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솔을 보며 태오는 조금 전 자신이 왜 그토록 은겸에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변명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질책이 가득한 말이었다.
“태은겸이 널 보는 시선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연락하는 것도 싫어. 유치하지? 내가 생각해도 참 초라하다.”
하루아침에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 자신이 당한 것이 있어서일까 그냥 은겸의 시선 끝에 솔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태오 자신이 솔에게 은겸과의 사이를 강제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간 샘솟는 질투를 꾹꾹 눌러 담고 솔과 은겸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는데, 오늘 기어이 터져 버렸다.
솔의 걱정대로 정말 안 괜찮은지도 몰랐다. 뒤늦게 사춘기가 왔다거나 감정적으로 몰려 있다거나.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이토록 감정적인 대응과 그 감정에 휘둘려 어린아이같이 치기 어린 대처를 한 자신이 태오도 낯설 지경이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솔 앞에서 그런 것에 꽁해 있기보단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솔을 난처하게 만든 게 사실이지 않은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거기다 주제넘게 제가 뭐라도 되는 양 질투한다는 게 우스웠다. 태오는 솔의 앞에서 멋지고 어른스러운, 그가 항상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만큼 그를 속이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태오는 자기 얼굴을 보지도 않는 솔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불편하게 했지. 미안하다.”
“…….”
그의 사과에 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앉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일까, 태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솔이 장례식장에서 제 마음을 어렵사리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못 되고 비겁하게 굴었는지 아직도 그때가 선명했다. 그리고 사실 그 비겁함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고백을 들어 놓고, 비겁하게 그런 짓을 해 놓고 아직까지 솔에게 뚜렷한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빤히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아직 입을 열어 정리하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을 볼 낯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을 소리를 내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 놓고 제 감정이 격양되어 질투만은 드러내고 이 와중에도 그와 지척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 몸과 마음이 눈치 없이 나대는 것에 솔이 실망했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태오는 아무런 말이 없는 솔을 한참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실망했어?”
차라리 너 때문에 난처했다. 왜 유난이냐, 그도 아니면 은겸 형과는 그냥 친구 사이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이런 말이라도 한마디 해줬으면 싶었다. 아니면 정말 실망했다는 대답이라도. 침묵보다는 그게 나을 것도 같았다. 솔은 점점 더 깊어지는 태오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이 미적지근한 관계를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솔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솔은 태오를 그대로 떠나보내게 될까 봐 성급하게 내뱉었던 자신의 고백이 태오를 얼마나 곤란하고 난처하게 만들고 흔들었을지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솔의 머릿속에 은겸이 자신에게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던 말. 은겸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땐 내심 속으로 이 모든 걸 알고도 어떻게 모른 척 지내냐고 원망했지만, 막상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자 이해가 되었다.
태오에게 리더로서 책임감이 있는 한 그리고 적어도 함께 멤버들과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엔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어떠한 관계로 확립할 수는 없을 거라 솔은 생각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건 피차 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바라볼 멤버들과 지금도 고작 손을 잡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노심초사하면서 그 이상을 꿈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솔은 지금의 미묘한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조금 전 태오에게 ‘질투했다.’라는 말을 듣기 전 까진 말이었다. 자신이 마음에 둔 상대가 자신의 일에 질투한다는데 그 어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모습을 귀여워하지 않고 설레지 않을 수가 있을까?
솔이 태오의 옷자락을 붙잡자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복도에서 안겼던 은겸보다도 태오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심장 소리와 다르게 짙은 인상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박동하지 않는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태오의 표정은 너무도 가라앉아 지금 제 귓가에 쿵쿵 들리는 박동 소리가 사실은 제 것이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다. 솔은 태오의 옷자락을 붙잡고 다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솔의 다급한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옆방의 문이 딱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솔이가 내려간 지가 언제인데 태오 얘가 아직도 안 와. 평소 같으면 미리 와서 기다렸을 애가….”
태오가 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피팅을 하러 오지 않자, 영호가 그를 직접 부르러 방을 나선 듯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푸념이었는데, 영호의 목소리가 두 사람에겐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솔은 그의 목소리에 순간 ‘헉’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며 태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숨까지 멈춘 솔은 태오의 옷깃을 잡아 제게로 확 끌어당겼다.
