이 대표님 얼굴 볼 기회가 없잖아요.”
갈피를 잡지 못한 백의찬 대표가 은겸과 태오를 번갈아 바라보자 은겸이 아주 선하게 웃으며 그에게 핀잔을 놓았다. 마냥 착하고 다정다감해 보이는 그의 얼굴과 달리 그가 내뱉는 말은 백의찬 대표를 따끔따끔하게 찔러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따끔한 통증에 자리에서 일어난 대표는 헛기침을 두어 번하곤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흠흠, 그래 얘들아. 무슨 일로 이렇게 모였니?”
백의찬 대표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태오가 그답게, 진지하고 결연하게 말했다. 태오의 뒤에 꼭 붙어 있던 솔도 그를 닮은 단호한 어조로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 데뷔하고 싶습니다. 데뷔하게 해 주세요.”
“데뷔시켜 주세요. 이제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이내 멤버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하니 대표실엔 ‘데뷔’를 염원하는 외침으로 가득 찼다.
“대표님, 저 이제 소년 가장 그만하고 싶은데, 같이 집안 책임질 동생 좀 만들어 주세요.”
태오와 솔, 멤버들의 간절한 외침에 난감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백의찬 대표 얼굴을 본 은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대표실의 문이 열리고 ‘죄송합니다!!!’하는 외침과 함께 들이닥친 영호가 거대한 방패막이라도 된 듯 멤버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겸은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대표님 지금 완전 악덕 사장 된 거 같네요. 제가 돈 많이 벌어 올게요. 그러니 우리 후배님들 멋지게 내보내 주시죠.”
“부탁드립니다!!!”
태오를 비롯한 연습생들이 대표실로 갔다는 소리를 뒤늦게 듣고 뛰어 올라온 영호는 은겸과 대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가늠해 본 그는 이때다 싶어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멤버들이 영호를 따라 같이 아우성쳤다. 은겸은 모두 같은 마음인 것처럼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더 이상 부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데뷔 시켜 줄 거야. 그러려고 했어! 누가 안 시켜 준다던? 다 준비하고 있었어! 허리 숙이지 마, 영호 씨 무릎 땅에 대지 마!!”
은겸의 말처럼 전형적인 악덕 업주가 되어 버린 백의찬 대표는 영호와 멤버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몸서리를 쳤다. 그리곤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지만 그간 쌓아 온 업보가 업보인지라 그가 큰소리를 낼수록 대표실을 점거한 사람들의 머리가 더욱 숙여질 뿐이었다.
***
YC Entertainment님이 리트윗했습니다
PLANETA OFFICIAL
@PLANETA_official
PLANETA OFFICIAL LOGO MOTION
▶ neotu.be/i17q5TSS2tr
#플라네타 #PLANETA
YC엔터테인먼트 공식 계정이 낯선 이름을 가진 계정의 게시 글을 전파했다. 플라네타, 라틴어로 ‘행성’이라는 뜻으로 대중이라는 거대한 태양을 두고 그 주위를 공전하며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처럼 캄캄한 우주를 배경으로 시작된 영상 속엔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처럼 5개의 빛이 스쳐 지나가며 ‘PLANETA’라는 이름을 비췄다. 마침내 온전히 그 이름이 드러나자 그들의 미래처럼 힘찬 궤적이 나타났다. 마치 공전하는 별의 궤도처럼 또는 행성의 고리처럼 힘차게 시작된 선은 밝은 빛을 내며 ‘PLANETA’라는 글자를 한 바퀴 돌아 감쌌다.
그 글을 시작으로 2달간에 걸쳐 진행된 데뷔 프로모션은 때늦은 덕통사고에 고통받던 ‘정은’을 비롯한 뭇 7조, TEAM ONE의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특히나 조금 어두운 듯,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에 촉촉함을 한껏 머금은 티저 사진은 각 커뮤니티 게시판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했다. 물론 마침내 데뷔를 코앞에 둔 멤버들의 마음도 함께 타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대로 다시 만날 날이 다가왔다.
공을 많이 들이다 보니 제일 준비가 늦게 끝난 솔이 발걸음을 급히 했다. 그가 멤버들이 모여 있는 백스테이지까지 복도를 내달리자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레이싱 재킷이 마찰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복도를 내달리는 솔의 뒤로 영호와 코디도 마치 결혼식장에서 드레스를 정리해 주는 신부 도우미처럼 함께 뛰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기 위해 메이크업 수정과 옷매무새를 손질받으며 서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솔은 그제야 안심한 듯 분주했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대 뒤에서 미리 준비해 둔 영상이 재생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오는 솔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그가 왔음을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솔은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쪼르르 달려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뛰어올라 가면 7조이자 TEAM ONE. 아니 이제는 플라네타라는 이름을 가진 멤버들의 데뷔 소식을 전해 줄 기자들과 오랜 시간 기다려 꽤나 치열했던 공개 방청권을 얻는 데 성공한 팬들이 앉아 있을 것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사이 잠깐 뛰었다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는지, 작은 키의 스태프가 솔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솔은 제가 이런 손길을 언제 피했었냐는 듯, 스태프가 제 머리를 잘 손질할 수 있도록 아주 능숙하게 무릎을 살짝 굽혀 주기까지 했다. 긴장감과 분주함이 뒤섞여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도 멤버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의연함을 갖추려 했고, 잔뜩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카메라는 연신 돌아가며 곧 빛나는 별로 떠오를 멤버들의 모습을 쉼 없이 담았다.
솔은 빛나는 무대 아래에서 천천히 이곳에서의 과거를 떠올렸다. 지난 시간이 결코 평탄하진 않았다. 또 백의찬 대표에게 매달려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뒤로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마음고생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삶은 매 순간 솔에게 그런 힘겨운 변곡점을 늘 가져다줄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숨이 차오르는 그 구간만 잘 넘기면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하고 슬퍼하며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솔은 살포시 제 옆에 선 태오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레 태오가 솔을 바라보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반쪽 이마를 깔끔하게 드러낸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짙고 강인한 눈썹이 솔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드럽게 휘었다. 솔과 달리 짧은 기장의 붉은색과 검정색이 뒤섞인 레이싱 재킷과 테크웨어 스타일의 바지, 그리고 워커가 원래 컨셉인 악동보다는 어쩐지 군인 같은 느낌이 났지만 그것마저도 흠잡을 곳 없이 멋졌다.
사실 ‘플라네타’의 데뷔 1집 미니 앨범 컨셉에 대한 의견들은 하루아침에도 열댓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히길 반복했다. 청량하고 아련하게, 학창 시절 한 번쯤 짝사랑해 봤을 소년미 가득한 학생 컨셉과 ‘행성’을 의미하는 그룹명을 가졌으니 신비로우면서 피지컬이 강조되는 다소 강인한 컨셉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막판까지 자웅을 겨뤘으나 난데없이 백의찬 대표가 들고 온 의견이 결국 승리를 차지했다.
팬들로선 짠하기 짝이 없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TEAM ONE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기 위해 아주 활동적이면서도 강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의견. 거기에 ‘플레네타’라는 그룹명이 더해져 대표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외계 악동이라는 컨셉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멤버들로선 컨셉이 뭐든 정말 데뷔하게 된다는 사실에만 감사하며 밤을 지새우는 제작팀을 믿고 그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대표님의 의견에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압도적인 비주얼을 가진 태오와 솔 두 사람과 뭐든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던 멤버들답게 그 어떤 스타일도 능숙히 표현해 내는 모습에 컨셉에 대한 우려는 사그라들고 YC엔터테인먼트 내부에도 열정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