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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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제게 몰린 시선에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뭐라 말해야 할까, 할 말이 생각이 안 났다. 멤버들을 비롯해 영호, 스타일리스트까지 촬영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온 모두가 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지만, 말은 안 나오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웃음과 동시에 눈물도 나왔다. 기쁘고 벅차올랐고 동시에 조금 슬프고 아쉽기도 했다. 방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팬들과 인사까지 끝마치고 나자 다채롭고도 복잡한 감정들이 그에게로 몰려왔다.
솔의 몸에 걸쳐진 액세서리를 빼 주던 스타일리스트가 울면서 웃는 그의 모습에 당황해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솔이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자 지호가 그의 어깨를 감싸주며 한마디를 던졌다.
“즐거웠다. 그치?”
“응!”
지호가 웃으며 묻자 솔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뿐만 아니라 지호의 눈꼬리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벅차오르는 하루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 위에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밝은 조명에 그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황. 긴장감에 얼어붙어 실수하고 나서야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관객들의 얼굴. 분명 그런 상황이 솔을 겁먹게 했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솔은 그 조명 아래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손을 꼭 쥐고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얼굴부터 손에 든 물건마다 적혀 있는 글자 하나까지 눈동자 가득 들어왔다.
내리쬐는 조명보다도 더 밝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무대가 끝나고 울려 퍼지던 박수 소리, 그리고 제 이름을 외치던 목소리까지 오늘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그 모든 요소가 솔을 생동하게 했다. 마지막 무대라는 아쉬운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은데다 무대가 끝나고 발표될 점수나 탈락 팀 명단 같은 것도 이제는 무관한 일이 되어서일까? 마음껏 웃고 마음껏 소리 내 노래하며 힘껏 춤을 출 수 있었다. 오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무대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관객석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찾지도 않았고 억지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었던 그날처럼 웃지 말라 말해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즐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득용 못지않게 방방 뛰며 즐거워했는데,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참가자와 제작진에게 인사하고 그간 나름 정을 붙이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대기실을 둘러보니 조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퇴근길, 방송국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팬들을 마주하니 그제야 아쉬운 마음이 스미며 눈물이 맺혔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제 이름을 연신 부르는 팬들을 보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다짜고짜 ‘미안해요’라는 말을 내뱉었다.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던 무대에서의 순간을 알고 나니 저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솔을 덮쳐 왔다. 피차 같은 마음이었던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이 나서서 솔이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을 대신 표현해 주며 인사를 전하고 막 회사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펼쳐진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슬퍼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영 신경이 쓰인 득용이 솔을 달래 볼 겸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 속도 모르고 가람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솔이 형, 웃는 거예요, 아님 우는 거예요.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난다고요!”
“웃다가 운거니까 솔은 괜찮아.”
“아, 그 말이 아니잖아요. 가람 형.”
쓸데없는 곳에서 진지한 가람의 반응에 득용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만담 콤비 같은 모습에 솔은 눈물을 훔치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우는 건지 웃는 것인지.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스타일리스트도 솔과 함께 웃으며 거추장스러웠던 액세서리를 푸는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한정된 시간에 쫓겨 만들어 냈던 의상인지라 부실한 부분이 많았다. 옷걸이가 워낙 좋은 탓에 겉보기엔 화려하고 번지르르했지만, 안쪽으로 스테이플러를 박아 임시 가봉한 부분도 있었고 그 이외에도 실밥이며 마감까지 엉망이었다.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엉망이 된 의상을 정리해 주는 스타일리스트를 보며 솔은 그녀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의상 너무 멋졌어요. 감사합니다.”
<마아스>에 참여하는 동안 비록 회사에서 임시로 붙여 준 스타일리스트였지만 나름 역경을 함께 거쳐 온 동료였다. 특히나 이번 무대 의상에 그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각자의 위치가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함께 밤을 새웠던 솔은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아스> 하차로 솔과 멤버들의 활동이 사라지면 그녀도 다른 팀으로 배치될 것이기에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솔이 먼저 인사하자 태오가 한결 더 정중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득용을 비롯한 멤버들도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희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맞아요. 오늘 의상 역대급이었어요.”
멤버들의 인사를 받은 그녀는 대일밴드투성이인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어 보였다. 나름 함께 고생하며 동고동락한 사이라 그녀도 순간적으로 울컥 감정이 몰려온 듯했다. 끝까지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솔이 그녀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태오는 그 모습을 사뭇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다 멤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호 형도 감사해요.”
솔이 그러했듯, 태오도 진심을 담아 그에게 인사했다. 영호에게 티끌만큼도 불만이 없었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늘 그가 자신들을 동생처럼 여기며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 해주려 노력한 것을 알고 있었다. 뒤이어 멤버들이 무대 뒤에서 늘 애써 준 영호에게 박수를 보냈다.
