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77화 (177/192)

#177

더 이야기해 봤자 마음만 침울해질 뿐인 회의를 끝마치고 연습실로 돌아온 멤버들에게 영호가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한잔씩 돌렸다. 별것도 아니지만 그렇게나마 멤버들의 기분을 환기해 주려는 영호의 작은 배려였다. 하지만 이번 방송에서 1위를 하던 꼴찌를 하던 어쨌든 하차가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감이 찾아온 득용은 음료도 마다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솔은 슬쩍 득용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득용이 ‘힝’하는 소리를 내며 솔에게 머리를 기댔다.

다사다난한 일들로 인해 준비 시간이 짧았던 솔도 무력감을 느끼는데 다른 멤버들은 어떨지 일일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갑자기 참여하게 된 프로그램에 매번 경연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막상 이렇게 타의에 의해서 끝이 정해져 버리니 맥이 풀렸다. 솔이 이러한데 다른 멤버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었다.

영호가 음료를 건네며 미안하다는 말과 더불어 마지막 무대는 정말 제작사 측에서 배가 아플 정도로 멋지게 해보자는 말로 기운을 북돋아 주려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사실 회의실에서 나온 이후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뒤통수를 거나하게 맞은 듯 머리가 띵해 그저 맹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솔도 득용을 토닥이며 그렇게 앉아 있는데 태오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솔이 한차례 보여 주었던 안무를 완전히 숙지한 듯 태오는 망설임 없이 안무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음악도 없었지만 태오는 마치 간주를 듣고 있는 듯 박자 하나 어긋나지 않았다. 솔은 넋을 놓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같은 안무지만 태오가 표현해 내는 동작과 솔 자신이 표현하는 동작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둘 다 잘 추는 건 매한가지지만 솔의 춤 선은 유려하고 섬세하며 작은 디테일들이 있다면 태오의 춤은 보다 힘이 있고 절도가 있는 편이었다.

연습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짧은 시간을 맞춰 보고 안무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 태오를 바라보며 솔은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제 안무처럼 매끄럽게 동작을 이어 나가던 태오가 갑자기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태오는 자신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솔과 눈을 맞추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물었다.

“성솔, 이다음에 뭐였지?”

“어? 그다음에 왼발 턴해서….”

갑작스러운 태오의 질문에 얼떨결에 대답하려던 솔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서일까 막상 대답하려니 솔도 조금 헷갈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태오가 조금 전 했던 동작을 따라 하자 그다음 동작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몸에 익어 이전 동작을 추면 다음 동작이 자연스레 이어졌지만, 말로 설명하려니 아리송해 그냥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빨랐다.

갑작스런 태오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던 솔은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솔은 태오가 안무 숙지를 다 했으면서 일부러 솔에게 다음 동작을 물었음을 깨달았다. 태오는 아주 형식적인 어조로 ‘아, 맞다.’ 하곤 능숙하게 솔과 같은 동작을 펼쳐 보였다. 빤히 다 알면서, 솔은 태오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솔은 다시 득용의 옆에 앉기보단 태오의 옆에 대형을 맞춰 섰다. 둘의 동작은 오래 합을 맞춰 본 것처럼 발이 딱딱 맞았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솔이 합류하자 태오는 몸을 움직이며 노래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오디션을 보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던 곡이었기에 태오는 자연스레 노래를 불렀다. 솔이 이 곡을 선택한 이유엔 이런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습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을 태오가 잘 알고 있을 노래. 두 사람이 합을 맞추기 시작하자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가람과 지호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람이 먼저 몸을 일으켜 솔과 태오의 뒤로 다가서자 지호와 득용도 차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대형을 갖춰 선 다섯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MR을 따로 틀지 않아도 수없이 반복해 들은 노래는 자연스레 머리를 맴돌았다. 태오를 시작으로 지호와 가람까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솔도 따라 함께 노래했다. 다섯 명의 노랫소리가 합쳐지니 머릿속을 맴돌던 소리가 이젠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다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다 보니 불현듯 솔의 머릿속에 태오가 보여주었던 게시판의 글이 떠올랐다.

