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80화 (180/192)

#180

***

솔은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피곤한 기색을 지우기 위해서, 그리고 혹시라도 숨기지 못할 슬픈 기운을 덮어 버릴 생각이었는지 오늘따라 메이크업은 더욱더 화사했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예술 작품을 완성하듯 공을 들인 메이크업이었지만 붉게 충혈된 눈까지는 가릴 수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시야가 흐릿한 건지 아니면 제 눈에 보이는 민트색 창이 흐릿한 건지. 매일 같이 저를 반기던 민트색 알림창이 이제는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글자를 한참 바라보던 솔은 이내 알림창을 꺼 버렸다.

몇 개 남지 않은 안정의 포션, 이제는 그것도 몇 개가 남았는지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흐릿했다. 지금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닫아 버리면 어쩌면 다시는 이 창이 열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로그인 보상과 미션 창처럼. 하지만 상관없었다.

TEAM ONE 멤버들이 마지막 무대의 리허설을 준비하던 시간, 소식을 들은 일부 참가자들이 찾아와 진심 어린 위로와 인사를 건넸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그들의 하차를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전달되는 것이기에, 솔은 오늘만큼은 정말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만약 무대에서 긴장하여 떨고 실수를 하게 되면 아쉽고 슬프겠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도 자신이었다. 오늘 자신을 응원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라면 그런 자신을 보며 함께 슬퍼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응원해 줄 게 훤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최선을 다해 내보인 성솔. 물론 그렇다고 실수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한 모습만을 보여줄 것이다. 솔은 고개를 크게 저어 눈앞에 흐릿하게 일렁이는 알림창을 치워 버렸다. 오늘만큼은 아니 이제 더는 시스템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솔이 붉게 충혈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다 거세게 머리를 저으니 태오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툭, 꼿꼿하게 펴져 있던 등의 한가운데에 닿는 따뜻한 손바닥에 솔은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지?”

“응! 완전.”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한 태오의 물음에 솔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우스운 걸 보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밤을 꼬박 지새우고 온 탓에 다들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새하얀 의상과 은발을 한차례 손봐 더욱 새하얀 머리칼을 가지게 된 솔은 눈만 빨간 것이 꼭 흰 토끼 같았다.

방송국에 오기 전까지 갑자기 변경된 편곡에 준비 시간이 촉박해지는 바람에 밤을 꼴딱 새우고도 모자라 리허설 직전까지 준비에 준비를 거듭해야 했다. 그래도 다들 몸은 피곤할지언정 정신은 또렷했고 아쉬움 같은 것은 다 연습실에 두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 탓에 제 목을 감싸는 긴 레이스 프릴의 모양이 흐트러진 것을 발견하곤 거울을 보며 정리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지호가 솔에게 다가와 뒷부분을 마저 정리해 주었다. 솔에게 달라붙었던 스타일리스트들이 그렇게 이를 갈더니 어디서 오뜨 꾸띄르 의상 한 벌을 만들어 온 듯 우아했다. 기성복을 구매하여 리폼했던 지난 무대 의상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정말 멤버들에게 맞춰 제작한 의상들이었다. 그 덕분에 솔과 멤버들이 연습실에서 밤을 새울 동안 위층에서도 밤샘 재봉질과 구슬 꿰기를 반복해야 했다.

피팅 내내 왕자님, 왕자님 하며 왕자님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더니 정말 멤버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순백의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 레이스와 몸의 윤곽이 비치는 얇은 흰색 천으로 만들어진 상의에 금빛 액세서리와 리본을 더한 멤버들은 저마다 다른 성격의 왕자님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나 솔은 레이스로 만든 셔츠 칼라가 목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다소 과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지만 부담스럽기는커녕 원체 긴 목과 작은 얼굴을 더욱 부각시켜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홀로 선보여야 하는 독무에 맞춰 소매도 일부러 길게 뺐는데,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 길게 늘어지는 소매가 지나치게 페미닌한 느낌을 주었지만 화려한 레이스 사이로 드러나는 몸은 시원한 기럭지의 남성의 것이라 분위기가 무척 묘했다.

“미녀인 공주님을 두고 싸울 게 아니라 솔이 왕자님 두고 결투를 벌여야 한다니까.”

“내가 싸우러 나갈 건데?”

지호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농담을 던지자 솔은 늘 달고 살았던 겸양 대신 장난스러운 말로 받아쳤다. 그의 말에 밝은 금발로 염색한 지호가 소리 내 웃으며 네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 말대로 오늘 무대에 화려하게 꾸며진 레이피어를 들고 올라가 멋들어진 결투를 치러야 할 사람은 솔이 맞았다. 그리고 오늘 그의 싸움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를, TEAM ONE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호가 툭툭, 솔의 어깨를 힘내라는 듯 두들겼다.

매번 무대에 함께 올라갔지만, 오늘은 멤버들보다 앞서 홀로 무대에 올라가야 했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떨림이 전처럼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같이 느껴지진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두근거림이 온몸, 손끝에까지 힘과 무대를 끌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은 있는 힘껏 주먹을 꽉 움켜쥐어 보았다.

