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90화 (190/192)

#190

득용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지호가 이내 눈꼬리를 축 내리며 말했다.

“뭐를 어떻게 해? 대표님 얼굴이라도 봐야 데뷔시켜 달라고 울기라도 하지.”

“하긴….”

제가 말을 꺼내긴 했지만 지호의 답처럼 딱히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고 있는 득용도 지호를 따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두 사람 모두 머리 위에 털이 보송한 귀와 풍성한 꼬리가 달린 동물처럼 가벼운 몸짓만으로도 감정의 변화가 뚜렷하게 보였다. 급격히 시무룩해진 둘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솔도 같은 심정이긴 매한가지라 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축 내려앉은 분위기를 멤버들은 쉽사리 떨쳐 내지 못했다.

데뷔가 간절한 건 멤버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매니저인 영호도 마찬가지였다. 지호가 한숨을 내쉬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영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요즘 회사에서 다들 영호 형 피하기 바쁜 거 같더라.”

멤버들이 휴식기를 가지기 시작한 날부터, 영호는 멤버들의 데뷔에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될 만한 사람이란 사람은 다 만나고 다녔다. 단순히 만나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억지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기까지 했다. 거기다 멤버들에겐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건강 챙기며 연습에만 집중하라 말하고 영호는 일부러 저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않는 실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게 하루 이틀 반복되니 이젠 회사 직원 대부분이 영호와 눈 마주치기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정도면 눈치가 보일 법도 한데, 영호는 꿋꿋하게 매일 같이 실장실로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영호 형뿐만 아니라 신인 개발팀도 우리 피하는 눈치예요.”

“태오 너도 느꼈어?”

태오가 어깨를 들썩이며 익숙하다는 듯 말하자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태오는 이런 분위기를 이전에도 몇 번이나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은겸을 주축으로 했던 데뷔조에서 제가 빠졌을 때, 가족들의 사고 소식이 회사에 퍼졌을 때, 그리고 그 외에도 데뷔가 어그러질 때마다 느꼈던 분위기였다.

태오뿐만 아니라 솔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이런 분위기를 몇 번이고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마음도, 영호를 비롯한 서로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기에 그럴 때마다 멤버들은 입을 꾹 다물고 연습실에서 묵묵히 몸을 혹사하며 이런 불편한 감정들을 떨치는 수밖에 없었다.

“영호 형 보기 괜히 미안해.”

이런 분위기를 처음 겪어보는 솔은 영호를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앞섰다. 솔직히 영호의 입장에선 남 일 아닌가, 본인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로 피해 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영호는 제 일처럼 누구보다 더 열렬하게 앞장서고 있었다.

“또 이러다가 전처럼 흐지부지 방치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요. 형들은 안 그래요?”

피차 솔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멤버들 모두 조용히 득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득용의 말처럼, 영호처럼 뭔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은 다들 가지고 있지만 딱히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지호의 말처럼 그들은 일개 연습생일 뿐이었으니까.

“이제 진짜 뭐든지 잘,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갑자기 몰려오는 갑갑한 마음에 솔이 주먹을 꼭 쥐고 다짐하듯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그러자 가람을 시작으로 모두가 솔을 보며 같이 주먹을 움켜쥐고 단단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솔은 늘 열심히, 잘했어.”

“맞아요. <마아스>에서도 솔직히 저희 팀이 최고였다고요!”

“우리 다 열심히 잘했어.”

불안과 걱정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자신들의 모습을 돌이켜 보는 멤버들의 모습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특히나 솔에겐 전에 없던 굳건한 의지나 당참 같은 것들이 엿보였다. 솔의 그런 모습에 태오가 무거운 얼굴을 덜어내고 피식 웃음 지으며 모두를 다독였다.

“우리도 영호 형이랑 같이 실장실 앞에 죽치고 있을까?”

순간 고개를 치켜든 지호가 모두와 눈을 한 번씩 마주치며 꽤 비장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실장님 붙잡아서 뭐 해요. 결국 대표님이 OK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럴 바엔 대표실을 앞에서 농성해야죠.”

그러자 득용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지호보다 한술 더 뜨며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호와 득용이 대단한 작전이라도 짜는 것처럼 눈짓을 주고받자 태오가 끼어들어 찬물을 끼얹었다.

“레슨이랑 연습은?”

“아!! 누가 연습 벌레 아니랄까 봐… 태오 형 지금 연습이 문제예요?”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연습이 연습생의 본분이니까.”

