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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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길어졌던 휴가가 끝나고, 부모님이 챙겨 준 짐을 한가득 싸 들고 숙소로 돌아온 지호는 제일 먼저 주방을 확인하곤 묘한 이질감에 팔짱을 끼고 섰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느낌인데 정확히 어디가 달라졌는지 변화점을 찾느라 지호는 한참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주방을 살폈다. 지호가 같은 자리에 그것도 주방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태오가 슬쩍 물을 마시는 척 그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지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태오 들으라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흠… 왜 두 사람만 그릇이 바뀌었지?”
멈칫, 모른 척 지나가려면 태오는 지호의 물음에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솔과 둘이 근처 생활용품점에 가서 사 왔던 그릇 두 개. 솔이 구분하기 쉽게 아예 다른 모양을 사는 게 어떻냐 했었지만 태오는 모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며 같은 디자인으로 두 개를 구매했었더랬다. 지호의 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뜨끔한 태오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곤 작은 목소리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깨져서요.”
“뭘 하다 깨졌지?”
“…….”
지호의 질문에 태오는 빠르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같이 밥을 먹다, 설거지하다 깼다 말하면 끝날 일인데 괜히 말문이 턱 막혔다. 태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지호는 그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익히 알고 있다는 듯 태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그를 스쳐 지나갔다.
“솔이 싱크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라. 숙소 살림 거덜 난다.”
태오는 지호의 말에 하려던 말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하나둘 멤버들이 모이며 휴가로 인해 조용했던 숙소가 모처럼 만에 왁자지껄해졌다. 사실 득용이 숙소로 돌아온 시점부터 소란스러워지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지호까지 숙소로 돌아오며 그 소란의 최고점을 찍었다. 가타부타 말은 않아도 내심 다들 오랜만에 가진 개인적인 휴식이 꽤나 즐겁고 편안했는지, 얼굴이 확 펴 있었다. 물론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도 한몫했다.
“영호 형은 갑자기 왜 모여 있으라는 걸까요?”
“글쎄.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는 거면 회사로 불렀을 텐데….”
득용이 솔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뒤에 바짝 붙어 앉자 태오가 흘끔 그를 곁눈질하며 대답을 흐렸다. 제 허리에 둘린 득용의 손을 자연스레 끌어 잡으며 솔 또한 득용에게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을 보며 좀스럽게 굴지 않아야지, 티 내지 말아야지 속으로 되뇌어도 솔의 일거수일투족에 자꾸만 유치한 질투를 하고 마는 태오였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솔과 득용의 모습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태오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왼편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이번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호, 가람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두 사람 모두 태오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처럼 눈이 마주치자 쓱,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 묘한 이상함에 태오의 눈썹이 씰룩였다.
“아빠가 다음에 휴가 때는 형들이랑 같이 놀러 오래요.”
“그래도 돼?”
“네. 완전요. 저희 뒷산에 아빠가 오두막 만들었거든요. 우리 거기서 고기 구워 먹고 캠핑도 해요.”
“재밌겠다. 나 캠핑 안 해봤어.”
“헐. 그럼 꼭 가요. 밤에 별도 엄청 많이 보이고 진짜 좋아요.”
꼭 방학이 끝나고 만난 초등학생 같은 솔과 득용의 대화에 태오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솔에게로 향했다. 날이 이제 제법 따듯해진 덕에 쉬는 동안 아버지와 퍽 즐거운 야외 활동을 했는지, 득용이 그간 있었던 일을 떠들며 솔에게 다음엔 꼭 같이 가자는 말을 꺼냈다.
득용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솔은 그룹 막내보다도 더 순진하게 웃으며 다양한 반응을 내비쳤다. 질투고 나발이고, 그 모습이 그저 밝고 보기 좋아 태오를 비롯한 두 남자는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그린 채 솔과 득용을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으며 조잘조잘 떠드는 두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오래간만에 만난 멤버들만큼이나 영호도 멤버들이 반가운지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두 손 가득 거대한 짐을 들고 숙소로 들어오는 그를 발견한 태오가 제일 먼저 현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서 오세요. 형.”
영호의 손에서 묵직한 짐을 받아 든 태오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도 무엇인지 정체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영호는 두 손 가득한 짐을 멤버들 앞에 내려놓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금 전 멤버들이 솔과 득용을 보며 지었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모여 앉아 있는 멤버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태오와 솔이야 숙소에 머물기도 했고, 둘이 병원 갈 때 영호의 도움을 받아 짬짬이 얼굴을 보긴 했지만,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갔던 멤버들은 아니었기에 소소하게 안부를 나누었다. 새삼스럽지만 어디 하나 빠지지 않게 잘생긴 녀석들이 한결 밝고 가벼워진 얼굴로 앉아 있는 게 보기 좋았다.
“잘들 지냈어? 이야, 집이 좋긴 좋나 보다 다들 얼굴이 확 좋아졌네.”
“형도 잘 지내셨죠?”