그럴 일은 없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영호에게 들킬까 봐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태오를 안쪽으로 잡아당긴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솔의 행동에 태오가 중심을 잃고 두어 걸음 끌려왔다. 덕분에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솔은 태오의 가슴팍에 뺨을 폭 가져다 댄 모양새가 되었다. 영호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옅어지자 그제야 안도한 솔은 제 뺨에 느껴지는 단단한 신체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밀어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뭐? 무슨 말 하려고 했어?”
태오는 자신을 밀어내는 솔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조금 전 그가 하려 했던 말의 끝을 듣고 싶었다. 솔직히 그는 솔이 뒤에 무슨 말을 이으려 했는지 가늠도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태오에겐 성솔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듯 어려웠다.
태오가 제 손목을 덥석 붙잡자 솔은 얼굴뿐 아니라 그에게 잡힌 손목까지 붉어져 말까지 더듬었다. 밀어냈던 태오가 제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하고 눈동자를 맞추며 물어 왔다.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 씁쓸했던 첫 키스의 기억이 떠올라 솔은 눈을 질끈 감고 급히 대답을 얼버무렸다.
“시, 실망 안 했다고.”
이 와중에도 태오는 저를 밀어내고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모양 이쁜 입술을 보며 이대로 키스하고 싶단 생각이나 했다. 영화 속에서 사랑에 빠져 모든 일을 그르치는 머저리 같은 남자들을 보며 비웃고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이젠 본인이 그러고 있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이대로 키스하면 더 실망할까? 어쩌면 장례식장에서 했던 첫 키스보다도 더 씁쓸할지도 몰랐다. 여기서 물러나야 함을 알고 있는데 쉽지 않았다. 한번 느껴 본 적 있는 입술은 태오에게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아릿한 느낌을 줄 것이었다. 태오는 솔의 입술을 눈에 담으며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 끝까지 말해 줘.”
태오가 속삭이는 듯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와 다르게 집요하게 묻자 솔은 한쪽 눈만 흘끔 떠 조용해진 복도를 눈짓하곤 말을 돌렸다. 이미 영호의 발걸음 소리는 멀어졌고 복도는 한없이 조용했지만 솔은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붉히며 태오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나 변덕이라곤 없었던 태오가 어째서인지 오늘은 유난히 솔을 당황하게 했다. 태오 자신도 제 변덕이 이토록 들끓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솔에게도 그러하듯 변변찮은 연애는커녕 누군가에게 이토록 마음을 쏟아 본 적도 없는 태오에게도 처음 찾아온 사랑은 어렵고 혼란스러웠으며 두려웠다.
“어서 들어가. 들키겠어.”
아래층에 저와 태오를 찾으러 간 영호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태오는 옆방에서 피팅을 받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태오는 솔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멀어지려는 솔에게 자꾸만 다가갔다. 머리는 지금 이대로 솔을 놓아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옆방에 들어가 피팅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한번 밀착된 몸은 쉬이 거리를 벌리지 못했고 머리보다도 마음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뭘 들키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태오의 물음에 솔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계속 ‘우리가….’ 라는 말만 반복했다. 뭘 들킨단 말인가 죄지은 것도 별달리 한 것도 없는데, 그저 작은 방에서 둘이 밀착한 채 속닥거렸을 뿐이지 않나. 솔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달궈진 쇳덩이처럼 빛을 발할 지경이었다. 머리로 온몸의 열이 올라 펄펄 끓어오른 주전자처럼 증기를 내뿜을 것 같았다. 솔은 고개를 더욱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태오는 더욱 솔에게 밀착하며 그의 손목에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그…. 우리가 이런 거…”
뺨에 닿은 가느다란 손목에서도 두근대는 맥박이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거?”
태오는 솔의 손목에 제 뺨을 꾹 밀어 대며 흔들리는 두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철렁, 기어이 태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두근두근 뛰던 손목의 맥박도 잠깐 멈춘 듯했다. 태오는 솔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솔이 자신에게 했듯이 그도 솔에게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성솔….”
하지만 태오는 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아주 실같이 남아 있는 그의 자제력이 태오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태오가 그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자 솔은 구멍 난 그물망을 유려하게 빠져나가는 비단잉어처럼 태오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이 상황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태오의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찰칵, 문고리를 돌리자 태오 등 뒤의 문이 열리고 복도의 환한 빛이 흘러들어 왔다. 솔은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리며 현실로 돌아가라 태오를 채찍질했다.
“이러다가 스타일리스트 누나들까지 찾으러 나오겠어.”
“…….”
각자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좁은 방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속으로 지금 이 모든 것이 ‘어렵다’라고 같은 듯 다른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