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순백의 의상은 전에도 한번 입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팬들사이에서 하고많은 날 일 못한다고 까는 소속사가 지난 사건으로 이제야 각성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무대 의상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 있던 솔의 손끝이 하늘거렸다.
사실 발레건 현대 무용이건 한국 무용이건, 정은의 인생은 무용과는 정말 인연이 없었고 그런류의 공연이라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수행 평가 점수를 얻으려고 공짜 표를 받아 한번 가 본 것이 전부였다. 지루하고 영 어렵다고 생각했던 분야. 정은은 흔히 말하는 무용 ‘알못’이었고 관심도 없었지만, 솔이 무용을 전공했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느닷없이 뒤늦은 무용 공부를 했다. 사실 정은은 솔을 파기 시작한 후로 처음 시작하는 것이 많았다.
더군다나 제 최애가 그 분야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는데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애가 잠깐 다녀갔다는 카페나 식당도 성지 순례라고 찾아다니는 팬도 있는데 하물며 유소년기를 다 쏟아부었다는 전공이었다. 누군가 TEAM ONE 영상 아래에 달아 둔 어린 솔의 무용 대회 참가 영상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구분도 잘되지 않는 저화질의 영상에서 어린 솔을 잘 찾아내 여러 가지 관련 지식과 함께 공유했다.
그 덕에 보는 눈이 조금이나마 생겨서일까? 아니면 그냥 콩깍지일까. 솔이 높이 들어 올린 팔을 느슨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정은의 눈엔 이곳이 <마아스> 생방송 무대가 아니라 무슨 격조 있는 국립 무용단의 공연처럼 남달라 보였다.
전 국민이 다 알만한 클래식 연주가 시작되자 솔은 물 흐르듯 아름답게도 움직였다. 조금 낙낙하게 느껴지는 레이스 셔츠와 긴 소매가 정말 신의 한 수 같았다. 거기에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몸의 실루엣이 긴 소매와 더해져 그의 춤 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우아함을 자아냈다.
주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어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지만 막상 소리를 지르라고 멍석을 깔아 줘도 제대로 못 지를 것 같은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정말 숨을 참았다. 여럿이 채우는 무대에 홀로 올랐지만, 관객석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솔을 따라다니는 조명처럼 그를 따라 움직였다. 무대의 빈자리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솔에 대한 그 어떤 논란과 판단도 상관없어지는 오프닝이었다.
조명이 만들어 낸 원 안에 솔이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음악에 맞춰 손을 높이 뻗어 올렸다. 낙낙하고 긴 소매가 흘러내리며 곧게 뻗은 흰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대까지의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정은은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곧 클래식 곡조 아래에 익숙한 멜로디가 낮게 마련되었다. ‘아, 이 노래.’하며 모두가 깨달을 만큼 노랫소리가 선명해지자 ‘탕’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의 조명이 내려갔다. 몇 초가 채 되지 않는 순간, 다시 화려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자 어느새 무대에 오른 네 남자가 곧게 뻗은 솔의 팔에 손을 휘감고 서 있었다.
“숨이 차, 나는 지금 무대 위에 서 있어.”
흰 석고상처럼 제각각의 포즈로 멈춰 서 있던 멤버들 사이에서 멎었던 노래가 흘러나오자 득용이 첫 소절을 내뱉으며 미끄러지듯 대각선으로 나아갔다. 그다음으론 지호와 가람이, 마지막으론 태오가 움직였다. 솔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사선으로 펼쳐져 멈춰 섰다.
첫 소절의 가사처럼, 춤을 추다 멈춘 것 같은 멤버들과 달리 방금 솔로 인트로를 끝낸 솔은 팔을 내리고 오도카니 무대에 서서 어깨를 들썩였다. 연출된 것이긴 했지만, 솔은 정말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몇 초가 채 되지 않는 시간, 솔은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언제 헐떡였냐는 듯 정갈한 모습으로 다음 소절을 입에 담았다.
“조명이 꺼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날 부르는 목소리마저 사라지면 시간이 멈춘 듯 해.”
본래도 음색 자체가 청아해 깡패 같긴 했지만 <마아스>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불안정한 음정과 호흡, 자신 없는 끝음 처리로 점수를 야금야금 깎아 먹던 솔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성솔은 더 이상 이 무대 위에 없었다. 깨끗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도 청아해 노랫소리가 아니라 마치 정갈한 기도나 독백처럼 느껴질 만큼 깨끗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굳어 있던 석고상에 생명이 불어넣어진 듯, 멈춰 있던 멤버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명을 다시 켜 줄래? 너의 목소리로 무대를 채워 줘. 그러면 다시 노래와 함께 우리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낮게 베이스만 잡아 주었던 리듬이 조금 더 강하고 빠르게 들어오자 멤버들처럼 노래도 살아나듯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청아한 솔의 목소리 다음으로 부드럽고 나긋한 가람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순백의 멤버들에게 색이 하나씩 입혀졌다. 최근 솔 못지않게 슬픈 소식으로 커뮤니티를 술렁이게 했던 태오가 가람을 밀어내며 대열의 맨 앞으로 나섰다. 며칠 사이 야윈 탓에 더 깊고 강렬해진 눈매는 스크린을 찢고 나올 듯이 선명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우리의 노래는.”
정은은 입을 틀어막고 내적 비명을 질렀다. 이 무대가 끝나고 나면 파란색 SNS에 정은은 딱 세 글자를 적을 것이었다.
