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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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니까.”
“괜찮아. 병원도 가야하고… 그러니까 우리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와. 지호 형.”
“형 없다고 사고치고, 병원 안 가고 그러면 안 된다.”
“설마. 태오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짐 가방을 든 채 현관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지호는 솔이 ‘태오’를 언급하자 태오에게 시선을 옮겼다. 꼭 무슨 신혼부부가 손님 배웅하는 것처럼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서서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 지호는 ‘그러니까, 태오랑 둘만 있어서 더 걱정인 거라고.’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태오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지호의 시선에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살짝 씰룩거렸다. 지호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혀를 쯧 찼다.
멤버들이 <마아스>를 자진 하차하고 2주가 지났다. <마아스>는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명하가 속해 있던 조가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그래서 실제 데뷔하기 전까지의 일상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나 온뮤직이 우승 보상으로 내걸었던 소식들이 연일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팬들 사이에선 자진 하차한 7조 TEAM ONE이 매일 같이 거론되었다. 덕분에 사실상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7조가 하차하며 5조가 우승을 차지한 모양새가 되면서 말이 끊이질 않았다. 애초에 방영 내내 악의적인 편집으로 만들어 냈던 두 팀 간의 갈등, 특히나 명하와 솔의 대립 구도 탓에 양 팬덤 간의 관계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솔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며 비난에 동조했던 명하의 팬이 유독 많아 7조를 응원하는 팬들 사이에선 그들을 향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5조 팬덤의 경우 어부지리로 트로피를 차지했다 말하는 7조 팬들이 좋게 보이지 않다 보니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음에도 게시판엔 늘 새로운 글이 수시로 올라왔다. 거기에는 제작진의 일방적인 몰아가기, 악의적 편집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모종의 커넥션과 조작이 있었던 건 아니냐 의심하는 글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YC 엔터테인먼트 측에서야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상황이 굴러가니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와중이었지만 인터넷 반응을 수시로 확인하는 가람을 비롯하여 멤버들은 어쩐지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기다 스토커 사건에 대한 보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멤버들은 일부러 전원 병원에 입원하여 전체적인 건강 검진을 받았다. 일종의 보여 주기식 쇼긴 했지만 어쨌든 멤버 모두의 건강을 확인한 일은 잘한 일이었다. 다만 그러다 보니 멤버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사그라들 줄 몰랐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포착되면 팬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스토커에 대한 고소까지 진행하다 보니 말이 휴식이었지 지난 2주간 방송에 나갈 때보다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고 더 정신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드디어 이번 주부터 진짜 휴식이 시작되었다. 그래 봤자 여전히 행동을 조심하고 최대한 외출을 삼가하란 말이 덧붙었다. 어쨌든 정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자 제일 먼저 득용의 부모님이 숙소로 달려오셔 귀한 막내아들을 데려갔다. 잠깐 다녀가셨을 뿐인데 득용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무게로 숙소 냉장고를 채워 주고 가셨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조금 섬찟한 말이지만 냉장고 안에 득용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정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론 아무래도 걱정이 깊었던 가람의 부모님이었다. 소속사에서 적극적으로 스토커에 대한 처벌과 고소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부모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기에 두 번째로 가람이 휴가를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이 지호였다. 사실 지호는 누구보다 제일 먼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멤버들이 모두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훌쩍 떠나 버리면 숙소에 남을 솔이 걱정되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내 태오가 숙소에 남겠다고 말하자 지호는 그 다음날 바로 짐을 쌌다. 도끼눈을 하고 태오를 흘겨보긴 했지만 그래도 눈치껏 먼저 빠져 주는 지호였다.
“이참에 영호 형도 좀 쉬어요.”
“맞아요. 병원은 태오랑 같이 다니면 되니까요.”
태오의 어머니가 재차 병원에 입원했지만, 다행히 솔이 상담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병원과 동일했다. 그래서 둘은 진료 날에 맞춰 병문안도 가면 된다며 영호에게도 걱정하지 말란 말을 덧붙였다. 속셈이 훤히 보인다고 해야 할까, 지호는 여전히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두 사람을 보다 피식 웃음 지었다. 어찌됐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알았으니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지겹고 심심하면 연락해. 가요, 영호 형. 방해꾼은 사라져 줍시다.”
지호는 영호의 팔을 끌어당기며 현관을 나섰다. 영호가 닫힌 현관문을 향해 저녁거리 챙겨서 다시 오겠다며 질척이자 그는 ‘냉장고에 득용이 부모님이 넣어 준 음식 많으니 신경 쓰지 마요.’라 말하며 영호를 앞장세웠다. 그렇게 숙소에서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떠나고 나자 집 안이 고요해졌다. 솔도 태오도 대체로 조용조용한 편이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솔이 휘적휘적 걸어 소파에 몸을 뉘자 여전히 잠옷 차림인 그를 보며 태오가 넌지시 물었다.
“뭐…. 할래?”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뭔가 묻고 나니 은근히 뭘 바라고 물은 듯한 뉘앙스가 되어 버려 태오는 귀를 붉히며 어물쩍거렸다.