“그건 그래….”

바른 생활과 규칙의 대명사인 태오가 찬물을 끼얹자 득용이 기운이 쭉 빠졌는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득용과 연신 눈짓을 주고받던 지호도 다시 시무룩해지더니 태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다시금 분위기가 축 처지고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숙소가 조용해졌지만 서로의 마음속은 ‘데뷔하고 싶다.’하는 비명으로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 침묵을 깨는 태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내리꽂혔다.

“해보자.”

솔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쭉 잡아당기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태오의 말에 놀란 건 솔뿐만이 아니었다. 지호도 눈을 크게 뜨고 태오를 바라보았고 가람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표실 농성? 윤태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모두의 시선에 자신에게로 쏠리자 태오는 짙은 눈썹을 한번 찡그리곤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연습생 노릇은 이미 충분히 한 거 같아서.”

제법 능청스럽고 의미심장한 태오의 말에 솔은 입을 가리고 ‘풋’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늘 덤덤하니 침착해 보여도 태오도 이제 막 스물이 된, 누구보다 데뷔를 꿈꾸는 열정 많은 연습생이었다. 솔직히 뭐 대단한 변화와 효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이렇게 절실하다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태오의 동의하에 시작된 대화는 마치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는 천진난만한 소년들의 작당 모의처럼 왁자지껄했다. 그러나 말로는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달려드니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다.

언제 회사에 얼굴을 비칠지도 모르는 대표를 마냥 로비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정말 대표실 앞에서 농성을 펼치자니 그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제지당할 게 분명했다. 대표가 직접 솔을 비롯한 멤버들을 만나러 연습실까지 친히 행사하거나 따로 불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백의찬 대표는 정말 취미로 회사를 굴리기라도 하는 건지,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순간 영호가 푸념하듯 은겸의 해외 진출에 신경 쓰는 거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멤버들에게 신경 써 줬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솔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어…. 솔직히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고,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한데… 대표님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 거야?”

솔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딱 한 명 그런 사람이 있었다. 솔의 부탁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 주고 동시에 백의찬 대표와 다이렉트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음… 은겸이 형…?”

솔도 썩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겸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눈을 반짝였던 멤버들의 표정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애초에 멤버들은 은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떠나서 이런 일에 그가 나서 준다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이 겪어 온 은 겸은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없으면 절대 누굴 돕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거보단 득용이 말대로 뭐라도 더 적극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은 태오가 은겸과 저의 사이에 질투를 내비쳤던 모습을 떠올리며 흘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변명하듯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솔의 목소리는 이내 점점 단호해지기 시작했다.

“팬분들이 이렇게 우릴 기다리는데, 하루라도 빨리 만날 수 있다면 뭐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

태오의 까만 눈동자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제 눈치를 보지만 그 속내엔 확고한 의지가 자리 잡은 솔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단호한 솔의 표정에 태오는 졌다는 듯, 얕은 한숨을 쉬었다. 태오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솔은 언제 망설였냐는 듯 은겸에게 바로 연락했다. 솔이 연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은겸은 기다렸다는 듯이 솔의 부탁을 수락했다. 은겸에게 연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연락하고 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이용하라고 했지만, 진짜 이렇게 이용하는구나.”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내가 이용하라고 했는데 뭐. 오히려 이렇게라도 연락해 줘서 고마울 지경이야.”

은겸의 말에 솔은 고개를 푹 숙였다. 부탁할 때와 달리 막상 은겸의 얼굴을 마주하니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은겸이 얼마든지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지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 이런 부탁을 한다니. 솔직히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선택지였다. 미안함에 고개를 못 드는 솔과 달리 은겸은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솔에게 다시금 연락이 올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겸이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은겸은 솔이 이렇게라도 제게 연락을 줬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은겸은 담담하게 웃음 짓는데도 솔이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자 태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은겸을 바라보았다.

은겸은 담대한 척 하려 했지만, 솔직히 눈앞에서 태오와 솔이 그 어떤 날카로운 것으로도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실로 매듭지어진 모습을 마주하니 입 안이 썼다. 은겸은 말없이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윤태오.”

오직 솔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태오의 시선이 그제야 저를 부른 은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태오의 뒤편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지호와 재수 없는 소리 한마디라도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얼굴을 한 득용. 아무 생각 없이 맹해 보이지만 모든 신경이 솔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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