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84화 (184/192)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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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생활감이 느껴지는 평범한 주방,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다섯 개의 컵과 모든 식기가 마치 맞춘 것처럼 다섯 개씩 열을 맞춰 진열되어 있는 건조대 빼고는 별 다를 것 없는 주방의 모습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위치에 카메라를 두었는지, 우당탕, 무언가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와 분주한 소음이 반복되었지만 정작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카메라의 초점이 어긋나며 대뜸 화면 가득 물이 들어찬 냄비가 등장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오고 갈 수 있는 생방송도 아닌데 청아한 목소리의 질문이 이어졌다.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건데요….’라는 자막이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의 의문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하는 답을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성솔, 그거 내려놓고 그냥 앉아 있어.”

“조금 덜 까요?”

나지막한 태오의 목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려왔다. 조금 한숨이 섞인 듯한 태오의 답에 카메라가 조금 움직이더니 그제야 화면에 제대로 솔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이 가득 든 스테인리스 냄비를 들고 선 솔이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냄비와 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태오와 눈이 마주쳤는지, 민망한 듯 어물쩍 웃음을 지었다. 그런 솔의 모습에 태오가 화면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그의 손에 들린 냄비를 빼앗아 들었다. 태오는 냄비 가득한 물을 확인하곤 잠시 말을 골랐다.

“…그냥 앉아 있어.”

“지호 형처럼 요리는 못하지만, 라면 정도는 당연히 끓여.”

“아니. 앉아 있어.”

솔이 변명하듯 태오의 눈치를 보며 말했지만 돌아온 답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서로에게 직접 요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걸 촬영하기로 결정하자마자 두 사람은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냉장고를 열어 어떤 음식으로 솜씨를 발휘할 건지부터 결정해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부끄럽게도 솔의 자취 인생 전부를 통틀어도 주방에서 무언갈 해 먹어본 적이 없었다.

본래 잘 안 먹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그때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섭취한 음식이 바로 컵라면이었다. 그랬다. ‘라면’ 그것이 솔이 할 줄 아는 요리의 전부였다. 지호가 들었다면 라면을 끓이는 걸 요리라 할 수 있냐 하고 버럭했겠지만 정확히는 라면도 불안했다. 그래도 그냥 라면만 끓이자니 민망해진 솔은 냉장고에서 파나 양파 같은 채소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이미 그 시점부터 태오는 불안한 눈길로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가 아니라 제 손을 자를 것 같은 불안한 칼질, 꺼내 놓은 라면 두 봉지의 뒷면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위기를 감지한 태오는 음식 준비를 하면서 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냥 솔의 행동거지 모든 것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처럼 불안불안했다. 그래도 태오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제가 꺼낸 재료를 손질하며 틈틈이 솔을 너그럽게 지켜보았다. 불안한 그 모습도 태오의 눈에는 꼭 소꿉놀이하는 듯 귀여웠다. 하지만 이내 라면 두 개가 아니라 마치 목욕물이라도 끓일 듯, 한강으로 물을 받는 그를 보며 태오는 본능적으로 솔을 이쯤 말려야 저녁 식사를 제시간에 온전히 할 수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태오가 솔의 손에 들린 냄비를 빼앗아 화면 밖으로 사라지자 솔은 민망하게 ‘하하’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내심 스스로가 불안했던 건 솔도 마찬가지였다. 태오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손대는 것마다 어설펐다. 싱크대 앞에서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 그가 서 있었던 자리가 산란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가지런히 잘 놓여 있던 그릇도 솔이 손을 대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결국 태오에게 냄비를 빼앗긴 솔은 쭈뼛거리며 고정해 두었던 카메라를 빼 들었다. 제대로 잘 녹화되고 있는지 카메라를 한번 뒤집으니 자그마한 액정 가득 솔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이제 이런 셀프 캠도 몇 번 해봤다고 지호나 다른 멤버들처럼 능수능란까진 아니었지만 제법 느낌이 나왔다. 솔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떻게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화면에 담기면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솔은 홀로 나름의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등 뒤에서 들리는 솔의 목소리에 태오는 그가 가득 담아 둔 물을 버리며 피식 웃음 지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어… 다른 멤버들은 집에 갔고 저랑 태오만 숙소에 남아 있습니다.”

짤막하고 조금은 어색함이 묻어 나오는 인사를 하던 솔은 카메라를 획 돌려 주방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태오를 비췄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지호의 노란색 앞치마를 두른 채 채소를 손질하고 있는 태오의 모습이 카메라 앵글을 채우자 솔은 웃음을 참으려 입가를 씰룩거렸다. 짙은 눈썹에 강한 인상을 한 그가 샛노랗고 귀여운 앞치마를 한 모습이 언밸런스하기도 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안 어울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 태오가 저녁을 해주고 있어요. 원래 저도 같이하려고 했는데 태오한테 거부당했어요.”