“그런데 형 이거 다 뭐예요?”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솔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득용이 잽싸게 영호가 들고 온 짐에 관심을 보였다. 고급스러운 쇼핑백 안에 종이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두 눈으로 보아도 뭐 하는 무엇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득용이 재촉하듯 영호에게 묻자 앉아 있던 멤버들도 영호 앞으로 쪼르르 모여들었다.
“너희한테 온 거야.”
“저희요?”
“응. 다 팬분들이 보내 주신 거야.”
“팬분들이요?”
<마아스>를 하차하고 멤버들이 휴식기를 가지게 된 뒤로 소속사 메일함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솔을 향한 악플이나 루머를 신고하는 PDF부터 아티스트 보호에 더 힘쓰라는 질책, 그리고 따로 소통 창구가 없는 멤버들에게 전하고 싶은 온갖 말들이 하루에도 수십 통 소속사 메일함으로 오고 있었다.
이 같은 팬들의 성화에도 소속사가 묵묵부답이자, 멤버들이 본격적으로 휴가를 시작한 때에 팬으로 보이는 여성 셋이 회사를 통해 영호를 찾아왔다. 용건인즉슨 멤버들에게 팬레터를 전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화 끝에 고가의 선물은 모두 거부, 편지 정도만 받기로 했고 그 결과가 지금 영호의 양손에 들려 있었다.
영호는 차곡차곡 쇼핑백에서 종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꽤 많은 쇼핑백 안에서 향기가 솔솔 나고 척 보기에도 봉투 하나, 겉에 붙인 스티커 한 장도 고심해서 골랐을 고른 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엔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모아 만든 레터북도 있었고 직접 그린 그림도 다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멤버들은 맹한 표정으로 종이 뭉치를 가득 쏟아 내는 영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온 것들 모은 거야. 혹시 모르니까 모여서 같이 확인하자.”
“이게 다 저희한테 온 거예요?”
매번 속을 삭이고 의젓한 모습만 보여주던 멤버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게 귀여워 영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해 묻는 솔을 보니 영호는 괜스레 가슴이 뻑적지근해져 왔다.
“그렇다니까. 특히 솔이 네게 제일 많아.”
솔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이 밝혀지고 난 뒤로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영호는 그 응원을 솔에게 전달하는 것이 맞는지 조금 망설였었다. 당연하게도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솔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중에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팬들이 보내온 편지를 일일이 뜯어 내용을 검열할 수도 없었고 혹 어설픈 동정에 잘 치료받으며 좋아지고 있는 솔이 오히려 상처받진 않을까 우려되어 지금까지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스토커 문제도 있었기에 영호는 차라리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자신의 참관하에 편지를 개봉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영호가 따로 분류한 팬레터가 담긴 쇼핑백을 내밀자 솔은 그 쇼핑백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솔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서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다는 티를 감추지 못했다. 영호는 그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곤 제법 두께가 있는 레터북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선은 검증된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이거부터 보자.”
총대라며 회사로 영호를 찾아왔던 팬이 준비한 레터북이었다. <마아스> 팬 커뮤니티에서 7조를 응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손 편지를 스캔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책으로 예쁘게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멤버들은 조용히 첫 장을 넘겼다.
레터북엔 <마아스>에서 처음 멤버들을 발견하고 어떻게,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 그리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써 내려간 편지부터 아쉽게 하차하게 된 멤버들에게 주는 ‘내 마음속 1위 상’같은 깨알 같은 아이디어가 담긴 페이지까지 차곡차곡 모여 있었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정성 가득한 손 편지를 솔은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그저 종이일 뿐인데, 또박또박 예쁘게 글씨를 쓰며 그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을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 방송 날 자신들을 기다리고 서 있던 그 얼굴들이 말이었다.
“너무 신기해요.”
솔의 말에 영호는 제가 낳은 애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멤버들 또한 솔의 들뜬 목소리에 레터북에서 잠시 시선을 떼어 솔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에 제게로 몰리자 솔은 이젠 쑥스러워하는 대신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저희는 저흴 위해 <마아스>에 나간 거잖아요. 데뷔하고 싶어서?”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이 이렇게 저흴 응원하고 이렇게 좋아해 주신다는 게 참 신기한 거 같아요.”
그저 내 욕심을 위해, 내 목표를 위해, 각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렇다고 그로 인한 어떠한 대가가 그들에게 돌아간 것도 아닌데. 거기에 더불어 제 어두컴컴한 과거사와 온전치 못한 상태까지 공개가 되었는데도 이토록 선명하게 좋아해 준다는 것이 솔은 참 신기했다.
특히나 본래부터 가수나 아이돌이 꿈이었던 멤버들과 달리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솔이다 보니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을 위해 했을 뿐인 행동에 이토록 뜨거운 감정을 보내 준다는 것에 솔은 놀라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 막연히 감사하다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바스락 손에 쥐어지는 편지로 그 감정을 직접 느끼고 나니 그 애정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