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화면에 그 모습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요란한 소음과 함께 이따금 솔의 단말마, 그리고 나지막이 솔의 이름을 부르는 태오의 목소리가 번갈아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그리고 맞이한 편집점. 화면이 확 바뀌며 식탁 위에 가지런히 차려진 음식이 클로즈업되어 나왔다.
“태오가 만들어 줬어요. 저도 도왔습니다! 도…운 거겠죠? 그렇지?”
조금 투박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엔 윤기가 돌았고 맛있어 보였다. 솔은 제가 받은 선물을 자랑하듯, 카메라를 움직여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로 차려진 밥상을 찍으며 슬쩍 태오를 바라보며 재차 확인했다. 도와줬다고 스스로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사고를 더 많이 친 것 같았다. 화면에 다 담기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솔이 태오를 도운답시고 벌인 일을 누군가 봤다면 ‘아….’하며 탄식을 내뱉었을 것이다. 솔이 사고 친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태오를 바라보자 그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리 좀 어지르고 사고 좀 치면 어떤가, 솔이 제 옆에 붙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었다. 하지만 솔은 제법 눈치가 보였는지, 태오를 바라보며 시무룩한 얼굴로 설거지를 자처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태오는 솔의 말에 정리가 안 된 주방을 흘끔 돌아보곤 재차 솔을 바라보았다. 지호가 그동안 왜 솔이 주방에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는지 오늘 똑똑히 알게 된 태오였다. 솔 혼자 설거지를 하게 내버려 뒀다간 오늘 주방에 있는 모든 그릇이 작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마저 거절하자니 솔이 꽤나 기가 죽을 거 같아 태오는 차선책을 내놓으며 솔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같이 하자. 그래야 빨리 끝나지.”
“응. 잘 먹겠습니다.”
태오의 허락이 떨어지자 솔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들고 있던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보냈다.
“저희 이렇게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다음엔 멤버들 다 있을 때 다시 재미있게 찍을게요.”
멤버 중 재미없는 둘이 이런 걸 찍으려니 여간 진땀 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시작한 것이었기에 솔은 얼추 만족하며 태오에게로 카메라 렌즈를 돌렸다. 솔이 저를 찍자 태오도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달고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또 만나요. 안녕.”
TV가 꺼지듯, ‘팟’하는 효과와 함께 화면이 검정으로 물들었지만, 도란도란 두 사람이 나누는 말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이거부터 먹어봐.”
“응. 맛있다. 태오 너도 먹어.”
이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영상이 끝이 났다. 프로그램 하차에 대한 공지가 올라온 뒤론 별다른 업데이트가 없던 너튜브 채널에 느닷없이 올라온 이 영상에 팬들의 댓글이 끊이질 않았다.
윤탱사랑해 • 15시간 전
5:12 아 ㅠㅠㅠㅠ 윤태오 존나 단호해 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솔이가 한강 라면을 좋아할 수도 있지 ㅠㅠㅠㅠ
흉부가기가막혀 • 15시간 전
7:26 윤태오 앞치마 찢어지는거 아님?
고은우 • 13시간 전
둘이 싸웠다느니 불화설 어쩌구 하던 사람들 다 어디갔냐.. 영상 올려줘서 너무 좋다ㅠㅠ 솔이 말처럼 정말 편안하게 잘 쉬고 있는거 같아서 마음이 좀 놓임ㅠㅠㅠ
해물된찌 • 12시간 전
오늘 제 생일인데 선물 받은 느낌이예요
냥냐나나냥 • 9시간 전
솔이 너무 예쁘다♡
마요네즈탕 • 6시간 전
하차 소식 듣고 너무 우울하고 속상했는데 솔이오빠 웃는거 보니까 맘이 좀 풀려요ㅠㅠ 솔이오빠 말 대로 마아스 없었으면 저도 솔이오빠를 만날 수 없었겠죠ㅠㅠ 오빠말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겟어요ㅠㅠ저는 항상 오빠 응원하고 기다릴께요.
오늘부터탱솔 • 5시간 전
지금은 태오가 제일 좋아요 지금은 태오가 제일 좋아요 지금은 태오가 제일 좋아요 지금은 태오가 제일 좋아요
악마의햄서터 • 3시간 전
YC는 뭐하고 있는거야? 아직도 팀원이 데뷔 안했다는게 난 존나 이해가 안됨 제발ㅠㅠ 우리 애들 데뷔 좀 시켜주세요ㅠ 제 통장은 이미 준비되어있거든요
영상이 올라오기 무섭게 달리는 댓글 대부분은 이렇게나마 멤버들의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쁘고 안심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영상에 나온 솔의 진솔한 독백에 YC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비방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카메라가 꺼지고, 오붓했던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섰다. 말끔하게 비운 접시를 솔이 거품을 잔뜩 낸 수세미로 닦아내면 태오가 그 그릇을 넘겨받아 깨끗하게 헹궈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러다 제법 손발이 맞아 방심했을까, 아니면 태오의 옆모습에 한눈을 팔아서일까. 거품으로 가득한 손에서 미끄러진 그릇이 아직 미처 헹구지 못해 쌓여있는 다른 그릇 위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솔은 자신이 친 사고에 당황해 그대로 굳어버렸고 태오는 그 자신도 놀랐으면서도 솔을 싱크대 앞에서 밀어냈다. 그렇게 결국 솔은 태오에게 일감을 늘려준 채 설거지를 끝마쳐야 했다.