“…….”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솔의 말에 태오는 양파를 까던 손을 멈추고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태오의 시선에 약간의 불만과 억울함 같은 것이 섞여 있어 솔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태오가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솔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들썩이곤 능청스레 혀를 빼꼼 내밀었다. 그래 봤자 고개를 돌린 태오는 보지 못했지만.

이내 칼날이 도마를 딱딱딱 때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이어지자 솔은 턱을 괴고 태오의 너른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것도 잊고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태오의 너른 등을 쳐다보던 솔은 뭘 하든 열중하는 너른 등이 든든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히 태오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솔이 장난기를 머금은 질문을 던졌다.

“뭐 해 줄 거야?”

“밥.”

푹신한 깃털처럼 보드라운 솔의 목소리와 달리 태오의 대답은 딱딱했다. 솔은 제 손에 들린 카메라와 태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둘이 있을 때, 태오가 제 이름을 얼마나 몽글하고 부드럽게 부르는지 익히 알고 있는 솔이었다. 그래서 멤버들과 카메라만 있으면 무뚝뚝하게 ‘성솔’하고 부르는 것에 서운하거나 아쉽기보단 요즘 들어 그 차이가 퍽 귀엽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솔은 카메라를 들고 태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장난을 걸었다.

“먹을 수 있는 걸 만드는 거지…? 태오야.”

라면 물 양도 못 맞춰 쫓겨난 주제에 그런 걸 따진다는 게 우스웠지만 반쯤 정말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늘, 지호가 주방을 담당했기에 태오가 직접 뭘 해준 적이 없었다. 멤버들이 도우려 기웃거리면 지호가 등을 떠밀어 내쫓아 버리곤 했기 때문에 더더욱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제법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솔은 몸을 길게 늘여 태오의 어깨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손을 확인했다. 솔이 슬그머니 뒤에서 다가가 카메라를 든 팔을 쭉 뻗어 도마 위를 촬영했다. 도마 위에는 양파와 피망, 갖은 채소들이 차곡차곡 일정한 크기로 썰려 있었다. 어쩐지 채소를 썰어 놓은 모양새도 균일한 게 태오다웠다.

솔의 의심에 태오는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녹화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더 말이 적어진 태오였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가 마치 ‘네가 할 소리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솔이 앞치마를 두른 태오의 모습을 낯설어 하듯 태오도 이런 상황이 낯설고 조금 쑥스러웠다. 사실상 자취나 다름없는 연습생 생활을 오래 했고 뭐든 홀로 해내야 했던 태오이기에 간단한 요리 정도야 할 수 있었지만, 지호처럼 솜씨가 거창한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누군가에게 대접해 주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우당탕 일을 오히려 더 벌이는 솔보단 제가 나을 거 같아 호기롭게 그에게 먹고 싶은 걸 말하고 그냥 앉아 있으라 했지만 사실 태오도 슬슬 걱정이 쌓여 가던 참이었다. 혼자 해 먹는 것과 달리 제법 모양도 그럴싸해야 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쁘고 맛있는 것만 먹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 없는 일에 의욕이 앞서다 보니 천하의 태오도 조금 긴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말수가 더 적어지고 무뚝뚝해지고 있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을까?”

“없어. 저리 가서 숙소라도 촬영하고 있어.”

제법 능숙하게 촬영을 시작했지만 그래도 본래 타고난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다. 금세 할 말이 없어져 버린 솔은 비어 버리는 오디오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태오에게 물었다. 하지만 태오는 부끄럼타는 미술 시간의 짝꿍처럼 너른 등으로 자꾸만 제 손을 가리며 오히려 솔에게 주방을 나가라 축객령을 내렸다.

태오에게 떠밀려 주방을 벗어난 솔은 조금 어색한 어조로 숙소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저 남자 다섯이 부대끼며 사는 평범한 집이었지만 워낙 깔끔한 두 사람 덕에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어 화면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잡혔다. 거실로 나간 솔이 카메라에 대고 두런두런 혼잣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자 태오는 급히 손을 씻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냉장고엔 득용의 부모님이 가져다 둔 소고기와 직접 농사지으신 채소가 가득하였다. 그냥 소금, 후추 밑간만 하여 구워 먹어도 맛있을 재료들이었지만 그건 어쩐지 요리라 부르긴 민망할 듯싶었다. 태오는 혹 솔이 돌아오진 않는지, 흘깃 거실을 내다보며 급히 레시피를 검색했다. 있는 재료를 활용해 뭔가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보던 태오의 손이 불고기와 찹스테이크 레시피에서 멈췄다.

태오가 일등 신랑감 같은 매력을 뽐내고 싶어 열심인 사이 솔은 잘 정돈된 거실을 거쳐 저와 태오가 함께 사용하는 방문을 열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속삭였다.

“살짝만 보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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