“우리 화이팅 할래?”

솔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기 무섭게 보송한 하얀 찐빵 같은 모자를 쓴 득용이 재빨리 달려와 솔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득용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순식간에 순서를 빼앗긴 태오가 움찔거리며 어색하게 득용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가람도 다가와 태오의 손 위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지막으로 맏형인 지호가 옹기종기 모인 손들을 덮자 다섯은 서로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둥글게 머리를 맞대고 모인 다섯은 실컷 웃으며 대기실이 떠나가라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TEAM ONE 파이팅!”

***

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슬로건을 꽉 움켜쥐었다. 때마침 옆자리 방청객도 7조, 그것도 솔의 팬이라기에 정은은 손수 제작한 슬로건을 나누어 주었다. 옆자리의 여성 팬은 본인은 똥손이라 나눔할 것이 없다며 사탕을 한 뭉치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이가 몇 살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인지 등 그 어느 것 하나 모르는 그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일 뿐이었지만 같은 가수를 응원한다는 것 하나로 그들은 평생지기처럼 한참을 속닥거렸다.

사실 대화 내용이냐고 별것도 없었다. ‘우리 솔이 이쁘죠…. 와기, 에인절, 남신, 우주최강미소년!’ 같은 솔이 이쁘다는 말만 서로 반복하고 그 말에 ‘맞아요, 진짜로요.’ 같은 맞장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에서 오는 유대감은 생각보다 강하고 끈끈했다. 초면임에도 한참 동안 소소한 덕톡을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에 일순 말소리가 사라졌다. 정은은 무대를 응시한 채 솔의 얼굴이 들어간 종이 슬로건을 꼬옥 움켜쥐었다.

MC가 정은이 애타게 기다리는 팀의 이름을 부르자 무대를 비추던 모든 조명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얼핏얼핏 무대 위를 분주하게 오가는 인영이 보였다. 이제 곧 시작이었다. 어젯밤 이를 악물고 업무를 마무리한 뒤 바로 연차 신청서를 내던진 채 서울행 KTX에 몸을 실은 건 다 곧 눈앞에 펼쳐질 순간 때문이었다. ‘성솔’을 제 두 눈으로 보려고.

어느 날 우연처럼 TV를 통해 만난 제 아이돌. 홀린 듯 덕계를 파고 덕질을 시작할 때만 해도 뇌가 도파민에 절여진 듯 그의 사진만 봐도 행복했다. 하지만 지난 몇 주간 수명이 깎이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쨌든 팬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논란과 사건은 잘 해결이 되었지만 그걸 잘 해결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는 팬은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최애가 사실은 제대로 된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고 지금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 놀란 팬들의 마음을 후벼 파다 못해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친 듯했다.

사실 정은은 솔의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다. 가끔 어색하던 표정이, 엉뚱한 듯 어리바리한 소리를 해 그저 귀엽다며 웃고 넘겼던 그런 모습들이 사실은 무척 아팠거나 힘들었을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며칠 질질 짜며 회사에 다녔다. 슬펐지만 그래도 돈은 벌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 최애를 보러 서울에도 가고 굿즈도 사고 할 것 아닌가.

그래서인지 사건이 일단락된 후로 솔의 팬들은 이번 방청만큼은 꼭 성공해서 한자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따로 하는 SNS도 없거니와 다른 팀들처럼 커뮤니티나 팬클럽에 인사를 올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특별히 소통할 방법이 없는 제 가수에게 이렇게 너를 사랑하고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알려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정은은 무교였지만 지난 며칠간은 불교, 천주교, 기독교의 충실한 신자처럼 매일 같이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공을 들인 결과가 바로 오늘이었다. 모두 정은과 비슷한 마음이었던 탓일까? 입구에 줄을 설 때부터 이미 곳곳에 7조와 관련된 슬로건이나 자체 제작한 굿즈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7조의 팬 비율이 높은 듯했다.

곧 입장할 때만 해도 무대가 떠나갈 듯 소란스러웠던 그 팬들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관객석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정은처럼 두 손만 꼭 움켜쥔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무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련한 귀에 익은 익숙한 음률이 울려 퍼졌다. 느릿하게 치는 피아노 소리. 건반을 꾹 누를 때마다 어두운 무대 위에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이내 피아노 반주 위에 바이올린 선율이 덧대어지자 조명이 마치 길을 안내해 주듯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침내 하나씩 등장한 악기들이 온전한 하나의 소리가 되자 여러 갈래의 조명이 무대 정중앙, 오직 한 곳을 비추었다.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모인 것처럼, 여러 갈래의 조명이 모이자 눈이 부실 정도로 거대한 빛이 되었다. 어둑한 무대 위에 서 있는 새하얀 솔을 더욱 환하게 비추어 줄 빛. 수줍은 소년처럼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무리를 가렸다. 정은은 그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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