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85화 (185/192)

#185

솔은 문을 살짝 열어 혹 카메라에 잡혀선 안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오전 중에 말끔히 청소를 마친 덕에 이부자리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솔은 조금 어색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로 소소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태오랑 제가 함께 쓰는 방이에요. 제가 좀…. 아침에 잘 못 일어나서 태오가 매일 깨워 줘요.”

마땅히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솔은 방을 한 바퀴 휘둘러보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오가 주방에서 만들어 내는 자그마한 소음과 깔끔하게 정돈된 익숙한 방이 솔에게 안정감을 전해 주었다. 이 방이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방문 너머로 들리는 이런 소음들이 자신에게서 한없이 멀다 못해 절대 너는 넘어올 수 없을 거라 비웃는 벽처럼 들리기까지 하던 때였다.

매일같이 잠이 드는 방의 모습일 뿐인데 솔은 새삼스레 만감이 교차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자그마한 소리를 들으며 솔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손바닥으로 침대 시트를 스치니 표면이 적당히 서늘하고 사부작거리는 그 감촉이 기분 좋았다. 점점 생각이 덜어지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솔은 제 얼굴이 잘 나오게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본의 아니게 태오가 만들어 준 이 혼자만의 시간을 빌려 자신을 지켜봐 준 팬들에게 솔직한 인사를 전했다.

“영상에 남겨 주시는 댓글 잘 보고 있어요. 다들 감사합니다.”

영상을 찍기 시작할 때 했던 가벼웠던 인사와 달리 솔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표정은 진중하게 가라앉았지만,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 먼 과거의 일도 아닌데, 솔은 기억을 더듬으며 처음 숙소에 끌려오다시피 왔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저 문 뒤에 숨어 멤버들과 벽을 치고 있었던 때를.

“숙소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요. 여기 온 날 조금 많이 무서웠었거든요. 그래서 저기 구석에 쭈그려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은데….”

두런두런, 솔은 혼잣말하듯 첫마디를 꺼냈다. 지금 생각하니 별 시답지도 않은 가시를 세우고 씩씩거린 고슴도치같이 느껴져 그때의 저 자신이 우스웠다. 멤버들도, 솔도 첫 대면에서 나누었던 모난 대화를 서로 몇 번이나 사과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다 같이 힘들었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가장 상대하기 불편해 피하고 싶었던 게 태오였다. 어떤 변명도 안 통할 거 같은 꽉 막힌 벽 같았던 사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리더라는 직함 때문에 먼저 나서서 자신을 끌어당겼던 태오. 이 방에서 함께 잠드는 게 얼마나 숨 막히고 불편했었는지, 그랬던 사람이 지금 저 밖에서 저를 위해 샛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고 있었다. 저는 그런 태오가 좋아서 뒷모습만 보고도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또다시 태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생각만 해도 좋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솔은 씰룩이는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그때는 제가 좀 뾰족했었어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태오가 어려웠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태오가 제일 좋아요…. 아니, 친해요?”

‘태오가 좋아요.’라고 말하고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너무 솔직했을까 싶어 솔은 황급히 카메라를 향해 손을 휘젓고 제 말을 정정했다. 이 영상을 보고 있을 사람 누구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말이었지만 괜히 뜨끔한 솔은 재빨리 태오에게서 지호로 말을 돌렸다.

“지호 형도 정말 잘 챙겨 주고, 득용이…. 아, 이건 편집해 주세요.”

궁색한 변명 하듯, 멤버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가 ‘득용’의 본명을 언급한 솔은 카메라를 향해 가위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솔의 요청과 달리 이 부분은 조금도 편집되지 않았고 ‘이미 다들 알아요.’하는 자막과 함께 그대로 올라갔다. 너무 입에 착 잘 붙는 이름이라 이미 앞선 방송에서 몇 번이고 실수한 바람에, 팬들 사이에선 일부러 ‘김득용’이란 조금 촌스러운 이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는 중이었다.

“DK가 정말 귀여워요. 장난도 잘 치고 너무 귀여운 동생이에요. 매니저 형도 정말 열심히 해주시고, 아… 가람이 노트북에 좋은 노래가 정말 많아요. 다 가람이가 만든 건데, 다들 같이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 사실을 하얗게 모르는 솔은 급히 득용을 ‘DK'라 부르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차곡차곡 한명씩 떠올리다 보니 다들 고맙게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가람에겐 고마움을 넘어서 미안한 마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자신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제 마음에 부담을 느낄까, 그가 일부러 더 조심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오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감정의 어긋남이 가람을 크게 다치게 했을까 솔도 많이 걱정했었다. 하지만 가람이 보여준 노트북 폴더를 보고 솔은 그런 걱정을 내려놓았다. 언제고 데뷔하게 되면 멤버들이 제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하며, 멤버들을 떠올리며 그가 빚어낸 노래들이 여전히 폴더 가득 쌓여 있었다. 더불어 모든 곡 하나하나마다 가람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리고 태오와 가람의 사이는 여전히 좋은 친구였다.