“영호 형. 형이 최고예요. 진짜로!”
“너희가 더 최고야. 얘들아. 형이 진짜 너희한테… 정말 미안하다.”
자신은 그들에게 제대로 해준 것도 없고 맨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을 뿐이다. 거기다 힘이 없는 자신과 회사 때문에 결국엔 아쉬운 하차를 하게 되었음에도 저에게 고맙다 인사를 건네는 멤버들을 보며 영호는 기어이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해진 영호가 주책없이 흐느끼자 득용이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아…. 아, 영호 형 왜 이래요. 솔이 형 달래 놓으니까 영호 형이 울면 어떡해요!”
득용이 영호를 타박하자 그 모습에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마아스>에서 탈락하면 모든 것에서 실패하는 것 같은 거대한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영호가 미안해하며 울음을 터뜨린 이유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 아무것도 확답을 줄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태오도 가람도, 지호도, 득용도 연습생 생활을 하는 내내 그 불안한 미래를 두고 경쟁하며 한 번의 실수로 실패자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달라졌다. 솔이 멤버들에게 온 뒤로, 모든 것이 차차 변해 갔다. 물론 그 중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솔이었지만, 멤버들의 모습 또한 날이 서 있던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변화를 여지없이 느끼고 있었다. 솔과 함께하면서 어느새 실패나 탈락 같은 것보다는 ‘함께’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함께, 우리, 모두.
그래서인지 아쉬움이 없다곤 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솔처럼 다들 그리 크게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는 영호를 보면서도 어째서인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찾아와 주었던 팬들에게 했던 말처럼, 조금만 쉬었다가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거란 그런 이상한 믿음이 어쩐지 샘솟아 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멤버들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서로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렇게 울어요. 우리 잠깐 좀 쉬었다가 더 멋지게 돌아올 거잖아요.”
“당연하지. 가람이 좀 봐라, 그동안 밤샘을 너무 밥 먹듯이 했어. 다크서클 봐.”
“나?”
태오가 영호의 등을 두드리며 덤덤한 어조로 말하자 지호가 능청스레 받아쳤다. 갑자기 지호에게 멱살 잡혀 끌려 나온 가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후…. 저도 다이어트 너무 오래 한 거 같아요. 좀 쉬었다가…”
“무슨 소리야, 득용아. 그건 쉬면 안 되는 거야!”
“너무하네.”
득용의 능청스러운 말에 언제 대성통곡을 했냐는 듯 영호가 고개를 번쩍 들고 정색하며 그를 만류했다. 씨알도 안 먹힌 제 시도에 득용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또다시 다들 한바탕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지만 이를 드러내며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솔이 꼬물꼬물 수줍게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난생처음 해보는 제안이었다. 연락 올 곳이 없어 늘 처박아 두었던 핸드폰도 최근엔 은겸과 연락을 주고받느라, 또 스토커 사건 이후로 경각심이 생겨 소중히 품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멤버들의 핸드폰 화면과 제 핸드폰 화면의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사진 하나 없는 핸드폰. 그 텅 빈 핸드폰에 솔은 지금 자신과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담고 싶었다.
“아, 솔아.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지금 눈물 콧물 다 뺐는데. 얼굴 엉망이란 말이야.”
“지호 형은 늘 엉망인걸. 새삼스럽게 뭘.”
빼는 말과 달리 지호는 냉큼 솔의 옆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득용이 질 수 없다는 듯, 지호를 놀리며 솔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질 수 없다는 듯 그 사이를 가람이 비집고 들어갔다. 지호는 거기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솔에게 팔짱까지 끼며 얼굴을 마구 들이밀었다. 내심 솔과 제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싶었던 태오가 순식간에 자리를 뺏겨 버리자 은근슬쩍 지호의 이름을 부르며 눈치를 주었다.
“…지호 형 좀만 옆으로.”
눈치가 빤했지만, 지호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더욱더 솔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는 수 없이 태오가 제 큰 키를 이용해 솔의 뒤편에 섰다. 그 뒤로 스타일리스트와 불어 터진 감자 같아진 영호가 빈자리를 메우자 솔은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핸드폰 카메라에 모두의 모습을 담았다.
“다시 찍어요. 저 눈감았어요.”
“와, 솔이 사진 진짜 못 찍는다. 지금 우리 다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어.”
솔이 찍은 단체 사진을 확인한 득용과 지호가 한마디씩 건네자 태오가 목을 길게 빼 사진을 확인하고 과묵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다시 찍자.”
그 한마디에 다들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웃는 가운데 솔은 제 핸드폰에 담긴 사진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지호가 연신 못생기게 나왔다며 놀렸지만 누가 뭐라든 솔의 눈엔 행복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