이제는 누군지 기억할 수 있는 얼굴이 그 글에서 연상이 되었다. 졸업식 날 사탕이 가득 든 상자를 건넸던 여자아이. 그 외에도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지금도 멀리서나마 솔에게 응원을 보내 주고 있는 사람들. 그 외에도 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를 좋아한다며 투표까지 했다고 다음엔 사진을 같이 찍자 했던 지호의 여동생들. 비단 그들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솔직히 한 화에 솔이 화면에 비치는 순간이 몇 분이나 될까. 그 많은 참가자 중에서, 거기다 무대에 설 때도 다섯 명이 한 곡을 나눠서 부르니 실제로 솔의 얼굴이 tv에 송출되는 시간은 더 짧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자신이 좋아서, 자신을 응원하려고 그 짧은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많은 애정과 응원을 받고 있었다니. 그 예전 자신은 왜 그토록 세상에 홀로 남은 것에 대해 걱정하는 시선을 적대시했었을까.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너무도 늦은 만큼 이제는 자신이 그 큰 애정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럴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마아스>의 마지막 무대, 회사에서 기사가 나가는 시기를 대대적으로 조율하고 있기에 별달리 공개된 소식은 없었다. 따로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와 소식을 전할 SNS나 연락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라곤 무대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엔 정말 마지막 무대였다.

어쩌면 정말로 솔의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영호는 걱정하지 말라 말했지만 정작 그리 말하는 영호의 얼굴에 근심이 짙었다. 영호도 회사가 어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앞서 영호의 말대로 이번 무대는 그 어느 때보다 멋지고 잘해야 했다. 이번 무대와 방송에서 제대로 진심으로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했다. 그들의 탈락이 아쉬울 정도로. 그게 바로 지금까지 그들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감사 인사였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허탈감에 젖어 손을 늘어뜨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솔이 갑자기 열의를 띠자 멤버들도 덩달아 그를 따라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우울감에 늘어졌었냐는 듯, 다들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노래하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팀의 분위기를 솔이 중심이 되어 바꿔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연습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영호가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멤버들을 찾아왔다. 항상 함께 해 오던 스타일리스트뿐만 아니라 못 보던 얼굴도 추가된 그들은 비장한 얼굴로 멤버들에게 마지막 무대 의상 피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례로 한 명씩 스타일리스트에게 끌려간 멤버들은 정신이 쏙 빠질 만큼 많은 손길을 받아야 했다. 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호와 회사가 벼르긴 별렀는지, 매번 하던 가벼운 피팅과 달리 이번만큼은 다들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 덕분에 본 무대도 아니고 그저 피팅일 뿐인데도 액세서리나 의상에 대한 의견이 수십여 가지가 오갔다. ‘대충 아무거나 잘 어울리는 거’가 아니라 아주 각을 잡고 꾸며 줄 생각인 듯했다. 이제 이런 일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초창기로 돌아간 듯 정신이 없었다. 혼이 쏙 빠진 얼굴로 옷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방을 빠져 나오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솔을 큰 소리로 불렀다.

“솔아!”

반사적으로 휙 뒤를 돌아보니 은겸이 서 있었다. 그는 한달음에 솔에게로 달려오더니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은겸 형?”

깜짝 놀란 솔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은겸은 솔의 얼굴을 확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샅샅이 훑어보고는 다시금 솔을 품에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은겸을 밀어내려던 솔은 순간 코끝에 스치는 은겸의 향수 냄새와 미친 듯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멈칫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은겸의 목소리가 너무도 떨리고 있어 솔은 차마 그를 모질게 밀어내지 못했다. 귓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가 어떤 불안에서 기인한 것인지 짐작이 갔다. 아무리 같은 회사 소속이라지만 솔은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 신분이고 은겸은 명실상부한 회사의 간판스타였다. 국내외 개인 스케줄로 바쁜 그가 일부러 시간을 내 따로 확인하지 않으면 솔의 소식이 그의 귀까지 들어갈 일이 없었다. 필시 지금도 따로 확인한 그가 솔의 소식을 듣고 철렁해 한달음에 달려왔을 게 훤했다.

솔은 은겸이 충분히 놀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팔에 힘을 빼고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미친 듯이 거칠게 뛰고 있던 은겸의 심장 소리가 점차 제 규칙을 찾아가던 때, 누군가가 은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힘에 은겸의 품에서 벗어난 솔은 고개를 돌려 팔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다음 피팅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을 태오였다. 순간 태오의 짙은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며 그는 은겸의 품에 안겨 있던 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 하시는 겁니까?”

태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거칠게 밀쳐진 어깨가 제법 아픈지 은겸은 어깨를 매만지며 태오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뭘 하긴. 너는 내가 뭘 한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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