속으로 가람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전한 솔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찌 되었든 제 태도 때문에 불씨가 타올랐던 논란과 갑작스러운 하차, 그것들 때문에 마음을 졸였던 사람들. 이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화면 너머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전할 시간이었다.

“마아스 처음 나갈 때도 걱정되고 무서웠었어요. 저는 겁이 되게 많은가 봐요. 말하다 보니까, 다 무서웠다고 하네…. 그래도 지금은 즐거웠다는 생각뿐이고, 오히려 마아스 나가서 다행이었던 거 같아요.”

솔은 별것 아닌 일처럼 하하 소리 내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든 일들이 성큼 크게 다가왔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그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멤버들이랑도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거기서 저희 힘으로 무대 만들어 가는 것도 좋았어요.”

태오와 함께 안무를 짜고, 나아가 홀로 전체 안무를 구성하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멤버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바꿔 나가고, 그 덕에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도 못했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편안하게 웃으며 홀로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마아스>가 마냥 즐거웠던 건 아니지만 <마아스>에 참여하며 겪었던 일들이 지금처럼 아쉬웠던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넘길 수 있는 단단한 성솔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저를, 저희를 응원해 주시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정말….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진 거 같아요.”

멤버들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 얼굴을 알 순 없지만,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덕분에 불행과 우울함에 매몰되어 자신에게 쏟아지던 시선을 끔찍하게 여겼었던 솔은 이젠 없었다. 지호의 동생들처럼, <마아스> 마지막 무대가 끝나고 방송국을 나서며 마주했던 팬들의 눈동자처럼 애정을 가득 담은 반짝이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마아스>가 솔에게 남겨 준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팬이었다.

“여러분들이랑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 음.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더라. 막상 말하려니까 좀 부끄럽고 생각이 잘 안 나요.”

괜히 울컥 눈물이 조금 날 거 같아 솔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손을 들어 괜히 앞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아주 많았는데 막상 하려니 잘 표현이 안 되었다. 너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서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싶은데, 말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 곱씹어 보던 솔은 손바닥을 짝 내려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제일 고마운 사람에게 해야 할 인사를 빼먹을 뻔했다.

“아! 사탕 고마웠어.”

활짝 웃음 지은 솔이 마치 친한 친구에게 인사하듯, 그렇게 손을 흔들며 편안한 인사를 건넸다. 누구에게 보내는 인사인지 구태여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당사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는 인사였다. 솔은 잠시 카메라를 가만히 응시하며 손을 들어 제 왼쪽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리곤 다시 입술을 떼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을 사람들을 향한 인사이기도 했지만, 솔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그를 지켜보고 있을 부모님을 향한 인사기도 했다. 그저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빈말이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 모두 진심을 담은 진실한 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꿈에도, 불이 꺼진 관객석에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솔은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코끝이 찡해진 솔은 선뜻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잠시, 얼굴을 푹 숙인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잠시 감정을 갈무리한 솔은 득용과 지호가 평소에 하는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장난치듯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끝!”

이제는 이런 능청도 제법이었다. 솔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단정한 목소리를 일부러 높이며 답지 않게 귀염성 있게 굴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과장되게 팔과 몸을 흔들며 솔은 이 영상을 편집하게 될 채민주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제 인사가 지나치게 무거워서, 혹 진심을 담은 인사가 통편집 당하는 건 아닐지 쓸데없는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건 꼭 편집하지 마시고 꼭꼭 올려 주세요.”

솔이 애교 있게 두 손을 흔드는 얼굴 아래로 채민주는 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로맨스 판타지에서 볼 법한 화려한 글씨체로 ‘꼭 올려 드리겠습니다.’ 하는 자막을 넣었다. 밝은 웃음으로 활기차게 몸을 일으킨 솔은 다른 멤버들이 사용하는 방과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옷방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태오는 저를 두고 생각보다 혼자 잘 노는 솔에게 내심 서운해서,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제가 주방에서 내쫓아 놓고는 와서 도우라는 핑계로 솔을 다시 제 옆으로 불러들였다. 태오의 부름에 솔이 좋다고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우당탕 엎어지는 소리와 함께 태오의 한숨 소리가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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