“아무것도 안 할 건데….”
쑥스러워하는 태오의 태도가 무색하게 솔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듯 맹한 얼굴로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솔의 대답에 태오는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은 했지만, 솔은 모처럼 주어진 휴가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실컷 잠이나 잘 생각인 듯했다. 자연스레 소파에 누워 버리는 솔을 보며 태오도 그의 머리맡에 자리했다. 잠시 고요의 시간이 지나갔다. 오후의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서 두 사람은 한껏 여유를 부렸다. 어느새 태오는 솔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그의 얇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내렸다. 아무런 의도도 욕정도 없이 그저 머리를 비우고 한 행동이었다.
태오는 항상 생각이 너무도 많았다. 늘 ‘만일’이라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주변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 안에 있는 것을 파악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이 마침내 기능을 정지하면 그제야 생각을 비워 냈다. 그에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온전한 휴식이었다. 생각 없이 솔의 머리카락을 한참 쓰다듬던 태오의 손이 귓바퀴를 스치자 솔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태오의 손을 잡아 세웠다.
“간지러워.”
득용이 매번 하는 장난질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간지러웠다. 상대가 태오라서일까? 솔이 제 귀를 벅벅 문지르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미안’하고 말했다. 태오는 불만이 있는 듯 입가를 씰룩이며 일어나 앉은 솔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워 눌린 머리카락과 느른하게 잠기운이 남아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이고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솔을 만지고 싶은 기분이 되어 태오는 두 손을 뻗어 솔의 손을 붙잡았다. 말없이 제 두 손을 꼭 잡는 태오의 행동에 부끄러워진 솔이 두 뺨을 붉히자 태오가 다정히 웃으며 물었다.
“뭐 좀 먹을까?”
“아니.”
멤버들이, 특히나 득용이 봤으면 두고두고 놀렸을 모습이었다. 평소 딱딱하기만 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상온에 꺼내 둔 버터처럼 녹아 흐물거리는 태오의 모습 하며 눈치 보며 쉼 없이 무언가를 하려 했던 솔이 가람처럼 게으름을 피우며 어리광 부리듯 늘어진 모습까지. 모처럼 찾아온 조용하고 아늑한 휴식이 두 사람을 한껏 풀어지게 했다.
“밥 안 먹을 거야?”
“귀찮아서….”
“어디서 지호 형 잔소리가 들리는 거 같네.”
솔의 대답에 태오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태오의 말에 솔은 숙소에 지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아차 해 숙소를 둘러보았다. 지호가 들었으면 ‘귀찮아서 밥을 안 먹는다는 말이 어딨냐’며 보란 듯이 솔에게 먹을 것을 쥐여 줬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득용이 한 입만 주면 안 되냐고 집적거리고. 그러면 또 그 모습을 본 가람이 득용에게 ‘그거 한입 먹으면 운동장 두 바퀴는 더 돌아야 해’하고 놀릴 것이었다. 자동으로 연상되는 그 모습에 솔은 태오의 손을 잡은 채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붙어서 늘어져 있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이젠 슬슬 몸을 움직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솔을 보며 영호가 준 손바닥만 한 카메라를 꺼내 왔다.
“이거 하자.”
“우리 둘이서?”
“응.”
“뭘 찍어?”
태오에게 카메라를 건네받은 솔은 고민스럽다는 얼굴로 카메라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이번에 휴가를 받으며 영호가 하나씩 쥐여 준 개인 캠이었다. 별도의 SNS나 소통 창구가 없다 보니 YC 엔터테인먼트 계정으로 올렸던 TEAM ONE의 영상에 팬들의 장문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멤버들의 상태와 건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는데, 이를 확인한 영호가 제시한 방법이었다.
‘휴식’이라 칭했던 것만큼 대외 활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팬들을 안심시키면서 한편으론 잊히지 않도록 각자 휴식하고 좋아지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가 조금씩 업로드해 보자고. 이는 팬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회사를 의식한 영호가 멤버들을 위해 제안한 것이었다. 솔은 카메라에 전원 버튼을 누르곤 숙소 이리저리 비춰 보다 카메라 렌즈를 태오에게 향했다. 카메라의 조그마한 액정에 잡힌 태오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했다.
“이렇게 쉬고 있는 거… 아니면 저녁 요리해 먹는 거?”
그의 의견에 솔은 ‘오’ 하고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멤버들의 식사를 지호가 전담해 챙겼기에 사실 부엌에 설 일이 그닥 없었다. 문득 생각이 이어지자 앞치마를 맨 태오의 모습이 궁금해 솔은 넌지시 의견을 던졌다. 더불어 자신도 태오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럴까? 그럼 서로 요리해 주기.”
무뚝뚝한 편인 태오가 늘 지호가 매는 귀여운 앞치마를 맨 모습을 상상해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 생각을 솔만 한 것은 아니었다. 태오도 피차 마찬가지 생각으로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태오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퍽 자신 있게 솔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재료는 냉장고에 한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