‘찢.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정은의 마음은 다른 이유로 갈래갈래 찢어졌다. 털썩, 걸을 힘도 없어 빈 벤치에 주저앉았다. 충격을 받은 듯 넋이 나간 정은은 허공을 보며 눈물짓다가 핸드폰을 들어 빨간 알림 표시가 떠 있는 파란색 SNS를 확인했다. 오늘 방송이 끝나고 알려진 충격적인 소식에 덕계가 뜨거웠다.
사약술수
@sayag2034
진짜 세상이 내 덕질을 억까하고 우리 애들을 억까한다 ㅅㅂ
마아스이제안보는계정 @maidols_1231
[TEAM ONE] 전원 하차 이거 실화야?
지랄하지마 제발 진짜
해물된찌 @So_Delicious
하차 실화냐고.. 나 지금 울어...이제 우리 애들 개떡상해서 데뷔각이였는데? 아니 진심....... 이걸 온뮤직이? YC 진짜 뭐하는거야.. 애들 너무 불쌍하고 억울해서 별안간 우는 여성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두유(ᓀ ֊ ᓂ ) @maeilDoU
???????? 이게 맞는거임?????? 나ㅏ는 이해가 안돼
마니 @many22
천국과 지옥 5분만에 오고가기
의상 보고 YC가 오랜만에 일했다 칭찬하고 5분 만에 개같이 욕하기
정은은 촬영이 끝나고 팬들에게 따로 인사를 하러 시간을 내서 찾아와 준 멤버들을 보며 한참을 울었더랬다. 촬영장을 빠져나와서도 훌쩍이는 팬이 있는 한편 욕을 하며 화를 내는 팬도 있었지만, 다들 한결같이 온뮤직 건물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도리어 오늘 찾아와 준 팬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달래 주던 멤버들과 솔을 정은은 되새겨 보았다. 오늘따라 왜 마음 아프게 더 이쁘게 웃는 건지 정은은 애써 감정을 다스려 보려 했지만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처음 하게 된 쓰리디 덕질이 너무도 쓰고 매웠다. 이제 제가 응원하는 팀에게 꽃길만이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은은 제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은 타임라인을 혼이 나간 얼굴로 계속해서 새로 고침했다.
[마아스, 7조 TEAM ONE 자진 하차… YC “마음의 치유 필요해”]
[마아스 측, 논란과 무관… 아티스트 개인 사정과 건강상 문제로 내린 결정]
VCR 영상을 통해 멤버들의 인터뷰와 하차를 하게 된 이유, 그리고 사과가 나왔지만 그것을 보고도 아직 제 두 눈과 귀를 의심하고 현실 부정을 하거나 더 자세한 이유가 궁금했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뜬 기사를 자신들의 SNS에 퍼다 나르고 있었다. 솔의 말도 안 되는 인성과 태도 논란에 있지도 않은 학폭 논란까지 터졌을 때 못지않게 많은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정은은 그 수많은 기사 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마아스’ 최종 결승 앞두고 7조 TEAM ONE 하차한 이유? “스토커와 우울증에 시달려…”]
지난 XX일 인성 논란과 더불어 불화설에 휘말렸던 YC엔터테인먼트 소속 TEAM ONE 전원이 ‘마이 아이돌 스타즈’에서 자진 하차한다.
온뮤직넷 ‘마이 아이돌 스타즈’ 측은 “7조 TEAM ONE이 경연 기권 의사를 전해 왔으며 의사를 존중해 자진 하차를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했다” 고 밝혔다. 더불어 제작진 측은 “‘마아스’ 무대를 위해 쏟은 노력이 크고 아티스트를 향한 존중과 예의 차원에서 하차 직전까지의 모든 분량은 방송될 예정”이라고 답했다.
‘YC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아티스트가 근거 없는 논란과 비난에 상처받았으며 더불어 숙소에 무단 침입하는 등의 스토킹 피해를 입어 멤버 모두가 휴식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 전했다. YC엔터테인먼트는 TEAM ONE 멤버 성 솔에 대한 음해성 글을 올리고 스토킹한 가해자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였으며 강력한 법적 대응과 아티스트 보호를 위한 최선을 다할 것이라 알렸다.
TEAM ONE의 리더 태오는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찾아와 준 팬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 마음이 무겁다”면서 “저희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또 멤버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결정이었다”며 “이렇게 마무리하게 되어 죄송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과했다.
[비엘투데이 이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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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YC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은은 기사를 다시 한번 빠르게 읽어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가 정신이 혼미했다. 비단 정은만 그랬던 게 아닌지 충격을 받은 팬들이 해당 기사 내용을 인용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해물된찌
@So_Delicious
그러니까 성솔 인성 논란 글 쓴 놈 = 스토커라는 거지?
사약술수 @sayag2034
우리 애들을 세상이 억까한다ㅅㅂ 교통사고 PTSD, 우울증인데 스토킹 당하고 악플에 시달리면서 마아스 무대 준비를 했다는 거잖아? 그것도 이 노래를??? 그래 놓고 오늘도 그렇게 웃으면서 우리한테 와줬는데 안 좋은 소식 전해서 미안하다고 한 거잖아? 어떠케 안사랑해ㅠ
해물된찌 @So_Delicious
진짜 개빡친다 애들 이런 상황인데 여태 YC는 뭐했냐? 애초에 데뷔 볼모로 잡고 마아스 내보낼 게 아니라 애들 케어하고 스토커 강경 대응부터 했어야지.. 나 지금 눈물 남
비슷한 기사 두어 개를 더 확인한 정은은 차가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집부터 가야 했다. 집에 가서 오늘 방송을 다시 보고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 봐야겠단 생각에 정은은 무거운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