도대체 자신은 왜 이리 덤벙거리는 걸까. 솔은 소파에 앉아 시무룩한 얼굴로 자책했다. 사실 자꾸만 눈길이 옆으로 가는 바람에 사고를 안 칠 수가 없기는 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걸 괜히 나서서 태오에게 오히려 일을 더 만들어 주고 그걸로도 모자라 태오의 그릇까지 깨버렸다는 생각에 솔은 한숨이 나왔다. 때마침 뒷정리를 끝낸 태오가 소매를 정리하며 솔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정말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응…. 그릇 깨서 미안.”
“괜찮아. 다시 사면되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그릇 따위 깨지든 말든 알 바인가, 태오는 솔의 손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곤 정말 아무런 상처도 없자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솔의 손을 맞잡은 태오의 손은 물기가 살짝 남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솔은 차가운 그의 손을 단단히 감쌌다. 손끝이 늘 찬 솔이었지만, 지금 태오의 손보다는 따뜻했다. 제 온도로 태오의 얼음장 같은 손을 녹여주려는 듯, 솔은 태오의 손을 꽉 잡았다가 손에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미안한 듯 웃으며 제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새로 사줄게.”
“그래. 내일 같이 사러 가자.”
태오는 어떤 대답이 솔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손을 맞잡은 태오가 솔이 원하는 답을 내어주자 솔은 얼굴 한가득하였던 미안한 기색을 지우고 쑥스러워하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태오는 그 웃음을 보며 솔을 따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솔아.”
“응?”
‘성솔’도 아닌 ‘솔’.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태오를 보며 솔은 맞잡은 손을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었다. 태오는 호기심을 가득 담고 저를 올려다보는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저 미소 지으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솔.”
“왜?”
“솔아.”
“왜 자꾸 불러.”
태오가 다정히 저를 부를 때마다 고개를 살짝씩 기울이며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솔은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삐죽거렸다. 솔이 투정 부리듯 맞잡은 손을 놓으며 다시 한번 그를 부르는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태오는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그를 끌어안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솔은 느닷없이 자신을 끌어안은 태오의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우리, 카메라 껐지?”
“응. 솔아.”
솔의 물음에 태오가 빠르게 대답하며 솔을 끌어안은 채로 소파로 몸을 기울였다. 묵직한 태오의 무게감이 온몸에 전달되었다. 순식간에 조금의 거리도 남기지 않고 밀착된 신체에 솔은 얼굴을 붉히고 태오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몸을 누르는 무게감도 푹 꺼진 소파의 감촉도 불편하고 답답할 법도 했는데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누르는 무게가 배를 채운 포만감과 더불어 솔에게 묘한 안정감을 선사해주었다. 태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솔은 태오가 계속 제 이름을 부르자 말꼬리를 늘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왜 자꾸 그렇게 부르는 거야아….”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 갔지만 솔과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맞은 퍼즐 조각처럼 그를 안고 있던 태오에겐 귓속말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반응에도 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답을 했다.
“다른 사람들 있을 땐 이렇게 못 부르잖아. 솔아, 솔.”
“으응.”
남들 다 부르는 이름일 뿐인데, 태오가 저리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지금처럼 태오가 부드러운 시트를 쓸듯 저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면 솔은 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다.
“솔이야… 솔아, 솔.”
괜한 기우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멤버들이 있을 땐 평소처럼 딱딱하게 ‘성솔’하며 그를 부르는 태오였다. 지호나 가람이, 득용이가 솔을 친밀하게 부르며 가벼운 스킨십을 할 때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아무도 모를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라도 원 없이 불러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태오가 저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이름을 반복해 부르자 온몸이 간질간질해진 솔은 조용히, 태오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 그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솔아.”
태오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느껴지는 울림에 솔은 눈을 감았다. 휴가를 떠나면서도 제 걱정을 했던 지호를 비롯한 멤버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솔은 태오와 단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은 살포시 태오는 보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태오에게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매달리듯 힘껏 그에게 안겼다.
제 이름을 다정스레 부르는 목소리도 온몸에 느껴지는 무게감도, 푹 꺼진 소파도, 머리 위로 닿는 태오의 숨도,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서로의 체온도, 심지어는 자신이 깨 버린 그릇조차도 그저 모든 게 좋아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